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연: 오늘은 한국인공지능법학회 회장과 개인정보전문가협회 회장을 맡고 계신 최경진 가천대학교 법학과 교수님을 모시고 대담하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세계 최초로 데이터를 동산의 유형에 추가하자는 취지의 데이터 민법 발의를 제안해 주셨고, 국회에서 법안을 발의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또한 개인정보 보호와 활용의 균형을 위해 정부가 새로운 입법 체계를 마련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 우리나라 개인정보 분야 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힘쓰고 계십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공지능 관련 법제를 갖추는 데에도 선도적으로 노력하고 계십니다. 최근 《인공지능법》이라는 저서도 발간하셨습니다.
오늘 논의할 주제를 먼저 짚어 보겠습니다. 첫째, 민법의 현대화입니다. 오래된 법체계 속에서 데이터 거래라는 새로운 형태를 충실히 보장하고, 그에 필요한 법적 인프라를 갖추려는 작업입니다. 개인정보나 AI 같은 기술과 행정, 법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시의적절한 해법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둘째로는, 한국의 행정 체계가 지금처럼 운영돼도 괜찮은지 짚어 보겠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면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하면 좋을지 큰 틀에서 말씀 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법학 교수로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사법 제도를 지켜보셨는데요, 사법 제도를 백지상태에서 다시 설계한다면 어떠한 창의적 접근이 가능할지도 여쭤보겠습니다.
우선, 오래된 법과 첨단 기술이 만나는 영역에서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를 듣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현행 법체계에서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을 개정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기존 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고쳐서 쓰더라도, 만약 기존 법이 없어 새로 설계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최경진: 먼저 이렇게 뜻깊은 대담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데이터 민법은 의원님께서 발의하셨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계 최초로 데이터 민법이 레거시로 남았다는 점에서, 저는 이 법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법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생각해 보면, 현재는 그 둘을 잇는 가교입니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어떤 법을 만들고 유지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법의 여러 역할 중 하나는 역사의 안정적인 발전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법을 백지상태에서 새로 설계하는 것은 국가가 완전히 단절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은 과거의 유산을 가져와 재창조하는 경우가 많고,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재창조가 필요한 영역이 있죠. 특히 데이터 영역이 그런 것 같습니다.
민법에는 수천 개의 조문이 있지만,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원칙적으로 활용되는 조문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사람들이 직접 만나거나, 글을 쓰거나, 구두로 의사를 교환하면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디지털 방식으로 계약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민법에서 여전히 오프라인을 원칙으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민법 체계는 2000년 넘게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관련 조문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예를 들면 보증채무에서 전자문서를 쓰게 할지 말지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은 변화했죠. 특히 코로나19 이후에는 오프라인이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 같습니다. 삶 자체가 이미 디지털이라는 인식이 큽니다.
국가가 새롭게 형성될 때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법은 형법이나 헌법이 아니라 민법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하니까요. 그런데 민법의 기본적인 틀이 과거에 맞춰져 있다면 사고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 사회에 완전히 새로운 국가를 만든다고 가정하면, 그 국가는 기술 기반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렇다면 달라진 기반에 맞춰 민법을 비롯한 모든 법을 새롭게 세팅해야 합니다.
현재는 오프라인 기반으로 원칙이 수립돼 있고, 특별법으로 보충하거나 일부를 바꾸는 식으로 예외를 만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예외’가 이미 ‘원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법과 미래의 법 사이를 잇는 가교자입니다. 운 좋게 법을 완전히 새롭게 뜯어고칠 수 있다면, 사실상 원칙으로 활용되고 있는 예외를 원칙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민법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분야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과 현실의 괴리가 커지기 때문에 이를 줄여 주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김세연: 1987년 개헌 당시, 시대 변화를 충분히 예측하지 못하고 당시의 인식 수준에서 너무 급하게 개정안 초안이 합의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때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사안들이 지금에 와서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적지 않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양극화도 그렇고,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이나 사회·경제적 격차의 심화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최근 10여 년간 헌법 개정안 초안을 만들었던 것이 제가 알기로는 시민 사회 라운드테이블에서 한 번, 국회의장 주도로 두 번, 총 세 번 정도 됩니다. 국가 최고 규범이자 거버넌스의 초석이 되는 법이기에 그만큼 많은 관심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말씀을 듣고 보니, 헌법 손대기도 만만찮은데, 민법은 누구도 손댈 엄두를 못 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행 민법에 담지 못한 현실의 변화들은 대부분 특별법을 통해 예외적으로 처리해 왔습니다. 사실 지금의 헌정 질서와 법체계 속에서는 민법에 손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약 새로운 계기가 생겨서 이 문제를 한번 정리해야 한다면 아주 간결하고 체계적이며 효율적인 새로운 민법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된다면 단지 개인 간의 계약 관계를 정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법상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한 사법 체계와 절차, 나아가 행정법과의 관계 같은 공공 영역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차원에서 법질서가 구현될 수 있겠다는 기대와 희망이 생깁니다.
