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연: 오늘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는 정재민 변호사를 모시고 우리 사회에서 범죄를 예방하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범죄 예방을 위한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수 있을지도 함께 다룹니다. 또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효과적으로 구제하는 방안과 범죄자가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교정 행정의 역할에 대해서도 논의하겠습니다.
최근 사적 제재를 주제로 하는 드라마 시리즈가 많아지고 인기도 높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국민 다수가 우리 사법 시스템이 범죄를 공정하고 정의롭게 단죄하지 못한다는 인식, 그 답답한 심경 때문에 사적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그런 드라마를 보셨는지요?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재민: 최근에 제일 많이 보는 사적 복수에 관한 드라마는 〈지옥에서 온 판사〉인 것 같습니다. 그전에도 〈모범택시〉 같은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죠. 외국에도 〈테이큰〉, 〈모범시민〉 이런 영화가 있고요. 강하게 복수하는 영화가 인기를 얻었고, 저도 보면서 진짜 시원했어요. 사적 복수를 열망하고 시원하게 복수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는 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들어 그런 장르가 더더욱 인기를 끄는 건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 수사 기관이나 사법 기관이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을 충분히 처벌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수사 기관에 고소를 해도 수사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찰이 사건을 책임지고 철저히 조사해서 범인을 신속히 검거하느냐고 했을 때 사람들이 체감할 만큼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살인 같은 중대한 범죄나 유명한 사건의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다양한 피해에 대해서는 고소를 하더라도 대응이 늦어지고, 진행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소를 하더라도 증거를 고소인에게 찾아오라고 해요. 경찰이 나서서 찾아 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 고소인이나 고소인 변호사가 다 찾아서 가져다줘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는 요즘 고소대리를 하면 거의 탐정 같은 역할을 해서 증거를 갖다주고 있어요. 경찰을 이렇게 빨리빨리 독려를 해야 움직이는 식이에요. 저희 같은 변호사가 있는 의뢰인은 혜택을 좀 받을 수 있지만, 변호사 없이 일반인이 고소했을 때는 언론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 아니라면 처리가 느려질 수밖에 없죠.
또 사건이 재판으로 넘어가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재판 과정이 수사보다 오래 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이 다른 부분은 일일이 누구 말이 맞는지 따지다 보니 절차가 길어지고, 피해자는 점점 지치게 됩니다. 시간이 6개월, 1년씩 지나면서 피해자가 입었다고 생각하는 피해 규모도 재판을 거치며 축소되거나 희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최소 5~6년, 심지어 10년 이상의 형을 받아야 한다고 기대하지만, 결과적으로 집행유예나 벌금형 같은 가벼운 처벌로 끝나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렇게 사건이 종결되고 나면 가해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 가는 반면, 피해자는 상실감과 실망감을 안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분노와 피로감을 느끼고, 자신이나 주변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더 큰 좌절을 겪게 되는 것 같습니다.
김세연: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주로 형사 사건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입니다. 민사 사건은 주로 경제적 분쟁을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형사 사건은 경제 이슈 외에도 다양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형사 사건 처리 시스템상의 주요 문제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증거 수집의 부담입니다. 범행을 입증할 책임이 피해자에게 과도하게 전가되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피해자는 형사 사건의 증거 수집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부담을 피해자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경찰 인력의 부족과 격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경찰이 모든 사건에 세밀히 대응할 수 없는 현실에서, 피해자에게 증거를 직접 가져오라는 방식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두 번째는 수사 자원의 부족 문제입니다. 경찰과 수사 기관의 인력과 자원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심이 큰 일부 사건에 수사력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일반 사건에는 수사력이 충분히 투입되지 못하고, 피해자가 입증 책임을 떠안게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특히,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수사 과정에서의 ‘핑퐁 현상’이 더 심화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양형의 공정함 문제입니다. 수사와 기소를 거쳐 사건이 재판으로 넘어갔을 때 양형의 공정함에 대해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과 불복 심리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스케치 다이얼로그〉의 취지는 우리가 진단한 문제들에 대한 처방을 기존 시스템을 고치는 데도 활용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완전히 백지에서 새로운 사법과 수사 시스템을 설계해 본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를 논의하는 것입니다. 백지에서 새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서 각각 어떤 밑그림을 그려 볼 수 있을까요?
정재민: 백지에서 사법 시스템을 설계한다면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경찰이나 수사 기관은 범죄가 발생했을 때 책임지고 범인을 잡아서 시시비비를 가려 사건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저는 이것이 국가의 제일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국가의 기본 역할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보호하고, 내부적으로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만 제대로 수행해도 사실 성공한 국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안에서 개인들이 자율성을 가지고 룰을 지키며 살아가는 거죠. 복지와 같은 추가적인 요소는 그다음의 문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현재 시스템에서는 몇 가지 문제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피해자가 과도한 입증 책임을 떠안아야 하고, 수사와 재판 과정이 지나치게 느리고, 결과물도 신통치 않아요. 수사 인력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수사 능력이 있는 베테랑들이 거의 다 수사 현장을 떠났어요. 검찰에서도 유능한 인재들이 다 떠나고 있습니다. 법원도 마찬가지예요. 범죄에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 국가의 제일 기본적인 기능인데, 지금도 잘 작동하지 않고 있고 미래에도 개선될 가능성이 작아 보여요.
백지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기본으로 돌아가서, 피해자가 힘쓰지 않아도 국가가 다 해줘야 해요. 경찰이 나서서 증거 수집을 다 하고 필요한 조력도 해주고, 검사는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해서 기소하고 적절한 형량을 구형하고, 법관은 진짜 나쁜 사람에겐 엄벌을 내리고 억울한 사람은 풀어주면서 재판도 신속하게 진행해야죠. 바쁜 세상에 재판을 2~3년 넘게 끌고 가면 피해자가 완전히 망가지잖아요. 종합하자면, 간단해요. 국가가 다 해야 합니다.
