김세연: 이번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는 강준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님을 모시고 교육 분야에 관해 말씀 나누겠습니다. 강준호 학장님은 서울대에서 학습과학연구소를 출범시키셨고, 학습 과학이라는 새로운 전공을 사범대학 학제에 마련하셨습니다. 더불어 초·중등 교육에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계십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강준호: 안녕하세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 강준호입니다. 제 전공 분야는 스포츠 마케팅이고, 소속은 사범대 체육교육과입니다. 교육학이 제 전공 분야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 교육이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행위이고, 스포츠는 신체 활동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행위라는 점에서 스포츠의 본질은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세연: 기존 체계와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각도로 접근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학장님께서 학교 행정을 비롯한 여러 문제에 관해 틀에 갇히지 않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을 봐왔습니다.
첫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저서 《몸 교과서》에서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대담 직전에 잠시 대화 나눌 때 뇌 과학 이야기도 나왔지요.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공존하는 새로운 존재, 인간과 동등하거나 인간을 능가할 잠재력까지 지닌 존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 변화는 인간에게 존재론적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학장님께서는 기존의 지식 암기와 계량화된 평가로 인간을 재단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과 학습 관점을 정립하기 위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취지로 책을 쓰셨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기술 변화와 이에 따른 인간 인식의 변화를 어떻게 보시는지 질문드립니다. 또한 앞으로 이런 변화를 어떤 방향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강준호: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지금 인류는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50년 전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 시작된 산업 혁명이 인간의 육체노동을 대체하는 기계의 출현을 알린 시발점이었다면, AI 혁명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는 개체가 나타난 사건입니다. AI 혁명은 단순히 일자리 감소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의 정체성을 ‘지능’에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다른 동물보다 지능이 뛰어난, 소위 ‘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해 왔고, 그런 인간이 다른 동물과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 세계관을 가져왔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언명이 근대와 사유의 세계라는 문을 열었죠. 이러한 이성적 인간관을 바탕으로 합리적 사고,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과학 혁명, 그리고 산업 혁명이 일어났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현대 문명이 건설됐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근대적 인간관과 세계관의 연장선에서 살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개체가 출현하면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시 봉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위기를 맞아, 인간을 키워야 하는 교육이라는 분야도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겠죠. 현실 세계에서 교육은 많은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교육 과정, 교사 양성, 입시 등 교육 체계 내부의 문제에서부터 노동, 복지, 심지어 부동산 문제까지 교육 외적인 문제와도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AI 혁명과 같은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이할수록, 현실의 교육 문제가 복잡할수록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가.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교육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인간을 인간답게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온전한 개체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것입니다. 개인적 차원의 목적이죠. 온전한 인간의 의미를 알려면 교육 철학적 논쟁을 넘어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 동물인지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논의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멤버십 교육에 해당합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사회에 공유되는 표준(norm)이나 문화, 의식 등을 공유해야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대적인 공유도 있겠지만, 통사적으로 공유해야 할 부분도 있고요. 교육의 사회적 목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그 시대와 그 나라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AI, 반도체, 에너지 등 나라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 공급하는 일입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고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화학공학, 조선공학, 무역학과를 만들어 인적 자원을 공급했습니다. 국가 전략적 목적입니다.
세 가지 목적 중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동안 진보 진영에서는 평등 교육을 주장하며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멤버십 교육을 강조해 왔습니다. 두 번째 목적을 강조한 것이죠. 반면에 보수 진영은 우수 인재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수월성 교육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세 번째 목적이죠.