최경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왔습니다. 막상 준비를 시작하면 과제들이 많을 겁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애써 외면했던 것이 현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칙인 법을 바꾸려면 고민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으니까, 그냥 예외를 하나 만들어서 처리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비겁한 변명을 하자면, 2000년 넘게 이어 온 법질서와 법 문화의 큰 줄기를 바꿀만큼 국민 의식이나 사회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원칙에 관해 고민할 때가 됐습니다. 2000년 동안 묵혀 온 원칙을 언제까지 가져갈 수 있을까요? 그 숙제를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물론 단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지금 시작해도 늦었습니다. 그래도 10년이나 20년 안에는 끝낼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법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민법은 인간 사회의 복잡한 관계를 다루는 법입니다. 그래서 더욱 진지하게, 세심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칙을 다시 세워 가는 과정에서 지금처럼 난립한 여러 특별법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속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디지털 유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국내 논의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국회 회기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관련 논의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큰 사고가 발생해 사망자가 발생할 때마다 문제가 제기됐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디지털 유산 문제를 과감하게 풀어야 할 때입니다. 민법 안으로 이 문제를 끌고 와야 합니다. 예를 들어 피상속인, 즉 유산을 남기는 사람이 생전에 유산에 대한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제도를 특별법이 아니라 민법에서 원칙으로 도입해야 합니다.
이게 원칙이 되면 비디지털 형태의 유산에도 동일한 선택지를 줄 수 있습니다. 현재 그 선택지는 유언이라는 형식뿐인데, 유언은 정해진 양식과 공증 절차를 따라야 해서 접근성이 떨어집니다. 부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하지만 21세기에는 유언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면 훨씬 간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생전 선택권을 통해 상속인이 아닌 제삼자에게도 디지털 유산이 승계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하고요.
지금 헌법을 보면 디지털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AI, 통신, 스마트폰 등 모든 것이 디지털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변화 방향입니다. 디지털화된 세상을 법의 기본 구조, 즉 원칙 안에 반영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이 바로 그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저희는 지금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국가의 설계도를 그린다면 과연 지금의 모습과 어떻게 달라질지를 두고 일종의 사고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민법 제정은 헌법 제정만큼이나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되겠죠.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심도 있는 토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그런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민법의 전면 개정이 이루어진다면 지금보다 훨씬 간결하고 효율적인 법체계를 갖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공동체 안의 시민들도 훨씬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듭니다. 만약 민법 전면 개정안을 논의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요?
최경진: 민법은 국민을 위한 법이어야 합니다. 민법은 태동부터 신분의 벽을 뛰어넘고, 국가 간의 장벽도 고려하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민법이 제대로 만들어지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 변화된 시대 환경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특히 디지털 환경을 고려해야 하겠죠. 둘째, 세계적으로도 영향을 미치고 통용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법의 핵심 대상은 국민이라기보다 인류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 국민을 위한 민법이 아니라 글로벌 시민을 위한 민법을 만든다는 시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미국에 비해 작은 나라지만 여전히 강대국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배경 중 하나가 영국이 제도적 플랫폼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물적 자본이나 인프라가 아니라 제도를 만들어 전 세계에 퍼뜨린 결과, 힘을 얻고 있는 것이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땅덩어리에 인구와 자원도 적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똑똑하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글로벌 제도 허브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한 번에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성공 경험을 계속 쌓아야 하고, 그중 하나가 전 세계 누구라도 가져다 쓸 수 있는 민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민법이 세계 어디서나 준거법으로 활용된다면, 자연스럽게 관련 소송과 분쟁도 한국에서 해결하게 될 것이고, 한국이 국제 분쟁 해결의 중심지로 떠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법을 전면 개정하게 된다면, 디지털 환경과 글로벌 환경을 동시에 고려해서 전 세계 사법 체계의 준거가 될 수 있는 법률로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선 문을 닫아걸고 국내 의견만 들을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규범을 폭넓게 검토하고 여러 나라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합니다. 실무적으로는 각 분야에서 정밀한 검토를 이어 가면서, 동시에 분야별 지식을 계속 축적해야 합니다. 그렇게 축적된 지식이 연결되고 통합된다면, 한국 민법은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민법이 아니라 지구의 민법, 즉 인류 보편의 법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됩니다.
모든 나라가 우리 민법을 채택하지는 않더라도 주요 국가들이 대한민국 민법을 ‘가장 최신이다.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법이다’라고 인식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법 제도의 수출이 가능해집니다. 그렇게 법이 수출되면 우리 국민과 기업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가 생깁니다. 우리 법이 적용되는 국가에 우리 국민이나 기업이 진출했을 때, 민법상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 기준대로 대응할 수 있으니 세계에 진출하기가 훨씬 편해집니다.
따라서 민법을 단순히 국내 법률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글로벌 차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5년, 10년의 긴 호흡을 가지고 국민과 국내 전문가, 정부와 국회는 물론 외국 전문가, 외국 기업들과도 소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씩 설득하고 논의를 이어 가다 보면, 결국 대한민국 민법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하며 노력한 법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확산할 겁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바이럴 마케팅이 되고, 민법 수출로도 이어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민법을 전공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허황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높은 수준의 목표와 비전을 갖고 접근해야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김세연: 현재 세계 각국의 민법은 2000년 전의 로마법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죠. 여기에 더해 한 시대를 풍미한 제국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적 인프라도 민법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이 해상 무역으로 세계를 제패하던 시절에 구축한 보험이나 중재 제도 같은 것들입니다. 미국 역시 2차 세계 대전 이후 규칙에 기반한 세계 질서를 만들어 오면서 — 지금은 그 체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만 —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적 인프라를 다수 구축해 놨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연결성, 그리고 영어라는 언어적 인프라 역시 이들이 영향력을 지속하는 데 큰 역할을 했죠.