김세연: 이 논의를 하다 보니 반복해서 직면하는 딜레마인데, 기존 시스템의 개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백지에서 새로 시스템을 구상한다 해도 아마 기존과 비슷한 형태를 띨 가능성이 커서, 일단 현재 시스템을 살펴보며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현재 시스템을 보자면, 가령 첫 번째인 수사 단계에서 범죄 피해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자가 조치를 취하지 않더라도 국가의 도움으로 철저한 수사가 이뤄지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이 기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논의하는 것은 개념 설계이지 상세 설계는 아닙니다. 상세 설계로 넘어가려면 예컨대 현재 범죄율과 범죄 유형, 양상을 바탕으로 경찰과 수사 인력이 얼마나 필요한지 추산해야겠죠. 현재 경찰 100명으로는 신속하고 정확한 수사가 어렵다면 200명, 500명, 혹은 1000명이 필요할지에 대한 추산이 필요합니다. 상당히 방대하고 광범위한 작업이 되겠죠. 그러나 지금 우리의 논의 대상은 아닙니다.
백지에서 시작하는 논의의 장점은 기존의 제약 조건이 없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인데, 잘 만들면 오래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런 관점에서 수사 자원의 총량을 어느 정도로 설정하는 것이 좋을지, 여기에서 개선할 수 있는 방식이 있을지를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수사 단계에서 불필요한 대기 시간이 있을 수 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하는 것도 많이 있을 겁니다. 이런 비효율을 줄이는 것이 개선된 새로운 체계를 그리는 데 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경찰 인력을 지금보다 5배, 10배로 늘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다른 대안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법적으로 그레이존(grey zone)에 머물고 있는 탐정업을 양성화하고 준사법적 지위를 부여해 공공의 성격을 띠는 민간 영역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퇴직 경찰관이나 관련 전문성을 가진 민간 인력을 활용해 부족한 자원을 보완할 수 있겠죠.
이때 중요한 것은 규모를 어떻게 정하느냐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로스쿨 정원이 과다하게 책정돼서 미국식 ‘앰뷸런스 체이징(ambulance chasing)’이 나타날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유발하지 않도록 공급과 수요가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범죄 자체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죠. 우리가 잠시 뒤에 논의하게 될 근원적인 범죄 예방책을 잘 세우면 수사 체계에 들어가는 자원이 더 줄어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점까지 고려해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정재민: 개념 설계라고 가정한다면 이런 시스템이 가장 이상적이겠죠. 예를 들어 우리 집 냉장고가 고장 나면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에 연락하면 두 시간 만에 와서 고쳐 줍니다. 엄청 친절하죠. 필요한 부품이 있으면 당일에 다시 와서 마무리해 주고 갑니다. 이런 서비스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놀라운 수준이죠. 심지어 주말에도 와서 고쳐 줘요. 새벽 배송도 마찬가지죠. 쿠팡에서 주문하면 그다음 날 아침에 물건이 집 앞에 와 있습니다.
정말로 마음대로 설계할 수 있다면, 미래 국가에서는 만약 범죄가 발생하면 한두 시간 만에 와서 조사하게 하는 거예요. 수사팀이 현장에 즉각 출동해서 기본적인 조사를 다 해주는 거죠. 어떤 증거가 필요한데 혹시 있는지 피해자에게 묻고, 그 증거를 확보하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해주겠다고 하고. 피해자가 어디에 무슨 흔적이 남아 있을 거라고 하면 우리가 사람 보내서 촬영하고 현장 보존하겠다고 해주고. 이걸 한 시간 만에 와서 다 해주는 게 가장 좋죠.
김세연: 오래전에 《리엔지니어링 기업혁명》이라는 책에서 봤던 사례가 떠오릅니다. 보험사에서 보험금을 청구하는 과정이 원래 2주가 넘게 걸렸는데,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을 통해 불필요한 대기 시간과 절차를 없앴더니 이틀 안에 처리가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공 부문에서는 이런 혁신이 어렵죠. 공공이 성역화되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됐습니다. 공개라도 하면 개선안을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도 않고요. 그러다 보니 민간에서 볼 수 있는 초고효율화된 서비스는 공공 영역에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상태가 된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쿠팡 같은 민간 기업에 조사 서비스 설계를 맡겨 볼 수도 있겠죠.
정재민: 삼성전자 서비스, 쿠팡처럼 바로 오면 됩니다. 사람이 바로 오지 않더라도 화상 전화로 기초 조사를 진행할 수 있겠죠. 30분이면 되거든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팩트를 확인하고, 당장 필요한 조치를 안내하고, 앞으로 할 일도 알려주고. 지금 한 달에 얼마씩 주겠다는 공약들이 많은데, 그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김세연: 콜센터 직원분들이 이미 복잡한 금융이나 기술 같은 상담은 소정의 교육을 거쳐서 자격을 얻고 할 텐데, 방금 말씀하신 기초 조사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요.
정재민: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인력은 많이 들겠지만, 비용이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아요. 문제는 시스템을 남용하고 악용하는 사람들이죠. 악성 고소, 고발이 많아질 텐데, 시스템을 악용하는 사람에게는 비용을 물려야죠. 허위 고소, 고발에 대해서는 무거운 형사 처벌을 하고, 무고가 아닌 애매한 경우에도 비용을 청구해야 남용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지금 한 달에 50건씩 고소하는 악성 민원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아예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게 제외할 수도 있겠고요.
김세연: 시스템에 과부하를 일으키는 요인을 추출해 보면 아주 특이한 이상 행동을 보이는 극소수가 부하를 엄청나게 만들고 있을 겁니다. 시스템을 남용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적절한 처벌 또는 부담을 지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 수사 절차의 간소화, 즉시 대응 체제 도입, 그리고 시스템에 과부하를 주는 요소를 배제하는 방식을 결합하면 아까 언급한 탐정업이 특별히 더 커질 필요는 없겠네요.
정재민: 그렇죠. 탐정 서비스는 돈 내고 이용하는 거잖아요. 국가의 제일 중요한 임무는 범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니까 경찰이 해야죠. 민간 서비스의 발전이나 기술 발전을 생각해 보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세연: 오늘 수사 관련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국가 체제에서 경찰 행정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에 대한 단초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 가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재판 시스템으로 넘어가 보면, 사건이 2~3년씩 지연되는 문제와 함께, 소송이 거의 기계적으로 서로 불복해서 항소나 상고로 이어지는 구조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기계적인 상급심 이동이 과연 다른 나라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지 궁금합니다.