그런데 보수와 진보의 교육관이 경쟁해 온 가운데, 정작 인간을 인간답게 성장시키는 교육의 첫 번째 목적은 도외시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AI 시대가 오기 전부터 있었던 우리 교육의 내재적 문제입니다. 평등 교육이든 수월성 교육이든 개별 인간을 인간답게 성장시킨 다음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균형이 깨져 괴로운 상태라면 어떻게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되고, 유능한 인적 자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교육의 세 가지 목적 중 첫 번째가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AI로 인해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다움의 본질이 흔들리는 현 상황에서는 중요성이 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목적을 어떻게 구성해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를 만들 것인가, 이것이 미래 교육을 설계할 때 가자 중점을 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보수와 진보 모두가 소홀히 했던, 인간을 인간답게 성장시킨다는 교육의 첫째 목적을 달성하려면 먼저 ‘인간다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강준호: 결국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죠. 인류가 수천 년간 던져 온 이 질문을 지금 다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어 왔던 인간관이 과연 맞는지에 관한 의문이 강해지고 있고, 실제로 뇌 과학을 통해 의문이 풀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지닌 인간관은 어떤 것일까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피할 수 없는 질문 중 하나가 몸과 마음의 관계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져 온 논쟁이죠. 서양 문명의 근간을 만든 플라톤은 관념론자였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실재하고, 우리가 현실에서 인식하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믿었습니다. 이 관점을 인간에게 투사해, 인간에게도 정신과 영혼과 이데아가 있고, 육체는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했죠. 정신에 우위를 두고, 육체는 영혼을 가두고 있는 감옥일 뿐이라고 생각한 거죠.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전통이 중세 시대를 거쳐 마침내 데카르트(1596~1650)에 이릅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를 인류 역사상 가장 명확히 규명한 사상가였죠. 데카르트는 정신도 육체처럼 실체가 있다고 봤고, 두 실체가 송과선(松果腺)을 통해 연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언명을 남겼죠. 데카르트는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고 선언합니다.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본 겁니다. 즉, 인간의 고유성은 이성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이로써 사유의 세계를 통해 경험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고, 학문의 체계화가 가속했습니다. 이성을 강조하다 보니 과학적 사고, 합리적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이런 흐름이 계몽사상으로 이어졌고, 근대가 열리게 됩니다.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이 일어나며 인류 문명은 급격히 발전했습니다. 진정한 인류 문명은 데카르트가 근대를 열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20만 년인데, 19만 년 동안은 수렵 생활을 했습니다. 불과 1만 년 전에야 정착 생활을 시작하며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또 그렇게 1만 년 동안 큰 변화 없이 지내다가 500년 전에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라는 인식과 함께 근대가 열렸습니다. 1750년 증기 기관 발명으로 산업 혁명의 불씨가 시작되고, 1800년대 후반에는 전기가 등장했으며 1943년에는 최초의 컴퓨터가 나오고, 1980년에 PC, 1990년에 인터넷, 2007년에 스마트폰이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드디어 대중을 위한 인공지능, 챗GPT가 등장했습니다. 인류 역사 20만 년을 20년으로 압축한다면, 마지막 몇 분 안에 모든 변화가 일어난 셈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믿어 왔지만, 데카르트와 동시대에 전혀 다른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피노자(1632~1677)입니다. 스피노자는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실체에 다른 양태일 뿐이라는 거죠. 스피노자는 이를 동전의 앞뒷면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이성이 아니라 감정, 몸, 욕망 같은 곳에서 찾았습니다.
몸과 마음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쟁은 크게 심신이원론과 심신일원론으로 나뉘는데, 근현대 철학자 중에서 니체, 푸코, 들뢰즈, 메를로-퐁티 등이 전부 스피노자 계열로 돌아서면서 심신일원론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이 철학자들 사이의 형이상학적 논쟁에만 머물렀다는 점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의 무의식과 사회 제도 속에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으며, 정신이 신체를 통제한다거나 우월하다는 인간관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논쟁에선 결론이 났지만, 현실과는 괴리가 생겼죠. 이미 ‘근대’라는 배가 떠나버린 겁니다.
그 후 20세기로 접어들며 뇌 과학이 등장했고, 20세기 후반에 급부상합니다. 뇌는 인체 장기 중 마지막으로 남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1990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향후 10년을 ‘뇌 연구 기간(Decade of the Brain)’으로 정하고 수십억 달러를 투입했지만, 기대만큼 많은 것을 밝히지는 못하고 다소 실망스럽게 끝났습니다. 현재도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데, AI가 접목되면서 뇌 과학의 비밀이 빠르게 풀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AI가 단백질 구조를 예측했듯 말이죠. 인간의 뇌에는 약 1000억 개의 뇌 신경 세포(뉴런)가 있고, 각각 수천 개의 다른 뉴런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 지점을 시냅스라고 하는데, 총 100조 개 정도 됩니다.
100조 개의 시냅스로 인간의 모든 활동이 이루어집니다. 감정, 생각, 판단, 팔다리의 움직임 등 모든 인간다움이 여기서 나옵니다. 시냅스 조합 10개가 활성화될 수도 있고, 100개, 1000개가 활성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 복잡한 패턴을 인간이 스스로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서, 결국 AI가 패턴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될 것입니다. 이런 연결망 지도를 만드는 연구를 커넥톰(connectome) 연구라고 합니다. DNA 지도를 그리듯, 인간 뇌 신경 세포의 길을 골목길까지 파악하는 작업이죠.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고, 각 경로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밝혀내는 연구는 앞으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갈 길이 멀지만, 뇌 과학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라는 저명한 뇌신경과학자가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하나는 《데카르트의 오류》입니다.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어 있고 정신이 신체를 통제한다는 데카르트의 관점이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정신과 신체는 하나이며, 오히려 정신은 신체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거꾸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얘기입니다. 인간관의 변화로 따지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수준입니다.