이런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 독특한 위치를 구축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흔히들 한국을 ‘UN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지위가 바뀐 유일한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신생 독립국 중에서 이런 전환을 이룬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이제는 개발 도상국에서 선진국 지위로 올라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한 지금 당장은 자랑거리라 할 수는 없지만, 한국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독보적인 면이 있습니다. 역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출생률 저하인데요, 기존 패러다임에서는 AI나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하는 상황이 온다면, 개인에게 상당히 불행한 일이 될 것으로 봤습니다. 인간은 일자리를 잃고, 결혼과 출산의 여지가 닫히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바이오 기술의 발전 속도를 고려할 때 체세포 복제나 인공 태반의 보급 등 다른 형태의 재생산 방식을 택하게 되는 것이 21세기 안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시험관 아기도 처음 등장했을 때는 생명 윤리상 아주 큰 논쟁거리였지만, 더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인구 구조의 변화는 현상 유지적인 관점을 빠르게 바꿀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기존 사회 질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거죠. 줄어드는 인구가 국가의 부양 부담을 줄여 줘서 다음 시대를 훨씬 잘 대비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예전에 ‘Agenda 2050’에서 도발적인 의제로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만, 기계가 인간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에는 경제 활동의 주체로서 기계에 법인격이 부여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 권리 외에도 정치적 권리, 나아가 기본권까지 부여돼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질 개연성이 있습니다.
다시 민법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민법의 당사자는 국가 단위를 넘어서야 하고, 시대의 보편화된 기술과 경제 환경을 반영해야 합니다. 민법은 사인 간의 계약이고, 사인 간의 계약은 경제 활동 중에 발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 기술 여건이 바뀐 상황에서, 계약 당사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또는 인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즉, 경제 주체로서 법인격을 갖게 된 기계 같은 비인간적 존재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정의 안으로 편입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새로운 민법 체계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버나 테슬라가 운영하는 자율주행 택시가 법인격을 가지고 납세의 주체가 되는 식입니다. 이들을 예외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민법의 원칙 안에 이들을 들어오게 할 수 있는지 논의해 보자는 것이죠.
더 나아가 인류가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할 때까지를 염두에 두고 법체계를 설계한다면, 우리 민법이 지구를 넘어 다른 행성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겁니다. 100년, 200년 단위로 보자면 다른 태양계로 진출하는 경우까지 여지를 열어 놓고, 예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을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최경진: 굉장히 먼 미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의외로 이런 변화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올 수도 있고 반대로 늦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저는 민법상 주체를 확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필요성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꼭 엄청나게 고도화된 AI가 아니더라도, 말씀하신 것처럼 독립적인 경제 주체로 활동하고 있고, 일정한 권리와 의무, 책임을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민법상 주체로 인정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법인입니다. 예를 들어 로봇 택시 회사라면 여러 대의 로봇 택시들끼리 묶여서 운영되는데, 이를 특수목적법인(SPC) 형태로 만들 수 있겠죠.
운영 자체를 아예 AI가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특수한 법인을 ‘AI 법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독립된 형태로 설계할 수도 있을 겁니다. 꼭 사람과 똑같은 형태의 법인격을 부여하느냐의 문제로 접근할 필요는 없죠. 조금 더 개방적으로 접근하면 됩니다. 민법상 법인격이라고 해서 권리 의무 주체의 내용이 반드시 사람과 같거나 비슷한 수준일 필요는 없거든요. 제한된 범위 안에서 목적에 맞게 법인격을 부여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AI나 로봇에 법인격을 부여하게 된다면,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사람 때문입니다. 특히 경제 활동이나 책임이 발생하는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손해가 발생했을 때 지금처럼 별도의 보상 펀드를 만들어 대응하는 방식 대신, 법인이 수익을 창출하고, 손해 배상 책임도 수익을 기반으로 처리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그 법인에 투자할 수 있겠죠.
이처럼 혁신적인 법적 구조를 상상해 보는 일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봅니다. 물론 지금은 조금 먼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더 먼 미래에는 AI가 자의식까지 가지게 되면서 또 다른 차원의 주체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개념에 집착한 논의를 하게 되면 법인격은 사람과 같은 수준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과거의 개념에 얽매이지 말고 유연한 틀 안에서 법인격을 재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물에게 법인격을 부여한 나라도 있습니다. 독일이 대표적인 사례죠. 우리가 해산물로 즐기는 게를 애완동물도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는 거죠. 그렇다면 왜 동물을 보호할까요? 결국 인간성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예를 들어 AI가 탑재된 반려 로봇이나 간병 로봇이 있는 집에서, 그 로봇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고 가정해 보죠. 로봇은 반응이 없겠죠. 먼 미래에 로봇이 자의식을 가지게 된다면 로봇 자체의 존엄성 때문에 법인격을 부여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논의할 단계는 아닙니다. 현재 수준에서 반려 로봇을 보호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결국 로봇을 학대함으로써 내 인간성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개를 학대하면 내 인간성이 망가지고, 인형의 눈을 도려내는 행위를 반복하면 결국 그 폭력성이 내면화됩니다. 인간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성을 갉아먹게 되는 것이죠.