정재민: 국민성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부터 고소와 항소가 많았다고 해요. 당시 사또들이 재판하느라 너무 힘들었대요. 사또들이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일본과 비교할 때는 우리나라가 확실히 고소, 고발이 많아요. 일본에서 소송은 사이가 완전히 끝장났을 때나 하는 거예요. 조정조차도 사이가 완전히 단절됐을 때나 하는 거고요. 도쿄 법원에 조정 건수가 몇십 건밖에 안 되더라고요. 우리와는 문화가 많이 다른 거죠.
우리나라는 고소가 많을 뿐만 아니라, 패소했을 때 끝까지 가는 경향도 강합니다. 사법부의 판단을 불신하기도 하죠. 저 역시 변호사로 활동하다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도 많거든요. 과거에는 판사들의 사고방식이 비교적 균일화돼 있었어요. 옛날에 텔레비전 채널이 KBS, MBC, 두 개밖에 없을 때는 판사들 생각이 달라 봤자 거기서 거기였지만, 지금은 너무 달라요.
나이 많은 판사, 젊은 판사, 남자 판사, 여자 판사가 특히 성범죄와 관련된 판결에서 너무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다 각자 핸드폰으로 유튜브 보잖아요. 개별화된 정보를 소비하면서 정치적 입장이나 사고방식이 파편화됐어요.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과거와 비교할 때 판결의 예측 가능성이 크게 떨어졌죠.
김세연: AI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창작 분야가 가장 늦게 대체될 것이라고 봤는데, 현재 상황을 보면 이런 예측이 다 깨지고 있습니다. 사법 체계에서는 예측 가능한 균질성 높은 판결이 중요합니다. 판사가 누구냐에 따라 판결이 크게 달라진다면 문제가 되죠. 판결이 최소한 비슷하다는 믿음이 깨지면, 인간 판사보다 AI 판사가 더 공정하고 편차를 줄인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기대하는 심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정재민: 제가 변호사인데, 차라리 AI한테 판결을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제일 중요한 룰이 뭐겠습니까. 예측 가능성이잖아요. 똑같은 사안에 대해 똑같은 판결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김세연: 사법 체계, 특히 법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쉬운 환경이 된 것 같습니다. 아까 이야기 나눈 사적 복수에 대한 대중의 관심, 재판에 대한 불신, 이런 문제가 다 연관돼 있을 텐데, 이 상황이 방치된 상태로 더 지속되면 종착점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요?
정재민: 룰이 있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이 되겠죠. 끝까지 승복하지 않는 거죠. 지금 우리가 그렇잖아요. 사회가 타협이 안 되죠. 싸우면 끝까지 가고, 판결이 나와도 ‘판사가 저쪽 편이라서 그렇다’ 이러잖아요. 끝까지.
김세연: 종착점의 모습이 어떨까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종착점에 살고 있는 거네요.
정재민: 서초동이 법원, 검찰, 변호사들이 몰려 있는 법치주의의 상징과 같은 곳인데, 보세요. 지금도 서초동 한가운데에서 확성기 틀고, 음악 틀고, 각종 욕설을 적은 플래카드 붙이고, 직업적인 시위꾼들 열댓 명이 수시로 와서 마이크 잡고 온갖 상스러운 구호를 외치고 갑니다. 이게 법치주의의 한복판에서 일어날 일인가요. 이건 법치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니죠. 과거에 발목을 잡혀서 사는 거예요. 우리가 사법 절차를 하는 이유는 과거의 문제를 떨치고 미래로 가기 위해서예요. 과거 일로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정리하는 거죠. 과거의 불미스러운 일을 그렇게 정리하는 겁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한정된 삶 속에서 과거를 교훈 삼아 더 즐겁게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과거 분쟁이 2년, 3년, 5년씩 계속 가게 되면 새로운 삶을 못 살아요. 과거에 발목 잡혀서 불행하게 되는 거죠.
김세연: 판사들의 판단에 편차가 커지고 예측 가능성이 작아진 상황을 분포로 보자면, 스펙트럼상 좁은 구역 안에 판단의 탄착점이 모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흩어지다 보니까 재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한다 해도 결국 시스템은 인간이 사용하는 거니까 시간이 갈수록 변화가 일어나고 망가지는 방향으로 갈 텐데, 망가지는 속도와 정도를 줄이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법부가 지금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요. 중간에 시스템이 망가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나 변화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 지점을 우리가 정확히 이해한다면, 이런 일이 더 자주 발생하지 않도록 하거나 가능한 한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점들이 있을까요?
정재민: 누가 잘못해서 이렇게 됐다기보다 시대의 흐름과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것 같습니다. 일단 판사 수에서 옛날에 전국에 200~300명 있을 때와 지금 3000~4000명 있을 때의 판결이 균일할 수가 없죠. 판결의 탄착점이 넓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법원 판결에 대한 비판을 재판 독립의 침해로 받아들이면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다 사법부가 정치적으로도 몇 차례 휘말렸잖아요.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사람을 중요 재판에 앉히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어떻게 재판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기술 발전과 문화 발전도 영향을 미치고 있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방송 채널이 두 개 있던 시절과 지금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김세연: 우리나라와 현대 민주주의 역사가 비슷한 독일의 경우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교사, 공무원, 판사도 정당에 가입하고 정치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고 정치적 자유를 행사하는 것과 별개로, 전문 직역 내에서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도가 허용되고, 운영상 큰 문제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정치 교육이 자유롭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죠. 정치 교육의 영역이 학교 안에 공식화돼서 확보될 때 이념에 경도된 교원 단체가 이를 악용할 수 있다는 사례들이 나오면서 아예 금기시돼 버렸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자유를 행사하는 것과 전문 직역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분리돼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양식입니다. 아무리 교육 수준이 높고 똑똑한 사람이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직무에 반영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정재민: 현재 판사들은 자기 재판에 피드백을 받지 않습니다. 혼자 재판을 진행하고,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 누구도 이야기해 주지 않아요. 저도 판사 때 그랬어요. 누구도 피드백하지 않아요.
판사는 원고와 피고,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을 충분히 듣고 나서 마지막에 신중하게 질문하고 최종적으로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 판사는 한쪽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급하게 캐묻고, 수사하듯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는 발언을 문제 삼아서 공격하는 일도 있고요.