다마지오가 쓴 또 다른 책이 《스피노자의 뇌》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스피노자의 인간관이 옳았다는 것을 뇌 과학적으로 설명한 책입니다. 현대 뇌 과학은 뇌에서만 의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몸 전체에서 나온다는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뇌 과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의식이란 몸이 사회, 다른 사람, 사회적·물리적 환경과 상호 작용하면서 온몸에서 창발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김세연 님과 대화를 하면 제 목소리, 비주얼, 심지어 체취까지 김세연 님의 몸을 통해 뇌로 전달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감각 정보가 물리적 변화를 일으키죠. 아주 미세하게라도 몸 어딘가에 변화가 생깁니다. 그 상태로 집에 가서 가족을 만나면, 김세연 님은 저를 만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 영향이 또 타인에게 전달됩니다. 결국 사람과 사람, 자연, 사회 모두가 정보의 흐름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인간을 독립된 개체라고 생각하지만, 몸 안에는 장내 미생물이 있습니다. 이 미생물은 우리가 먹는 음식, 즉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옵니다. 결국 외부 세계가 내 안에 존재하는 셈이죠. 우리는 피부가 ‘나’와 ‘외부’를 구분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 과학은 메를로-퐁티가 말한 ‘몸 철학’, 즉 “몸이 나의 주체다”라는 선언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메를로-퐁티가 철학적으로 사유해 형이상학적 언어로 이야기했던 것을, 뇌 과학이 데이터와 자연 과학적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동양에서도 몸을 의미하는 한자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몸 체(體)’와 ‘몸 신(身)’입니다. ‘몸 체’는 물리적 몸, 즉 심신이원론적 관점에서의 몸이고, '몸 신'은 몸과 마음이 분리되지 않은 전인격적 몸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의 ‘수신(修身)’이 바로 그 ‘몸 신’입니다. 헬스클럽에 가서 근육을 키우라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아우르는 전인격적 수양을 하라는 뜻합니다. 심신일원론적 인간관이죠. 동양에서는 사람도 자연의 일부로 봤고, 심신을 하나로 보는 몸의 개념이 있었던 겁니다.
김세연: 인간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해 서양 철학, 동양 사상, 그리고 뇌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심신일원론적 인간관에 기초한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강준호: 우리는 흔히 머리 아래만 ‘몸’이라고 생각하고, 뇌가 내 몸을 통제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마징가 제트’처럼요. 저는 이걸 ‘마징가 제트 인간관’이라고 부르는데, 마징가 제트 머리에 사람이 탑승해서 로봇을 조종하는 것처럼, 뇌가 모든 것을 조종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뇌는 몸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뇌도 몸의 일부입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일종의 ‘일루전(illusion, 환상)’입니다. ‘본다’라는 것도 시각 정보와 감각 정보를 받아들여 뇌가 그것을 표상으로 재구성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정보의 재현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 수 있는 ‘러버 핸드 일루전(Rubber hand illusion)’이라는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칸막이를 두고, 내 팔을 바깥으로 빼서 보이지 않게 합니다. 칸막이 안쪽에는 가짜 팔에 옷을 입혀서 마치 내 팔처럼 보이게 둔 상태에서 실제 팔과 가짜 팔을 동시에 긁어 자극을 줍니다. 그러면 뇌는 가짜 팔을 ‘내 팔’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후에, 갑자기 가짜 팔을 망치로 내려치면 실제로 아프지 않은데도 통증을 느낍니다. 뇌가 시각 정보를 통해 가짜 팔을 내 팔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시각 정보, 촉각 정보, 팔의 위치 정보 등이 조합되어 의식이 형성되고 통증을 느끼는 겁니다.
뇌 과학자들은 의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둘째는 세상에 대한 의식입니다. 의식을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예측적 지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컵을 집어 들어 물을 마시려고 할 때, 이미 뇌는 자동으로 컵을 잡았을 때의 촉감을 예측하고, 물이 혀에 닿는 느낌과 삼킬 때의 감각까지 모두 예측합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입니다.
또 다른 의식은 사회적 의식, 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예측입니다. 제가 학교에 돌아가면 학장으로서 어떤 보고를 받을지, 학과장이 어떻게 행동할지, 수업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동안 축적된 경험을 통해 예측할 수 있죠. 축적된 경험이 있어서 새로운 자극이 생겨도 ‘이건 이 범위 안에 있겠다’라고 예측이 되는 겁니다.