결국 중심은 ‘사람’입니다. 사람의 인간성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의 법인격 논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과거의 논리 구조에만 빠져서 법인격은 반드시 사람과 같아야 한다는 생각에 머무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김세연: 오늘날과 같은 법인의 개념은 로마 시대 민법에는 없었고 근대로 들어오며 만들어졌습니다. 현재의 법체계에서는 이미 상법에서 자연인이 아닌 법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계와 같은 존재에도 법인격을 부여하는 것이 현행 법체계 내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양한 사례와 양상이 나타날 수 있을 텐데, 이런 변화를 면밀하게 지켜보고 법의 원칙에 편입시키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최경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법 제도나 법체계를 연구할 때, 법을 완성된 최종의 결과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법조문의 문언에 스스로 갇혀버립니다.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 법이 만들어진 이유와 목적입니다.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을 때는 법의 본래 이유와 목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새로운 법의 틀을 만들거나, 추가적인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엄중한 법 규범이라고 해서 굳이 기존의 틀을 유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한번 법이 만들어지면, 우리가 그 법을 만들었던 이유나 배경, 목적, 환경 등은 잊어버리고 그 틀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특히 법 문언에 갇혀 법이라는 틀을 유지하려다 보니 법학이나 법 실무도 경직됩니다. 본래 목적을 현실에 맞게 구현하고 발전시키거나 현재의 상황과 맞지 않는 법의 틀을 혁신하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덜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기술 발전의 속도가 빠른 시대에 더 두드러진다고 봅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기존의 법 틀을 과감하게 뜯어고칠 생각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된 현실에 맞는 법이 만들어집니다. 법은 제정되는 순간부터 이미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살아 있는 민법을 위한 관견〉이라는 논문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논문에서 저는 이미 죽은 기존 법을 생명 유지 장치를 붙여서 연명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법 개정 논의란 단지 법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살아 있게 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법률가와 법의 역할이어야 합니다.
김세연: 아주 비슷한 고민이 종교 분야에서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전이 최초로 쓰인 시대의 사회적 맥락이 문장 속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어서, 이 텍스트에 갇혀 버리면 교조주의, 원리주의, 근본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법도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앞서 반려 로봇이나 간병 로봇에 법인격을 부여하는 가능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비인간 존재에 가해지는 폭력이 인간성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한 법적 조치라는 말씀도 주셨고요.
동물보호법은 동물을 가축, 실험동물, 반려동물이라는 세 범주로 분류합니다. 반려동물을 학대한 사람이 이후 살인범이 될 가능성에 관한 연구도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지구의 지배종으로서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학대하는 행위는 자신의 인격을 훼손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런 행위를 막는 것은 인간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만약 미래에 우리보다 더 우월한 종이 등장했을 때, 열위에 있는 종에 대한 보호 장치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동물 학대에 대해 처벌을 하는 것은 우리가 지배종이 아닐 때 스스로 보호하는 장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최경진: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다만 전제되어야 할 것은 종 사이의 우열 관계가 바뀌었을 때도 그 제도가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견은 존재하지만, AI가 계속 발전하면 결국 자의식을 갖게 될 수 있다고 보는 학자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종의 우열 문제를 떠나서라도 자율적 존재로서 보호 장치가 필요해질 것입니다.
지금은 인간성 보존이라는 목적에서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미래에는 각 존재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보호 장치가 필요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열위에 있는 종이 보호받기 위해 주장할 수 있는 항변 사유로서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겠죠.
김세연: 사실 이 내용은 엄밀히 말하면 민법보다는 형법에 더 가까운 주제여서, 논의의 범주에서 다소 벗어난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민법의 전면 개정이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결국 인간을 위한 법이라는 점에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다시 글로벌 민법, 세계 민법이라는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대한민국이나 다른 국가가 보편성을 담보한 새로운 민법 체계를 도입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로마, 영국, 미국처럼 제국은 아닙니다만, 이미 한국의 행정, 국회, 법원 등의 전산 시스템이 지난 10~15년간 여러 국가로 수출된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떠올려 보면 제도적 수출의 가능성은 결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저출산 구조에 진입한 국가입니다. 이로 인해 기계와의 공존이 불가피한 경제 구조로 전환될 가능성이 커졌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인류 문명사에서 전례 없는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선구자의 위치에 서게 될 수 있습니다. 개척자로서의 편익도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이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최경진: 말씀하신 전제에 동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가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존재론적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많지만, 저는 그 위기가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와 비교하면 분명히 위기이지만, 조선 시대와 비교하면 위기라 보기 어렵습니다. 인류의 적정 인구는 누가 결정하는지, 또 대한민국의 적정 인구는 어떤 국가 운영 모델을 상정하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의 국토에서 2000만 명대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면, 오히려 더 윤택한 생활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제는 전쟁이나 외세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수단이 과거와 달리 인구수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존재론적 위기를 경시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멸절 위기로까지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이 시기를 국가 구조의 대전환기로 인식하고 있고, 그 관점에서 국가의 대개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중심에는 AI를 포함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있습니다.
한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존재론적 위기 상황에 대한 영향력이 더 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기회로 삼아, 소수의 인구로도 최첨단 기술을 활용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고효율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기술 친화적이고 수용 속도도 빠른데, 이런 강점을 살려야 합니다.
기술을 신속하게 수용하고, 노동력 감소에 대비해 AI와 기계의 도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전환한다면, 오히려 인간다운 삶을 더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빈곤층 감소, 주거 문제 해소 같은 순기능도 뒤따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효율적으로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국가로 전환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고령화 사회에서도 기계와 로봇의 도움을 받아 문제에 신속히 대응하고, 그 경험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면 궁극적으로 경제적 이익과 복지 향상으로 연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를 AI 트랜스포메이션 익스피리언스(AI Transformation Experience, AX)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경험이 쌓이면 결국 그것이 국가의 경쟁력이 되고 글로벌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법 제도 역시 우리가 앞서 사고 실험에서 논의한 것처럼 혁신적인 실험이 필요합니다. 지난주 국회에서 열린 AI 현안 공청회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현재 정부나 정치권은 주로 예산을 투입해 GPU 같은 하드웨어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AI 1등 국가’, ‘글로벌 빅3’ 같은 목표도 좋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얘기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AI 시대에 걸맞은 초(超)혁신입니다.