개인적인 독특한 가치관을 상식인 것처럼 판결에 투영하고, 정치적 성향을 투영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할 때도 많은데, 그런 것들에 대해 피드백을 받지 않아요. 변호사도 그런 말을 못 합니다. 만약에 그런 말을 하면 판사에게 찍히겠죠. 언론이나 대중에 대고 하면 고객들이 저 변호사는 판사와 사이가 안 좋은가 보다 하고 안 오겠죠. 그러니까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하는 거예요. 재판에서 변호사는 ‘네, 맞습니다’라고 비위를 맞춰야죠. 혹시라도 피해를 볼 수 있으니까.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교정을 할 수 있겠어요. 잘못된 재판을 하고 있어도 법원장이 그걸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요.
김세연: 충격적이네요. 시스템이 그러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상 속에서 생각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정재민: 제가 변호사로서 재판을 받아 보니까, 판사마다 역량이 너무 달라요. 크게 잘못한 부분이 있어도 누구도 교정하지 않아요. 검사라면 위에서 결재를 하면서 ‘이건 아니지 않아?’ 하는 교정의 기회가 있겠죠. 물론 그 때문에 부작용도 적지 않지만요.
김세연: 검사동일체 원칙은 여러 논란과 비판을 받지만, 적어도 퀄리티 컨트롤 측면에서는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네요. 검찰에도 법원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이지만, 조직 내에서 사건별로 결재 과정에서 판단을 조율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판단의 탄착점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지지 않고 어느 정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반면, 법원은 헌법에 보장된 ‘재판의 독립’ 원칙에 따라 판사가 독립적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가운데, 어떠한 피드백도 이뤄지지 않고 있고요.
정재민: 재판의 독립이지, 판사의 독립이 아니거든요. 재판의 독립의 핵심은 공평입니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정의로운 판결이 되려면 어떤 판사를 만나든 같은 사안이면 비슷하게 나와야죠. 그게 아니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이 판사에게 가면 무죄 받는데, 저 판사에게 가면 유죄 받고, 이 판사에게 가면 징역 2년 실형을 받는데, 저 판사한테 가면 집행유예로 나오고. 그러면 정의가 있다고,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런데 법원이 판결 결과가 유사하게 나오게 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하고 있나요? 지금이 권위주의 정권 시절도 아닌데 계속 재판의 독립을 말하면서 법관들이 어떤 것이 미흡한지, 그런 재판에 대해서 소송 당사자나 변호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기회조차 봉쇄돼 있는 게 큰 문제라고 봅니다.
김세연: 피드백을 넣는 데에는 여러 방식이 있을 텐데, 어떤 방식이 좋을까요?
정재민: 1심이 끝나고 나서 판사에 대해 의견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판사의 진행 방식 등에 대해 본인과 법원장에게 익명으로라도 피드백을 주는 거죠.
김세연: 특정 건에 대해 피드백이 가면 익명이 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기업이라면 퀄리티 컨트롤을 위해 기준을 설정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기준에서 벗어나는 이상치를 확인한 뒤 그 원인을 분석해 해결하는 방식으로 품질 관리를 합니다. 이런 방식은 실물이 움직이는 구체적인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반면, 사법 시스템처럼 추상적이고 판단의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큰 분야에서는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하겠죠. 예를 들어 자율 피드백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50명의 판사가 있는 법원이라면, 그중 3~5명 정도를 선택해 전체적으로 튜닝하는 역할을 맡기는 거죠.
정재민: 사실 그 튜닝하는 역할을 항소심이 하는 건데, 항소심까지 가면 이미 인생이 다 끝나죠. 직원이 잘못한 게 있으면 고객이 대표인 저한테 연락을 해서 이런 점은 고쳐 주면 좋겠다고 해요. 또 회사들 홈페이지에 보면 고객 게시판이 있잖아요. 거기에 글을 올리면 대표가 보고 튜닝을 할 수 있습니다. 법원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잘 안 해요. 자신들은 결함이 없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르죠. 뭔가를 어필하면 ‘네가 졌으니까 그렇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법원장한테 말한다 한들 법원장이 판사들 불러서 그러지 말라고도 못하고요. 그러면 재판에 관여했다고 하니까요.
김세연: 피드백 시스템을 붙여 놓으면 아마 악성 민원 사례들이 나타나겠죠. 목소리를 크게 내면 판결을 뒤집을 수 있을까 싶어서 피드백 시스템을 악용할 가능성이 있어요. 악용되지 않으면서 애초 의도했던 성과가 잘 나올 수 있도록 해야겠네요.
새로운 사법 시스템을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과제를 정리하자면, 첫째는 판사들의 다양한 관점이나 성향이 재판 결과의 예측 가능성을 저해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이 모든 판단에서 무결성을 유지할 수는 없으므로 판사들이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어떻게 설계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재판의 신속성을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현재 시스템에서는 수백 건의 사건이 병렬적으로 처리되면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순환 보직으로 재판 중에 판사가 바뀌면 처음부터 사건을 다시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판사들이 가능한 한 본인의 임기 안에 재판을 마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고,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절차를 직렬화해 시간을 단축할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런 프로세스 개선은 데이터 분석을 통해 정교하게 설계할 수 있을 겁니다. 사건 진행의 병목 현상을 파악하고, 이를 줄일 수 있는 프로세스를 정비한다면, 앞서 논의한 판결의 예측 가능성 담보나 피드백 체계 구축보다 상대적으로 난도가 낮을 수 있습니다. 사법 시스템을 새로 설계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할 중요한 주제로 세 가지 정도를 살펴봤는데, 혹시 추가할 부분이 있으신지요?
정재민: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성입니다. 재판의 핵심은 사실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거예요. 그게 거의 95퍼센트를 차지해요. 법 적용하는 건 5퍼센트밖에 안 돼요. 결국 대부분의 싸움은 사실 관계를 둘러싼 다툼입니다. 사실 관계를 정확히 인정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 부분에서 틀릴 때가 너무 많아요.
진실을 가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만약 사실 관계를 잘못 파악하면, 아무리 친절하게 재판을 진행하고, 경청하고, 피드백을 잘 받더라도, 아무리 재판을 균일하게 하려 노력하더라도, 모든 과정이 무의미해집니다. 때렸는데 안 때렸다고 하고, 다섯 대 때렸는데 한 대 때렸다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김세연: 사실 이 문제는 수사에서의 증거 수집과 입증, 그리고 재판이 바로 맞물리는 대목이라서 앞단이 정확하게 이뤄지면 뒷단의 퀄리티가 올라갈 것 같습니다.