이런 예측의 가장 밑바탕에는 자기 몸에 대한 의식, 즉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이 있습니다. 의식에는 층위가 있어서 세상에 대한 의식이 탄탄하려면 자아의식이 탄탄해야 합니다. 자아의식은 자기 몸에 대한 의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 의식이 무너지면 전체 의식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몸을 움직이는 데 제한이 있는 장애인이 자신이 온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신체 활동 경험이 정상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합니다.
호이트 부자(父子) 이야기가 있습니다. 뇌성마비로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자선 마라톤에 참가합니다. 아들이 컴퓨터로 아버지에게 “달리고 싶다”라고 자기 의사를 처음으로 밝혔다고 합니다. 움직이고 싶다는 뜻이었죠.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의 휠체어를 밀며 처음으로 8킬로미터를 뛰고 났을 때 아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정신만으로 인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예시입니다. 아무리 지식을 많이 습득해도 몸을 움직이는 경험이 없으면 인간다움을 실존적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아까 몸이 그림자라는 얘기를 했었죠. 존재하고 나서 비로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처음으로 그걸 느낀 겁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장애인에게 스포츠가 필요합니다. 몸에 대한 의식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일반인에게도 당연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몸에 대한 인간관과 의식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인간다움을 느끼는 데 지능(intelligence)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아의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의 기반은 몸입니다.
몸에 대한 자기의식은 시간 및 공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 몸이 3차원 공간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 내 팔이 어디쯤 있는지를 뇌가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 위치 정보를 통해 몸에 대한 의식이 생기고, ‘이 팔이 내 것’이라는 소유감(sense of ownership)이 형성됩니다. 팔이 저려서 감각이 없어질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 순간 팔이 마치 나무토막같이 느껴지죠.
이렇게 몸에 대한 소유감이 있을 때 비로소 ‘내가 어떤 행위의 주체다’라는 인식이 생깁니다. 이걸 행위 주체성(sense of agency)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죠. 이게 바로 자아의식의 기초입니다. 이 기반이 있어야 사회적으로 추상적인 사고도, 세상에 대한 의식도, 배운 지식을 활용하는 역량도 가능해집니다. 온전한 인간으로 작동하지 않는 개인이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로서 제 역할을 다하기 어렵다는 것은 뇌 과학적으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교육입니다. 특히 한국 교육을 돌아보면 상황이 심각합니다. 인간다움의 원리에 기반하지 않고, 표준화된 지식을 주입하는데 매몰되어 있습니다. 주입된 지식의 속도와 양을 기준으로 학생들을 변별하는 데 온 학생과 부모와 교사와 학교가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다.
저는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세 가지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힘, 감각하는 힘, 행동하는 힘입니다. 생각하는 힘은 단순히 표준화된 지식을 많이 아는 힘이 아니라 체화된 지식을 바탕으로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능력, 융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 능력,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능력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배우지만, 머리로만 ‘그래, 측은지심을 가져야지’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진짜 감각하는 힘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생각이 아니라 내 몸이 감각적으로 느끼는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되고, 느낀 것에 대해 실천하는 힘, 즉 몸이 반응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볼 때, 생각하는 힘은 정신이 반응하는 힘이고, 감각하는 힘과 행동하는 힘은 신체가 반응하는 힘입니다. 아무리 머리로 알고 있어도 몸이 반응하지 않으면 실천하지 못합니다. 많은 지식인이 아는데도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실천하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몸과 마음이 서로 소통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생각하는 힘은 정신에서 신체로 가는 방향이고, 감각하는 힘과 행동하는 힘은 신체에서 정신으로 가는 방향입니다. 감각하는 힘은 예술 교육, 대표적으로 음악과 미술로 키울 수 있고, 행동하는 힘은 스포츠로 키울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은 독서, 토론, 프로젝트로 키울 수 있습니다. 사실, 독서, 음악, 미술, 스포츠만 잘하면 온전한 인간을 키우는 첫 번째 교육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김세연: 우리 교육이 정신이 신체를 통제한다는 데카르트적 인간관에 기반하고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철학적 논쟁은 이미 끝났고 뇌 과학적 근거도 밝혀지고 있는데, 교육 체계는 여전히 심신이원론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 결과 지식을 표준화해 주입하게 되었고요.