초혁신을 통해 국가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결과적으로 AI 1등 국가, 디지털 선도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혁신 없이 결과만 추구하는 것은 마치 병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표면적인 증상만 치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의 뿌리를 해결해야 합니다. AI 분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초혁신입니다.
우리는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고, 저출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AI와 기술이라는 수단이 있어서 과감한 실험을 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은 빨리 받아들이는 강점이 있으니까요. 미국이 자율주행차를 네바다주에서 선제적으로 실험한 것처럼, 우리도 현실에서 과감한 실험을 해야 합니다. 물론 사고나 피해가 발생할 수 있겠지만, 보험 제도 등으로 보완하고, 신속하게 원인을 분석해 개선하는 피드백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사회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고, 국민의 관용과 열린 사고도 필수적입니다.
법 역시 실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법을 테스트한다’는 개념이 다소 급진적으로 들릴 수는 있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법을 실제로 적용해 볼 수 있는 법 실증 특구를 만들어 볼 수 있겠죠. 지금은 주로 기술 개발이나 혁신 산업에 특구를 설정하지만, 법을 실증하기 위한 목적의 특구를 만들어 보는 겁니다. 법 제도를 테스트해 보고, 이를 통해 제도의 부작용을 빠르게 흡수하고, 국가의 회복 탄력성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세연: AI 3대 강국이라는 것은 결국 AI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에 이어 한국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자리 잡겠다는 목표입니다. 목표 실현에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지와 함께, 목표와 수단이 혼동될 수 있다는 우려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결국 법이든 기술이든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를 다시 강조하셨고, 현재 정책 목표에 대한 평가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자동차나 제품, 서비스도 현실에서 충분한 테스트를 하지 않고 출시하면 다양한 리스크가 발생하듯,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이 그 자체로 신성시되거나 절대로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보다는,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테스트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리빙 랩(living lab)’ 개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책이든 서비스든 실제 시민의 삶이 이루어지는 생활 공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실험하고 검증하는 것이죠. 법 역시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도구 중 하나로 인식한다면, 이런 접근도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관점이겠죠.
최경진: 예전에 의원님께서 데이터 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셨을 때, 제 주변의 많은 분이 “이건 너무 앞서 나갔다”,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관련 논의가 꾸준히 이어졌고, 결국 법무부에서도 의원님 안보다는 다소 완화된 형태이긴 하지만 자체적인 개정안을 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이들이 결국 변화의 흐름을 따라간 셈입니다.
결국 시대를 앞서가는 분들이 꾸준히 도전하고, 그 도전을 실제로 테스트하며 혁신을 만들어 가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실험과 혁신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설사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시도해 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 전반에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강해졌습니다. 특히 법과 제도 영역에서는 그 경향이 더욱 뚜렷합니다. 기존 제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제도를 제안하면, 위험성을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질문이 바로 따라옵니다. 책임질 수 없다면 개선 시도조차 하지 말라는 식으로 논의가 흐르고, 결국 새로운 시도는 공격과 책임 추궁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직접 시도하지 않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도전할 때 이를 포용하고 지켜보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혁신과 도전은 기술이나 제품뿐 아니라 법과 제도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하며, 우리 사회가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최근 몇 년간 탄핵, 직권 남용 같은 정치적 이슈로 인해 공공 부문뿐 아니라 민간 부문까지 책임 추궁 문화가 빠르게 확산했습니다. 기존 틀에서 벗어난 시도는 곧바로 책임을 묻는 분위기가 팽배해졌고요. 이런 분위기를 함께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논의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네요. 앞서 변화된 기술 및 경제 환경을 반영한 민법을 어떻게 만들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연스럽게 행정 체계의 경직성 문제로 넘어왔습니다. 현재 우리는 기존 체계에 안주한 나머지, 새로운 시도 자체를 위험한 일로 인식하는 분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정체되고 있는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앞서 법의 해석, 경전의 해석에서 짚은 바와 마찬가지로, 감사원의 감사는 법이나 시행령, 규칙의 본래 취지와 배경보다는 조문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 국가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무원의 재량권이 극도로 위축되죠. 감사에서 지적이나 징계를 받으면 공직자 개인에게는 승진과 인사에서 심각한 불이익이 따르기 때문에, 누구도 위험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행정 전반에 진취성을 제거하고, 소위 복지부동하는 문화를 고착화하는 근본 원인이 됩니다. 감사원이 보여 주는 지나치게 좁은 규정 해석뿐 아니라, 각 부처 감사실의 해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국가 형성 초기의 진취적이고 실험적인 행정 정신을 저해해 온 주된 요인이기도 하죠.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접근 방식을 행정 전반에 확대하고, 그것이 지속 가능하도록 유지할 방안은 무엇일까요?