정재민: 그렇죠. 그런데 이건 민사에도 적용됩니다. 민사가 형사보다 훨씬 많거든요. 민사에는 수사라는 게 없잖아요. 재판에서 이야기를 하면 요즘 판사도 잘 모르겠으니까 다 기각이에요. 증거가 부족하고 애매하니까. 그런데 증거가 있었으면 재판에 왔겠어요? 증거가 없거나 어중간한 상태로 오니까 여기서 또 편차가 생깁니다. 어중간한 증거를 이렇게 인정하면 이런 판결이 나오고, 저렇게 인정하면 저런 판결이 나오고. 결론이 판사마다 달라집니다.
김세연: 판사는 법정에서 검찰과 변호인이 제시하는 증거를 바탕으로 진실이 무엇인지 판별합니다. 민사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 일단 형사만 본다면, 판사는 직접 증거를 수집하지 않고 경찰과 검찰이 수사와 기소 단계에서 수집하고 확인한 증거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 증거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겠죠. 정보의 흐름 관점에서 보면, 수사 단계에서 수집된 증거가 판사에게 전달될 때까지의 과정에서 정보의 신뢰성을 확보할 체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재민: 일단 기록을 열심히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게 없으니까 기록을 열심히 보는 거죠. 그런데 큰 사건은 기록이 1만 페이지가 넘는 게 흔하고, 툭 하면 몇천 페이지란 말이죠. 기록을 꼼꼼하게 다 본다고 해도 한 페이지씩 펼쳐 놓고 살피는 게 아니라 빨리 본단 말이에요. 그런 것들을 좀 더 꼼꼼히 봐야겠죠.
김세연: AI가 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업무네요. 과거에 변호사보다 회계사가 AI의 영향을 먼저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이유도, 숫자와 같은 명확한 사실을 파악하고 오류를 찾아내는 작업을 AI가 훨씬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마찬가지로 재판에서도 AI는 판단 자체가 아니라, 사실 관계를 교차 검증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다.
정재민: AI가 얼마나 발전할지는 모르지만, 판결의 편차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증거가 있을 때 사실이 있다고 인정한 판사들의 수, 사실이 없다고 인정한 판사들의 수 같은 것이 나오면 일종의 피드백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중에서 나는 어느 쪽으로 편향돼 있구나, 하는 걸 깨달을 수 있겠죠.
김세연: 녹내장 진단이 안과 의사가 판별하기 가장 어렵다고 하는데, AI가 인간 의사를 능가했다는 연구 결과가 벌써 몇 년 전에 나왔습니다. 테슬라는 전 세계에 500만 대가 운행되면서 각 차량이 수집한 데이터를 AI가 학습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생산된 한 대의 테슬라는 기존 모든 테슬라 차량이 학습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운행되는 거죠.
마찬가지로 판례 중심의 미국 사법 체계에서는 이미 AI의 도움을 받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판례를 많이 아는 변호사가 최고였는데, 이제 AI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거죠. 재판에서도 AI의 지원을 받게 되면 효율성과 정확성이 많이 늘어날 것 같습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교차 검증해서 상반된 주장을 가려내는 데 큰 도움이 되겠죠.
정재민: 변호사 업무에도 도움이 되죠. 기록을 넣으면 금방 변론을 잘하겠죠. 그런데 놀라운 건 지금도 형사 재판은 종이로 다 합니다. 민사 재판은 전자가 있지만, 형사 재판은 전자가 아니에요.
기소가 되고 나서 변호인이 선임되면 재판 준비를 위해 기록을 봐야 하는데, 이 기록은 법원 서고에 오직 한 뭉치로만 존재합니다. 그 기록을 판사가 안 볼 때 검사가 가서 빌려 보는데, 기소가 될 때는 아직 재판이 안 열렸으니까 판사가 보기 전에 검사가 갖고 있어요. 변호인이 검찰청에 가서 그 기록을 봐야 하는데, 검사들이 자기들이 보려고 하잖아요. 그걸 빌려서 봐야 돼요.
그런데 검찰청 복사실이 2~3개밖에 없어요. 줄 서는 거예요. 오늘 신청한다고 오늘 빌려주는 게 아니에요. 오늘 신청하면 한 달쯤 뒤에 날짜와 시간을 잡아서 우리 직원이 검찰청에 가서 복사를 해요. 요즘 복사기는 통째로 넣으면 복사되잖아요. 그런데 그걸 못 하게 합니다. 한 장씩 풀어서 복사해야 해요. 1만 페이지짜리면 며칠씩 가서 줄 서서 한 달 내내 기다리고 있다가 한 장씩 복사하는 거예요. 개인 정보는 검은색으로 칠해서 지우고 검사받고. 재판 준비하려면 기록을 봐야 하는데, 기록 보는 데에만 한 달 이상 걸리는데 언제 재판을 하겠어요? 지금 시대에는 말이 안 되죠. 2025년부터는 전자 파일로 된다고 하니까 기대해 봐야죠. 그러면 AI로 검색을 할 수 있겠죠.
김세연: 놀랍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2025년에 형사 재판에도 전자 문서가 도입되면 법원 안팎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양형 시스템에 대해 논의해 보면 좋겠는데요, 수사 단계와 재판 단계를 지나서 피고인이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을 하게 됩니다. 대법원의 양형 기준이 있습니다만, 양형이 적절한지에 대한 피해자들의 수용성, 그리고 법조계 안에서 바라볼 때의 공정성, 이런 부분에 대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정재민: 일단 지금 법정 구조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많이 반영할 수 없는 구조이긴 합니다. 주인공은 피의자, 피고인이에요.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무고한 사람이, 특히 정치적인 이유로 형사 처벌을 받는 경우들이 있었죠. 그런 위험성 때문에 법과대학에서 피고인에 대한 인권 보호 필요성이 강조돼서 교육이 이뤄진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 피해자의 권리 보호가 더 강조될 필요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차원에서 법정에 피해자석을 하나 만들어 주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해요.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 나와서 목소리를 내는 재판과 그렇지 않은 재판에서 형량이 같을 순 없겠죠. 그리고 형량에 있어서는 엄벌에 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측 가능한 고른 형량이 나오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김세연: 양형 시스템은 앞서 논의한 피드백 체계 구축과 판결의 균질성 확보와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일단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이제 교정 행정 쪽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교정 행정에서 중요한 문제는 재범률을 어떻게 낮출 것인가입니다. 교정 시설에 들어간 이들이 교정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재범을 더 쉽게 저지르는 환경에 놓인다면 교정 행정의 의미는 크게 퇴색하겠죠.