강준호: 그렇습니다. 우리 교육은 여전히 데카르트적 인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단편적 지식, 사실적 지식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습득하느냐를 기준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있죠.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선생님들도 이게 비교육적이고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학생들을 변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성형 AI가 등장했잖아요.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식이 AI를 학습시키는 방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데이터를 집어넣고, 대답 잘하면 A 학점을 주고 못하면 B 학점을 주는 식이죠. 포클레인 앞에서 인간이 삽으로 땅을 파는 격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해서 근육을 키워도 포클레인을 이길 수는 없죠. 우리 교육은 지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적 교육, 인지 교육을 어떻게 시킬지 고민해야죠. 이제는 단순 암기가 아니라 고차원적인 사고력, 질문하는 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단답형으로 답할 수 있는 능력에서 더 나아가 문제를 출제하는 능력까지 길러야 합니다.
그렇다고 단순 암기 교육이 완전히 필요 없다는 건 아닙니다. 단편 지식과 기억을 기반으로 창의적인 생각도 나오기 때문에 기본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걸 과도하게 시키는 것이죠. 암기를 통한 기초 지식 습득은 하되, 궁극적으로는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이것이 지적 교육의 방향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감각하는 힘과 행동하는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특히 감각하는 힘은 지금 교육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이 인간관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교육 철학적 논리를 탄탄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감각을 키운다는 것은 단순히 예술을 향유하며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내 피부 바깥의 사회적, 물리적 환경에 대한 민감성(sensitivity)을 키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구 환경이 파괴되는 걸 보며 ‘저러면 안 된다’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앎과 삶 사이에 괴리가 생기죠. 감각하는 힘이 생기면, 그런 문제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문제처럼 느껴집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진정한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공감 능력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감각적 민감성(sensitivity) 덕분에 가능한 거죠. 아픈 사람을 보고 같이 아파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지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렇게 감각으로 느끼고, 책으로 깨닫고 나면, 그다음에는 행동해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행동하는 힘이고, 이 힘을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게 스포츠입니다.
스포츠 현장에서는 축구든 미식축구든 농구든, 종목에 상관없이 매 순간 환경이 계속 변화합니다. 상대방의 움직임에 내가 즉각 반응하지 않으면 게임이 진행되지도 않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이런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하는 힘, 감각하는 힘, 행동하는 힘, 세 가지를 모두 키울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 됩니다. 경기를 할 때 전략을 구상해야 하니 머리도 써야 하고, 감각적으로 상황을 인지해 반응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가장 온전하고 인간답게 만드는 데 가장 효과적인 행위를 꼽으라면 바로 스포츠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다른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아도, 독서, 운동 하나, 그리고 가능하다면 악기 한 개를 다룰 수 있으면 온전한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독서는 생각하는 힘을, 악기는 감각하는 힘을 키우고, 스포츠는 행동하는 힘을 키워주기 때문입니다.
김세연: 현재 한국 교육이 감각하는 힘과 행동하는 힘을 키우는 데에 소홀하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이 정규 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와도 단지 인적 자원으로만 기능하게 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거나, 인간다운 행복을 누리는 인간으로는 성장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강준호: 인간답게 성장해야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고, 시대가 요구하는 인적 자원의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탄탄한 기반이 필요합니다. 그 위에 교육 체계를 쌓아야 하죠. As-Is와 To-Be를 비교하며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단계별로 구체적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여러 현실을 고려할 때 교육부가 톱다운 방식으로는 혁신을 주도하기 어렵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보텀업으로, 자발적으로 시행착오를 거치며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김세연: 1차, 2차 산업 혁명 이후, 대량 생산 체제 공장에서 기계식으로 균일한 품질의 공산품이 쏟아져 나왔고, 인간 작업자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단순 반복 작업을 하며 표준에 맞추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괜찮은 수입으로 중산층이 형성되었던 것이 20세기 중반까지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을 가능하게 했던 게 바로 산업 혁명과 맞물린 독일의 국민 교육 체제였습니다. 기계 조작을 위한 기초 산수와 문자 교육이 시작되었고, 이 체제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뿌리내리면서 지금의 한국식 교육 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처럼 교육 시스템은 문명의 변화와 깊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다른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거치면서 메이커 운동과 3D 프린팅이라는 흐름이 생겼죠. 3D 프린팅은 대량 생산과 달리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작업입니다. 메이커 운동은 직업적 또는 취미나 자아실현의 방법으로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는 경향입니다. 두 가지 흐름의 공통점은 공장제 기계 공업의 패러다임을 깨는 것이죠.
강준호: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대 교육은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방식과 똑같이 이루어졌죠.