최경진: 감사 기능은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하겠죠. 다만, 감사 기능이 너무 강화되어 오히려 다양한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제 경험을 예로 들자면, 학교에서 정부 자금을 매칭 펀드 개념 기반으로 일부 지원받아 국제 학술 행사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행사 규모가 크지 않았고 비용 상당 부분을 자체 조달했지만, 감사에서 받은 첫 질문은 ‘국제 학술 행사 개최 지원을 받는 주최 기관이 비영리 기관이어야 했는데, 학교가 비영리 기관이라는 사실을 소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학교가 비영리 기관이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었고, 교육 및 학술 활동은 대표적인 비영리 활동인데도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상식적 판단이 허용되지 않으면 결국 모든 활동이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 준 사례였죠.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곳에도 나름의 조직 논리가 있을 겁니다. 조직을 유지하려면 성과를 내야 할 것이고요. 성과를 평가하는 체계 자체도 문제지만, 해당 조직이 정말 다른 곳을 제대로 감사할 수 있는 전문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은 정부가 민간을 규제하거나 진흥하는 역할을 하는데, 과거 왕권이 무너진 직후처럼 일종의 경찰국가적 통제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복지의 역할이 커지고, 한편으로는 기술 발전을 통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인구도 감소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거대한 규모의 정부 조직이 여전히 필요한지 의문입니다. 저는 지난 10년, 20년, 30년 전에 비해 국가 조직이 비대해졌다고 느낍니다. 정부가 제 역할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사람 수가 아니라, 기능과 예산입니다. 단순 업무는 기계에 맡기고, 인간적이고 세심한 접근이 필요한 분야에 더 많은 인력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단편적 지식이나 단순 기능이 필요한 분야일수록 오히려 사람은 덜 필요합니다. 따라서 정부 구조를 빠르게 재편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꼭 필요한 영역에 인력을 재배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인구가 줄어든다고 해서 아동 돌봄이나 초중등 교육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분야에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 반에 학생 수를 30명이 아니라 15명으로 줄여 교육의 질을 높이고, 고령자를 등하굣길 안전 관리 등 사회적 안전·배려 영역에 재배치하면 좋겠습니다.
정부의 정책 결정에서 상당 부분은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순 반복 업무는 AI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인간은 판단력과 공감이 필요한 영역에 집중하는 구조로 재편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러한 재구조화와 인력 재배치는 지금 당장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번 정부뿐만 아니라 향후 두세 번의 정부에 걸쳐 공공 부문의 구조 개편은 핵심 어젠다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에서 배울 점도 있습니다. 때로는 무모하고 비도덕적이고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정부효율부(Department of Government Efficiency·DOGE)를 만든 것 자체는 혜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처럼 가장 앞서가는 나라에서도 변화에 대한 저항이 존재하지만, 대안이 없을 때 저항이 더욱 거세지는 것이지, 대안을 함께 고민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결국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일정한 충격과 반발은 불가피하겠지만요.
AI로 인한 변화는 더 이상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체감하는 현실입니다. 차기 정부가 언제 출범하든 간에, AI 정책은 매우 중요한 의제가 될 것입니다. 최근 AI 전담 부처 신설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AI부’ 신설 자체에는 회의적입니다. 예전에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던 시기에는 특정 부처가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이 의미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부처가 AI를 다루어야 하는 시대니까요.
그러나 ‘AI 혁신부’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AI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AI를 기반으로 한 초혁신을 주도하는 부처라면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각 부처를 자극하는 ‘메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니까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혁신이 아니라 초혁신입니다. 다른 국가보다 앞서나가기 위해서는 행정 구조와 절차 자체를 과감히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법령과 규칙 역시 함께 바뀌어야 하고요.
결국 인력 감축과 재배치는 피할 수 없습니다. 9급에서 1급까지 층층이 보고하고 검토하는 기존의 체계 역시 비효율적입니다. 의사 결정 단계를 한두 단계로 줄이고, 행정의 민첩성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천지개벽 수준의 구조 개편이어야 합니다. 절차, 규칙, 인력 재배치까지 모두 포함한 전면적 혁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매우 공감합니다. 과거 이명박 정부에서 정부 효율화를 목표로 대부처주의를 추진하면서 일부 부처가 통합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당시 해양수산부와 국토부가 합쳐져 국토해양부가 되었죠. 보건복지부는 여성가족부에서 가족과 보육 업무, 국무총리실 산하 국가청소년위원회 등을 이관받으면서 명칭이 보건복지가족부로 바뀌었고요.
행정안전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는 안전행정부로 바뀌었다가 다시 행정안전부로 돌아오면서 조직이 더 비대해졌습니다. 근본적인 구조 개혁은 기존의 패러다임과 사고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현재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개혁을 시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기존 패러다임은 자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붕괴할 가능성이 큽니다.
새로운 국가 설계도를 그릴 때, 과거 방식으로 거버넌스를 운영하고 집행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설계를 맡기면 같은 결과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들이 개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새로운 설계도를 그려야 합니다. 기존 체계를 조금씩 수정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트럼프와 머스크의 정책적 시도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DOGE를 통한 정부 개혁 시도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들도 절감하고 있겠죠.
최경진: DOGE는 현재 노동법 이슈 등으로 인해 법원에서 제동이 걸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러한 개혁의 큰 그림을 계속해서 그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러운 개혁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 초기 슬로건이 ‘작은 정부’였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부 규모가 더 확대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부는 점점 더 덩치가 커졌습니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인구가 감소하고 있고, 대학도 무한 경쟁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대학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가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정부가 지금처럼 비대한 조직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합니다. 정부 조직의 역할과 책임(Role and Responsibilities)을 철저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김세연: 정부 기능 가운데 기본 서비스 영역은 대부분 무인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외적인 영역에서만 사람이 직접 개입하는 방식으로 조정하는 것이죠. 여러 부처에서 같은 업무를 중복으로 수행하거나, 부처 간 정책의 정합성이 떨어지는 부분은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 업무 흐름 재설계)을 통해 걷어내고요. 간소화할 수 있는 부분이 정말 많을 겁니다.