또한, 양형 체계에서 피해자들이 느끼는 법 감정과 판결 사이에 괴리가 있는 것처럼, 교정 시설의 운영 방식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는 교정 시설이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지는 논의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정재민: 교정은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만드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 목표는 교정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를 평가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통계가 바로 재범률입니다.
재범률은 교도소를 나간 사람이 3년 안에 다시 교도소로 돌아오는 비율입니다. 3년 안에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는 비율이 아니에요. 3년 안에 다시 교도소에 오려면 상당히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야 합니다. 실형을 받아야 하는 거죠. 3년이라는 시간 안에 다시 교도소에 들어오려면, 수사와 재판에 걸리는 시간이 꽤 있으니까 범죄자가 교도소에서 나가자마자 매우 빠르게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야만 가능한 거죠.
김세연: 예를 들어 암 완치 판정은 5년 내 재발이 안 되는 것을 기준으로 합니다. 3년 안에 다시 교도소 오려면 매우 짧은 기간인데 왜 이렇게 짧게 잡혀 있습니까?
정재민: 그래야 재범률이 좀 낮게 보이니까요.
김세연: 우리나라 실업률 기준이 다른 나라에 비해 관대하지 않습니까. 재범률 통계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3년이라는 기간을 기준으로 삼아 재범률을 산정하면 지표를 보고 기분이 덜 나빠지기는 하겠지만, 교정의 실제 목표인 범죄자의 심리적 안정이나 행동의 교정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확인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3년이라는 기간이 너무 짧게 설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재민: 5년으로 하는 나라가 많고, 3년으로 하는 나라도 있죠. 재범률을 발표할 때 좀 적게 보이려고 그러는 건데, 그래도 재범률이 25퍼센트예요. 결코 낮은 숫자가 아니죠.
김세연: 관리 대상 지표가 꼭 하나여야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5년 지표도 혹시 있나요?
정재민: 5년 지표는 안 잡는 것 같아요. 법무부의 범죄 백서에는 3년만 있어요. 데이터는 정부가 가지고 있으니까 정부가 안 내놓으면 알 수 없죠. 그런데 3년이냐, 5년이냐는 각론에 해당하고 사실 핵심은 3년 안에 또 실형을 받는 비율이 되게 바쁜 일정인데도 25퍼센트나 된다는 거예요. 실형을 네 번 받아서 온 사람도 14퍼센트 정도 돼요.
지금 수감 인원이 5만 명이 넘는데, 그중에 2범 이상이 거의 절반이에요. 3년 안에 다시 교도소에 오는 비율을 절반으로만 떨어트려도 복리로 계속 곱해 보면 수치가 확 떨어져요. 재범률을 어떻게 낮출 수 있을 것인지가 교정, 범죄 예방을 통틀어서 가장 핵심적인 목표가 되는 거죠.
김세연: 현재 우리나라의 범죄 예방 정책은 피상적이거나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범죄 예방이라는 목표의 정책이 존재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 정책이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만약 효과적인 범죄 예방 정책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면, 범죄자들이 심리적 변화를 경험하거나 깨달음을 얻고, 그 결과로 행동이 달라지는 사례들이 보여야 할 텐데, 현실에서는 그러한 변화나 결과가 뚜렷하게 눈에 띄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재민: 성과가 있는 것도 있어요. 예를 들어 전자 발찌는 2007년에 도입됐는데, 과거에는 살인의 재범률이 5퍼센트에 달했어요. 살인범 20명이 출소하면 그중 한 명은 다시 살인을 저지르는 거예요. 그런데 전자 발찌 도입 이후, 살인 재범률이 0.1퍼센트로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전자 발찌로 범죄자를 계속 트래킹(tracking)하니까 범죄 억제 효과가 나타나는 거죠.
성범죄나 강도 같은 범죄율은 전자 발찌를 채운 사람은 확실히 쫙 떨어져요. 트래킹을 하니까요. 지금 트래킹하는 사람이 4000~5000명쯤 되거든요. 실시간 모니터링을 합니다. 그 사람이 시속 몇 킬로미터로 움직이는지도 다 봐요. 어디 가는지 보고 피해자 위치와 동선이 겹칠 것 같으면 전화해서 다른 데로 가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인력이 너무 부족해서 보강할 필요가 있어요.
범죄 예방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 예방으로, 일반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특별 예방으로, 한 번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일반 예방은 인권 침해 때문에 함부로 못 해요. 아무나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해서 와서 교육을 받으라고 하면 아무도 안 오겠죠.
그런데 한 번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겐 법적 근거를 들이대면서 계속 관리하는 거죠. 무도 실무관도 보호 관찰의 일종이잖아요. 보호 관찰이 효과가 상당해요. 보호 관찰 중에 있는 사람의 재범률은 확실히 낮아요. 정기적으로 전화하고, 갑자기 미행하고, 집에 늦게 들어오면 왜 늦었는지 물어보고, 요즘 누구 만나냐고 물어보는데, 아무래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되죠. 또 상호 작용이 있다 보니까 내가 사회에서 보호와 관심을 받는구나, 하는 느낌도 들게 하고요.
김세연: 전자 발찌와 보호 관찰 제도의 효용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네요. 법무 행정을 들여다볼 기회가 없어서 잘 몰랐던 부분입니다.
정재민: 일반적으로 느끼기는 어렵죠. 저야 법무부에서 일을 했으니까요. 교정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자면 결국 25퍼센트의 재범률을 어떻게 떨어트리느냐, 이 이야기를 할 때 의견이 갈려요.
노르웨이 같은 곳은 결국 범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저지르는 것인데, 그 관계를 잘못하니까 그런 거라고 봐요. 합법적인 방식으로 자기 욕구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교도소 안에서도 계속 인간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들려고 해요. 좋은 곳에 시설을 짓고, 좋은 환경을 만들고, 같이 요리도 해서 먹고 음악도 연주하라고 하죠.