김세연: 그래서 공장 건물과 학교 건물이 비슷하게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강준호: 그렇죠. 과목별로 선생님을 분업시켜 나누고, 지식을 표준화해서 나누고. 그런 다음 아이들을 불특정 다수 집단에 집어넣죠. 거기서 표준화된 지식을 잘 받아들이면 A를 주고, 못 받아들이면 C를 줍니다. 상급 학교로 올라가며 불량품을 걸러내는 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대량 공장 생산 시스템과 같은 구조입니다. 근대의 대량 교육 시스템이죠.
하지만 이런 방식에는 인간의 고유성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귀족 집안 아이만 여러 명의 선생님이 붙는 맞춤형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량 교육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술 발전으로 개인 맞춤형 교육이 가능해졌습니다. 이걸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학습 과학’입니다. 학습 과학은 말 그대로 학생들의 학습 현상을 다학제적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전통적인 교육학이 인문학과 사회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교사 입장에서 만들어진 지식 체계라면, 학습 과학은 뇌 과학, 자연 과학, 공학, 인지 과학 등 폭넓은 시각으로 학생의 학습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교육 맥락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다학제적 융복합 학문입니다. 미래 교육으로 가는 핵심 지식을 제공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세연: 첫 질문에 모든 문제의식을 담아 포괄적으로 답변해 주셔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기존 한국 교육 시스템은 인력 자원 양성과 사회 멤버십 교육이라는 두 교육관이 충돌해 왔지만, 둘 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성찰 없이 단지 기술적 논쟁만 이어 온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자면, 인간관을 새롭게 정립하고, 획일성에서 벗어나 실존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성을 키우기 위해 교육 자원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 고민의 해법이 새로운 교육 체제와 방식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는 사고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존 시스템은 고쳐 쓰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방대해서, As-Is와 To-Be를 각각 그려서 하나하나 이행하려면 이해관계자 설득에서부터 막혀 진행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현실적으로 크고 작은 오류가 발생하면서 전체적인 결과물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아예 As-Is 없이 To-Be만으로 설계도를 그린다고 가정할 때, 그 도면에서 입체적인 구조물을 세운다면 첫 번째 층과 두 번째 층에 올라가야 할 요소가 무엇일지 질문드립니다.
강준호: 사실 아까 말씀드린 인간관 이야기는 굉장히 교육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부분입니다. 그런 개념이 현실에 구현되려면 막대한 자원이 필요할 겁니다. 장애 요인도 많을 것이고요. 그러니 전략과 전술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직은 명확한 그림이 없습니다.
다만, 여러 전문가가 팀을 이루어 프로젝트화해서 추진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념 정립은 한두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실제 구현 단계에서는 구체적인 영역별 접근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감각하는 힘을 키운다고 했을 때, 단순히 예술 교육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예술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감각을 키울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상호 작용을 통해 상대방의 느낌과 생각을 알아챌 수 있도록 감각적으로 훈련하는 모듈을 만들 수도 있겠죠.
김세연: 〈스케치 다이얼로그〉는 대담을 통해 개별 영역별로 가장 기초적인 요소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겉보기에는 멀어 보이지만 실제로 인접하거나 연결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내 미래 국가의 도면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여러 실험적 시도를 통해 기초 요소들을 연결하고 도면을 확장해 나갈 계획입니다. 오늘 말씀 주시는 밑그림 역시 다른 분야의 대담들과 연계해 전체 그림을 그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강준호: 예를 들어 창의성 교육을 보겠습니다. 창의성에 관해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지만, 정작 창의성 교육을 제대로 받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제기할 수 있어도,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의식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문제를 인식하고도 ‘그다음은 모르겠다’라며 멈추는 게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창의성의 본질은 사실 기존 지식의 조합과 편집입니다. 예를 들어 큐비즘(입체파)의 탄생을 볼까요.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작품을 감상한 적이 있습니다. 미술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작품인데, 이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시점의 다양성입니다.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여러 시점이 섞여 있죠.
피카소는 1년 동안 이 그림만 계속 모작하며 연구했습니다. 부분적으로도 따라 그려 보는 등 깊이 탐구했죠. 〈시녀들〉만 모아 놓은 방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인상파 초기 화가인 세잔 역시 사물을 평면적으로 분할해 단순화하고 다양한 시점으로 표현했죠. 세잔의 정물화를 보면 사과를 여러 시점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과일은 아예 위에서 본 모양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 평면이 분열하는 큐비즘이 탄생했습니다. 즉, 창의성이란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지식을 정확히 알고 넓은 시야로 새로운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틀 안에 가두면 시야가 넓어질 수 없습니다. 시야를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죠. 피카소의 경우를 보면 지적으로 숙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창의성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하는 힘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그림을 그려내고, 현대 미술의 흐름을 바꾸었죠.