정책 결정도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전문가 그룹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행정부 구조를 보면, 오히려 공무원들이 정책 결정에서 손을 떼고 전문가 그룹이 거버넌스를 담당하는 편이 훨씬 더 고품질의 의사 결정을 가능하게 할 것 같습니다.
과학 기술 정책, AI 정책, 복지 정책 등 여러 분야에서 공무원들이 기계적인 순환 보직을 반복하면서, 정책 기획을 직접 수행하기보다는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외부에 용역을 맡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결과, 공무원의 전문성이 극도로 저하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 기능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합니다. 나아가 정부 역할을 근대 국가 형성 초기의 야경국가 모델에 가까운 수준으로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즉, 국가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기능을 국방, 치안, 방재, 방역, 특수 복지, 특수 교육 등으로 한정하는 겁니다.
장애인 복지나 특수 교육 같은 부문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지금보다 두 배, 세 배로도 보강해야겠죠. 반면, 불필요한 규제를 양산하거나, 공공 부문이 민간을 상대로 이른바 갑질을 하는 행태는 다 걷어내야 합니다.
최경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가능하다면 보다 과감하게 인력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또한 말씀하신 대로 전문가 그룹의 역할도 확대해야겠지만,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일반 국민의 참여를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기술적인 부분이 많이 안정됐기 때문에 이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방식도 충분히 실현 가능해졌습니다.
전문가 시스템과 관련해서는 AI를 활용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의사 결정권자를 중심에 두고 AI와 전문가 패널을 결합한 새로운 의사 결정 시스템을 구축할 수도 있습니다. 전문적인 분석가들이 AI와 데이터를 활용해 다양한 정책 자료와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최종 결정권자가 넓은 시각과 통찰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는 방식입니다.
중앙 행정 기관은 정책 기획과 수립에 기능이 집중되어 있으니, 이처럼 2~3단계의 단순한 체계로도 충분히 운영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처럼 불필요하게 비대해진 조직을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상위 계층을 유지하기 위해 중간 관리자층이 필요하고, 또 그 중간을 유지하기 위해 하위 실무자가 존재하는 지금의 정부 구조는 근본적으로 불필요하고, 과감히 축소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에는 시간이 걸리겠죠. 하지만 우리가 다른 나라보다 앞서려면 단순한 혁신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초혁신을 시도해야 합니다.
김세연: 시스템의 일부만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성공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대개 좌초됩니다. 설령 부분적인 개선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복잡한 시스템 내에서 작은 변화가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일종의 나비 효과처럼,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화가 확산하며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스템 전체를 한 번에 체계적으로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현재의 국가 체계는 개인이나 소수의 인위적인 개입만으로는 쉽게 흔들 수 없습니다. 사실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 진행되는 논의의 전제는, 지금 시스템은 결국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기존 시스템이 그대로 복제되어 졸속으로 다시 작동하게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이런 논의를 하는 것이죠. 교수님의 진단과 맞닿은 부분이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최경진: 공감합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공무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조직이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정부 조직은 R&R 분석을 통해 역할을 모듈화하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당 문제 해결에 필요한 공무원들을 모듈에서 선별해 배치하고, 전문가들과 협력해 문제를 해결한 뒤 다시 원래 모듈로 돌아가게 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딥시크(Deep Seek) 같은 이슈가 발생했을 때,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 여러 부처가 각자 따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부처마다 소관 법령이 다르고, 각기 다른 기준과 절차를 따릅니다. 인권위원회처럼 독립성을 보장해야 하는 일부 위원회를 제외하고는 모듈화, 슬림화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내부 전문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외부 전문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정부를 운영하면 조직은 자연스럽게 전문성 있는 구조로 변화할 것입니다. 국가의 큰 정책 방향은 정치인과 정무직이 잡아 나가겠지만, 정책 집행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안정적으로 수행될 수 있습니다. 현재 각 부처 간 데이터 사일로를 없애야 한다는 논의가 많지만,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조직 간 사일로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데이터가 공유된다 해도 조직 간 협력이 원활하지 않으면 실제 정책 집행에서 한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일로가 제거되면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조직 간 칸막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지켜야 할 조직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직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지면 공무원들이 자리를 유지하려 하기보다는 실제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공무원이 회계 전문가라면, 전문성을 살려 적절한 모듈에 배치될 수 있습니다. 이후 이슈가 발생했을 때 그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급하게 사람을 모으게 될 텐데, 이때 자신의 필요성과 가치를 설득하지 못하면 공무원 조직 내에 남아 있을 수 없겠죠. 즉 자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계속 입증해야 하니까, 더 적극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게 될 겁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평가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기여도에 따라 성과가 평가되는 구조로 바뀌는 거죠.
김세연: 다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민간 기업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공공 조직에서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민간 조직은 단위 조직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유연한 운영이 가능하지만, 공공 부문은 최소한의 권력 구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정부 부처 개념을 유지하면서 모듈형 조직을 혼합하려 하면 정합성이 떨어지는 한계가 있겠죠. 그래도 집행권이 발휘되는 조직 단위가 존재해야 할 겁니다. 그 조직 내 상근 인원은 적을수록 좋겠고요.