김세연: 안정된 환경에서 살아 본 경험이 부족하고, 원만한 사회적 관계를 체험해 보지 못한 상태에서 범죄의 길을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대안적인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이 과정을 통해 타인과 관계 맺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고 있네요. 교도소에서 생활하며 ‘아, 이렇게 생활하면 되는구나’ 하고 배울 수 있겠습니다.
정재민: 그렇죠. ‘이렇게 하면 내가 원하는 걸 합법적으로 얻을 수 있네’ 이걸 배우는 거죠. 그전에는 안 주니까 그냥 때리는 식이었는데, 상대를 기분 좋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걸 얻거나 자기가 양보도 좀 하면서 타인과 함께 서로 원하는 걸 얻고.
제일 근본적인 것은, 노르웨이에는 사형이 없고 또 20년 이상의 형은 잘 안 살게 한다는 거예요. 어차피 저 사람들이 다 사회로 돌아오는데, 같이 살아야 하잖아요.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려면 그 사람에게 엄청난 타격을 줘서 앙심을 품게 하기보다는 가르쳐서 안전하게 만들어 공존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기본적으로 있어요.
김세연: 노르웨이처럼 하려면 1인당 수용 면적이 넓어야 하고. 건물 규모도 여유가 있어야 하겠죠. 충분한 시설과 인력, 운영비를 감당하려면 1인당 교정 예산이 지금보다 몇 배는 많이 들어가겠죠.
정재민: 노르웨이에선 1인당 연간 1억 원 이상이 들어요. 우리나라는 1인당 연간 3100만 원이고요.
김세연: 사실 국민의 법 감정과는 안 맞죠. 재범률을 낮추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지만, 시행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재민: 독일은 교도소에서 정신 분석을 해줍니다. 전문 심리 치료사가 가서 집단 치료를 해줘요. 심리적인 부분까지 치료하려는 거예요.
김세연: 심리적 재활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그런 치료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충분히 바뀔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 활동이나 심리 치료가 영적인 또는 심리적인 자극과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사례가 얼마나 있을까요? 물론 통계를 낸다면 그런 노력에 대한 효과가 계량화되겠지만,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수 있겠죠.
정재민: 재범률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결국 50대에 범죄를 다시 저지른 사람은 40대에 범죄를 저질렀을 확률이 높다고 할 수 있겠죠. 40대에 저지른 사람은 30대에, 30대에 저지른 사람은 20대에, 10대에,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10대 때 비행을 한 사람이 많은 거예요. 그게 평생 가는 겁니다. 특정 순간에 진짜로 교정을 해줘야 해요. 일찍 할수록 더 좋겠죠. 인격 형성이 완전히 되지 않은 어린 시절에 교육을 잘하고 심리 상담도 그때 할 수 있다면 좋죠. 가정에서 부모가 잘해주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은 가정도 많으니까요. 가장 좋은 건 교도소에 오기 전에 심리 치료를 받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상호 작용 방식이나 심리적 오해, 공감 부족 등을 다 해결해 놓으면 좋겠죠.
김세연: 공감 능력과 소통 능력, 즉 사회적 관계 형성에 대한 훈련 또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가정과 학교일 텐데, 성인이 되기 전에는 친구가 엄청난 영향을 미치겠죠. 아마도 네트워크의 연결을 보면 안 좋은 영향을 주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때 네트워크 전체에 주는 부정적인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겁니다. 사회 전체로 보자면 잠재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까지 이어질 가능성을 최대한 초기로 거슬러 와서 원천 치유하려는 노력이 정말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부모 교육도 강화돼야 하겠죠.
정재민: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법 교육을 안 했는데, 요즘은 많이 하더라고요. 그것처럼 초·중·고부터 심리적인 교육도 실시하면 좋겠습니다.
김세연: 아까 ‘대화로 어떻게 나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가’를 배운다고 하셨는데,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게 민주주의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게 왜 안 되고 있을까요?
학교는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이고, 가정 역시 해체되거나, 입시에 과몰입돼 과부하가 걸린 한국 교육 시스템 때문에 가정에서의 교육도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더해 사회의 파편화, 이혼율 증가 등으로 인해 가족 관계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고, 취약한 환경이 되기가 쉬워졌습니다.
물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하는 사람이 있고, 안정된 환경에서도 건강하지 않은 모습으로 자라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문제를 단순히 환경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적으로 더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 세대의 중요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재민: 부처님이나 예수님도 한 번에 해결할 수 없을 문제인 것 같아요. 결국, 핵심은 대화입니다. 부부간의 갈등도 대화가 잘되지 않아서 생기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대화를 안 하는 집이 많잖아요. 대화의 단절로 가정이 깨지는 경우도 많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대화를 잘할 수 있느냐. 간단한 기술은 아니잖아요. 인성도 있고 성장 배경도 있고. 저도 생각해 보면 대학생 때까지 대화를 잘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주 낮은 수준의 대화를 한 거죠. 지금도 여전히 대화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그때는 대화를 정말 할 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미적분 배우고 공부만 했지, 대화하는 법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하고, 바둑처럼 어떤 말을 하면 다음에 이런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크고, 다른 말을 하면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식의 대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강하게 말하면 당장은 효과가 있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보지 않았죠.
김세연: 공감 능력과 소통 능력을 길러 주는 교육이 영유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가정과 학교에서 부모와 교사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충분히 축적됐다면 발생하지 않을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다시 살펴보자면, 그럼 부모와 교사들은 왜 그런 교육을 충분히 하기 어려웠을까요. 앞선 세대로부터 교육받은 대로 교육을 하는 거죠. 그러나 달라진 세상에서는 기존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터져 나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세대와 다음 세대가 이 문제를 극복하고 치유해야 하는 책임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책임이 부여된 것이고, 그렇다면 다음 세대에는 다른 환경이 조성되도록 할 책임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재민: 저는 독일식이 합리적인 것 같아요. 노르웨이는 시설을 호텔처럼 지어 놓고 호텔 셰프를 불러서 요리해 주는데, 독일은 시설은 좀 허름해도 집단 심리 치료를 하거든요. 그렇다고 럭셔리하게 하는 건 아니에요. 열댓 명 모아 놓고 누가 내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어떻게 비켜 달라고 할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예요.