세상을 바꾸는 힘은 학자든, 예술가든, 성직자든 결국 행동하는 힘에서 나옵니다. 이 실천력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생각도 자기 안에서 끝나버립니다. 저는 실천하는 힘은 비교적 쉽게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포츠를 통해 충분히 가능하죠. 감각하는 힘은 예술 교육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 키울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힘도 단순히 문자와 숫자로 이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체화되어야 합니다. 보편적 지식에 경험이 더해지면 체화된 지식이 됩니다. 경험은 몸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과학에서 실험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요약하자면, 미래 교육은 이성 기반 지식 교육에서 몸 기반 경험 교육으로, 교사 중심의 표준화된 대량 교육에서 학생 중심의 맞춤형 교육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교육의 세 가지 목적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김세연: 결국 각 분야의 조직적 경계가 무너져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뇌 과학은 이제 자연 과학뿐만 아니라 교육, 인문 분야에서도 다루어져야 하고요.
강준호: 맞습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면 이제는 뇌 과학이 필수가 되었습니다. 경영학이든 교육학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AI도 빠질 수 없겠죠. 앞으로는 AI라는 말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일상화될 겁니다. 이 두 가지, AI와 뇌 과학이 미래를 이끌어 갈 핵심입니다. AI는 의료, 뇌 과학, 스마트시티 등 다양한 분야에 접목되어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뇌의 패턴을 밝히는 일 같은 곳에 말이죠. 그래서 저는 대학이 당분간 AI와 뇌 과학을 집중적으로 키워야 다른 분야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말씀하신 내용 중에서 특히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즉 논의만 무성하고 실행이 없다는 현실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비판만 잘할 뿐, 실천을 위한 대안을 내지 않는 고질적인 한계를 어떻게든 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실 안에서의 어려움을 해결할 방안도 찾아야겠지만, 학교 밖의 다른 공간에서 프로젝트 형태로 시도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커다란 시도는 어려울 수 있겠지만, 연구실에서 작은 단위로 실험을 통해 검증하고 가능성을 확인한 뒤 점차 확대해 나가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강준호: 결국 이 문제는 입시로 연결됩니다. 중고등학교 교육을 아무리 바꿔도, 골대가 그대로라면 학생들은 결국 그 방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고등 교육과 초·중등 교육이 완전히 엇박자를 내는 구조입니다. 초·중등 교육을 혁신해도 골대가 바뀌지 않으니 학생들은 사교육으로 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육을 바꾸려면 입시 제도도 함께 바꿔야 합니다. 하지만 입시는 한국 사회의 블랙홀이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 없이 잘못 건드리면 큰 혼란이 발생합니다. 검증된 증거를 기반으로 새로운 대안을 준비해야 합니다. 입시는 절대 가볍게 고쳐서는 안 됩니다.
김세연: 축구장에 골대가 두 개만 있는 게 아니라, 스무 개쯤 있으면 어떨까요?
강준호: 지향점을 이야기하시는 것이군요. 지금은 수능과 내신 중심의 변별력 위주 시스템 속에서, 학생들이 인간다움을 포기하면서까지 어렵게 꼬아 놓은 문제를 푸는 데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SAT 만점을 받아도 하버드대학교에서 ‘너는 우리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라며 불합격시키는 일도 있죠. 우리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마다 고유한 교육 철학과 인재상을 가지고 단순히 점수만으로 학생을 판단하지 않는 시스템이 있어야, 점수만 좋은 학생은 받지 않겠다는 결정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우리는 지적 역량만을 평가하는 숫자 이외의 영역을 평가할 방법을 모르고, 해본 적도 없으며, 무엇보다 용기가 부족합니다.