교수님 말씀처럼 회계 모듈, R&D 모듈, 농업 모듈, 보건 모듈 등 분야별 전문 모듈이 구성되고, 이들이 특정 부처에 고정되지 않고 국방에도 관계될 수 있고 교육에도 관계될 수 있고 지자체에도 관계될 수 있는 거죠. 이슈가 발생했을 때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폐쇄적으로 정부 내부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지식 및 정보 생태계와 개방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전체 거버넌스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공동체 내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정치인들이 중재해서 절충안을 도출하고요.
공무원의 역할도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공무원은 최종 의사 결정자와 가장 높은 전문성을 가진 외부 그룹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기능을 새롭게 정의해야 합니다. 직업공무원제는 과거 근대 국가 형성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권력 교체에 따른 숙청 등으로부터 공무원의 생명과 직업적 안정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는데, 이 제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듈에 참여하는 사람은 전문가이거나, 일정 기간 계약을 맺어 성과 평가를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평생 고용이 보장된 구조에서는 유연하고 역동적인 모델이 작동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최경진: 한 부처를 대상으로 내부 칸막이를 싹 없애고 개별적으로 역량을 평가한 다음, 업무가 발생했을 때 모듈별로 인력이 모여 문제를 해결한 뒤 해산하는 방식을 실험해 볼 수 있습니다.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투입된 인력, 효율성 등을 평가해 보고 부처의 성과도 평가해 보는 거죠. 혁신을 실험하는 부처가 하나쯤은 있어야 다른 부처들도 혁신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말씀하신 내용은 현존하는 국가에서 기존 정부를 개선하거나 혁신을 시도하는 사례가 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국가 시스템을 설계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어서 차이가 좀 있겠네요.
현재 정부 내에서 운영되는 TF 조직, 임시 조직 등 범부처 태스크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각 부처에서 파견되어 나온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속한 부처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려 하는, 일종의 에이전트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누군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해도 나중에 감사나 국회 감독을 받을 수 있다는 부담 때문에 실행으로까지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시도는 익숙하지 않고, 기득권을 건드렸다가는 반발에 부딪히기도 쉽습니다. 결국 일을 주도했던 공무원은 소위 피곤해지거나 다치는 경우도 많고요. 그러면서 이런 시도가 차차 없어지는 것이죠.
이런 근본적인 한계가 있으니 지금의 노력을 중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자 의미 있는 노력을 하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을 때, 그러니까 훨씬 더 큰 변화가 왔을 때 우리가 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고민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이어 갔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최경진: 맞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건 완전히 새로 세팅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그러기 위한 실패들을 좀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정무직이든 선출직이든 봉사가 아니라 직업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누구나 평생직장을 원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정치 영역에 있는 사람은 본업이 따로 있는 상태에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김세연: 공무원의 순환 보직 제도가 유착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인 것처럼, 선출직 정치인이 본업을 가진 상태에서 활동하게 되면 오히려 특정 직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에이전트가 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 대의를 추구하는 공적 마인드를 갖추지 못한 자들이 그런 역할을 맡게 될 때 쉽게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정치가 봉사직으로 바뀐다면 이런 부분을 제어하기 어려워지는 한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최경진: 동의합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정치인이 본업을 따로 가져야 한다는 의견은, 사실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인의 특권을 없애야 한다는 맥락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국회의원의 특권은 철저히 폐지하는 한편, 의회 자체는 더 전문화하면서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분야별로 듣기 위해 의원 수를 늘릴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제가 행정부는 작은 행정부로 가야 한다고 했지만, 정치는 행정과 다른 면이 있다고 봅니다. 입법부는 국민과의 소통과 대표성에 초점을 맞춰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영국 방식도 좋다고 봅니다. 진짜 시민을 대변하기 위해 하원에 수많은 의원을 두고 있죠. 상원에서는 전문적인 리뷰를 해주고요.
김세연: 총리가 권한을 사유물처럼 인식하면, 해당 분야의 최고 석학이나 전문가를 위촉하기보다는 충성도에 따라 자리를 나눠 주는 방식으로 인사를 악용할 가능성이 있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우려도 됩니다. 정치 개혁으로 넘어가면 논의 주제가 너무 커질 수 있어서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다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민법을 중심으로 한 법체계, 즉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세계적으로 통용될 만한 더 보편적인 제도 인프라를 우리가 먼저 준비할 수 있을지에 관한 논의도 있었습니다. 또한 법 제도가 실제로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집행권을 가진 행정 체계가 현재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더 나은 구조로 전환될 수 있을지도 논의해 봤습니다.
법학계는 가장 신중하고 점진적인 학문 영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학계 안에서 첨단 이슈들을 깊이 고민하고 현실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해 오신 교수님의 지혜와 통찰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구상과 의견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경진: 저 역시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가족 제도에 대한 재검토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테니까요. 젊은 세대의 삶은 방식은 이전과 크게 다릅니다. 혼인 제도를 기존처럼 유지할지, 동거를 허용할지, 또 결혼에 일정한 유효 기간을 설정하는 방식을 도입할지 등 새로운 논의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하신 대로 인공 수정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있으니, 기술 발전에 따라 친자 관계 제도도 바뀔 수 있겠죠. 이런 다양한 요소를 민법에 녹여 낼 필요가 있습니다.
김세연: 현재 논의가 절실히 필요한 부분을 정확히 짚어 주셨습니다. 오늘 미처 다루지 못했던 사법 제도와 가족 개념을 포함한 사회 제도, 앞으로 변화할 사회상에 대해 다시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경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