김세연: 서열화된 질서 안에서 이미 상위권에 자리 잡은 대학들이 자발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유인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 유인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강준호: 저는 그 역할을 서울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시의 정점에 있는 만큼 서울대가 지향하는 인재상을 분명히 제시하고, 그에 부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지적 역량을 가진 학생이라도 선발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탄탄한 근거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준이 모호하다 보니, ‘왜 이 학생은 떨어뜨리고 저 학생은 합격시켰냐, 불공정하다’라는 주장에 자신 있게 반박할 수 없죠. 지금은 점수로만 학생에게 레이블을 붙이고, 공장에서 물건을 선별하듯 상위권만 받아들이는 구조입니다. 획일적으로 계량화된 점수로 아이들에게 레이블을 붙여서 서열화를 하니, 키가 160센티미터인 사람은 떨어트리고 165센티미터인 사람은 뽑는 식이 됩니다.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자는 뜻은 아니지만, 상품에 비유하자면 어떤 경우는 디자인이 뛰어난 상품이, 어떤 경우는 내구성이 좋은 상품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이 고유한 인재상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은 실천적 리더십을 가진 인재를 키우겠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리더십은 남들보다 앞서 도전하고, 전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용기와 비전이 필요합니다. 지적 역량만으로는 리더십이 생길 수 없습니다. 지적 역량은 그저 하나의 작은 요소일 뿐입니다. 리더에게 중요한 것은 가치와 철학입니다. 이게 분명해야 구체적인 방향도 쉽게 설정할 수 있고, 어려움이 닥쳐도 돌파할 수 있습니다. 개인도, 조직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인재를 키워야 결국 사회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수능 문제 한두 개에 모든 것을 걸고, 나머지를 다 희생하는 구조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과연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까요? 물론 입시 이후에 성장할 수도 있겠지만, 뇌는 20세 이전이 가장 가속성이 높은 시기입니다. 그 시기에 대부분의 사고방식과 태도가 형성됩니다.
김세연: 많은 학생이 그 시기를 시험 준비 기계처럼 보내고 있습니다.
강준호: 인간다운 성장을 희생당하거나 포기한 셈이죠.
김세연: 사회적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열되고 왜곡된 입시 경쟁은 동료를 경쟁의 대상으로만 인식하게 합니다.
강준호: 그렇죠. 결국 같이 협력하고 살아갈 대상이 아니라 누르고 이겨야 할 대상으로만 보게 되겠죠. 남을 이기는 경쟁 교육이 아니라 학생이 성장하는 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김세연: 사회적 관계에 대한 자각이나 실천의 기회를 거의 박탈당한 상태에서 암기에 치중해 시험만 보고 리더가 된다면 그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겠죠.
강준호: 인생은 결국 경쟁과 협력의 이중주입니다. 경쟁이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습니다. 자연 생태계도 자연 선택을 통한 경쟁이고, 자본주의도 경쟁을 기반으로 돌아가니까요. 경쟁에 대한 면역이 아예 없는 학생으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학생들을 경쟁만 아는 존재로 키우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경쟁과 협력을 모두 경험하고, 그 균형을 스스로 맞출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그 해답이 스포츠에 있다고 봅니다. 스포츠는 팀 내 협력과 동시에 상대와의 경쟁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합니다. 또한 자기 발전을 위해 계속 도전하게 되죠.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긍정적인 정신과 스포츠 정신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또한 스포츠를 통해 인간은 인간다움을 발현하게 되죠. 몸을 통해서 말입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리더를 키우는 명문 보딩스쿨에 가보면 스포츠 시설이 어마어마합니다. 분명한 교육 철학에 기반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죠. 국가대표 훈련장도 아니고, 고등학교에 스포츠 시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들은 스포츠를 단순한 한 영역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핵심적인 교육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투자가 가능한 겁니다.
김세연: 반면에 우리는 체육 시간에 자습을 시키곤 하죠.
강준호: 그렇습니다. 부모들이 체육 시간에 자습시켜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고요. 길게 보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선택인데 말이죠.
김세연: 입시에 대한 인식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지금은 변화를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들 역시 과거 방식의 교육 시스템을 거쳐 나온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인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인데, 변화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누군가는 전인 교육에 집중하는 사이에 오히려 입시에만 전념한 아이들이 기존 잣대에서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불일치로 변화의 흐름이 또다시 가로막히지는 않을지 우려됩니다.
강준호: 초중고 교육 안에 세부적인 사항도 있고 입시도 있지요. 하지만 더 크게 보면 교육, 노동, 복지가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그래서 교육 정책만으로는 교육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김세연: 노동과 복지, 그리고 다른 분야의 밑그림을 그릴 때 교육은 거의 모든 분야와 접점이 있습니다. 뇌 과학이 교육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 연결되듯 말입니다. 〈스케치 다이얼로그〉의 밑그림이 어느 정도 축적되면 다시 한 번 모시고 말씀 듣고 싶습니다. 학장님께서 교육 현장에서 고민하고 구현하고 있으신 것들이 사회적으로 더 확산할 수 있도록 저도 의견 드리면서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강준호: 〈스케치 다이얼로그〉라는 뜻깊은 프로젝트에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