욕부터 하는 사람도 있고, 여기 내 자리인데 여기에 앉은 무슨 이유가 있을까 하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그 와중에 배우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보면 웃음이 나오는 상황일 수 있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진짜 많은 거예요. 이게 돈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아요. 꼭 정신과 의사가 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 교도관들이 그냥 감옥을 지키는 게 아니라 교정을 한다는 자부심을 다 가지고 있어요. 우리나라 교도관 수가 1만 6000여 명이에요. 이 정도는 충분히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세연: 우리나라 교정 시설에서는 독일 같은 집단 심리 치료를 하지 않죠. 아까 언급하셨듯 국가의 기본 기능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방을 통해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치안을 통해 국가 내에서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해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법질서와 경제 제도를 통해 재산을 지키고, 복지의 기본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일론 머스크와 비벡 라마스와미를 정부효율부(DOGE)의 공동 수장으로 앉혀서 정부의 군살을 걷어 내겠다고 예고하고 있는데,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정부 체계를 설계한다면 교정 인력 배정을 원점에서 논의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개념 설계를 하는 것이라 상세 설계 영역으로 보이는 인원 배정에 대한 논의는 아까 제외했었지만, 이 부분을 잠시 언급하자면 교원 1인당 학생 수처럼 교도관 1인당 적정한 수감자 수가 있겠죠. 그 비(比)를 심리 치료 같은 깊이 있는 케어(care)의 영역까지 가능하도록 조정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학교를 폐교하듯 나중에 수감 시설을 폐쇄할지언정 단기적으로는 수감 시설을 늘리고, 님비 현상으로 새로 짓기는 어렵다면 현 위치에서 증축해서 노르웨이처럼은 아니더라도 아까 말씀하신 대로 시설이 화려하지 않아도 기본 기능에 충실한 교정 행정 시설로 거듭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재민: 근본적으로 학교에서도 공부만 가르칠 게 아니라 집단 심리 치료 같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리를 누가 차지했을 때 어떻게 평화롭게 해결하는가, 이런 교육을 꼭 하면 좋겠어요.
김세연: 앞서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 교육 과정 개편을 다룬 적이 있는데, 시수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교과 이기주의 문제가 논의된 바 있습니다. 심리 치료가 교육 과정에 들어간다면 다른 과목의 시수를 줄여야 하는데, 이게 합의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경로로 질주하고 있고, 사실 이미 무너졌죠. 학교가 학원보다 기능도 떨어져서 기능 부전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스케치 다이얼로그〉를 일대일 대담으로 진행해 왔는데, 교육과 심리 치료 영역이 맞물리면서 더 풍성하게 논의해 볼 여건이 된 것 같습니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논의하면 번뜩이는 부분들이 많이 나올 것 같네요.
정재민: 저는 학교에서 그런 걸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교는 여러 친구가 있는 공간이지만, 집에서는 자기밖에 없잖아요. 여러 친구 사이에서 서로의 욕구가 충돌할 때 어떻게 해결할지,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가 충돌할 때 시민의 양식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가장 중요하죠.
저는 검사, 변호사, 판사도 지금보다 좀 더 집단 심리 치료처럼 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날 세울 필요가 없어요. 검사는 검사의 입장을 부드럽게 말하면 되고, 변호사도, 판사도 마찬가지고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김세연: 재판정 구조를 보면 높은 단에 판사가 앉아 있고, 그 아래에 검사와 변호인이 마주 보는 식입니다. 위계가 확실하죠. 미국 상원과 하원에 행정부가 출석할 때를 보면 여야가 말발굽 형태로 섞여 앉아서 행정부를 같은 방향으로 내려다보게 돼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국회는 여야가 마주 보고 있고, 행정부를 보려면 직각으로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여야를 대립적 구도에 집어넣은 거죠. 정부를 바라볼 때는 자세가 불편해야 하고요. 공간 설계가 인식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재판정의 공간 배치 변경이 역학을 근원적으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변호사님 사무실도 고려를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딱딱한 변호사 사무실 느낌이 없네요.
정재민: 공간 너무 중요하죠. 딱딱하고 사무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은밀한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조도를 좀 낮췄어요. 향도 만들고, 음악도 좀 틀고요. 고객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는 거잖아요. 심적으로 안정을 줄 수 있는 콘셉트로 만들어 봤습니다.
김세연: 재판 역시 대립적이 아니라 지금 이런 소파 세트처럼 반원이나 원형 구조에서 이야기를 하고, 기록하는 사람은 그 앞에 간단한 책상을 놓고 기록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제 녹화한 영상만으로 녹취록을 다 풀게 되는 시대가 곧 될 거라 동시 통역사와 속기사의 일이 빠르게 줄어들 거라고 하는데, 이런 환경이 되면 재판정의 모습도 많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정재민: 그래서 조정은 조정실이라는 별도 공간에서 하는데, 조정실을 좀 더 안락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게 말로는 끝나지 않아요. 특히 돈 걸려 있는 문제들이 그렇죠. 몇억이 걸려 있는데, 좋게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결국 ‘판사님이 결단해 주세요’ 이렇게 되죠.
우리나라의 여러 환경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합의로 끝내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소송으로 가더라도 서로 이야기를 좀 더 원만하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변호사나 검사가 불필요하게 날을 세우고 싸울 필요는 없거든요.
김세연: 아까 우리나라에선 합의가 잘 이뤄지지 않고 항소심까지 가야 결판나는 게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승복하지 않는 마음의 바탕에는 재판 결과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재민: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승복하는 사람도 많아요. 돈이 드는 일이고, 시간이 드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변호사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있는 거죠. 검사도 그렇고요. 승복할 수 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김세연: 탄착점이 흩어져서 판결의 균질성을 잃었다는 부분과 연결되는 내용이네요. 오늘 대담에서 수사와 재판 시스템의 근본적인 문제와 해법, 범죄 예방과 교정 행정의 개선에 대한 아이디어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주제와 생각을 넘나든 대담이었는데, 이제까지 나눈 논의의 요지를 마지막으로 정리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재민: 정리하자면, 수사는 지금처럼 하면 안 됩니다. 더 잘해야 합니다. 더 책임감 있게, 신속하게 해야 합니다. 삼성전자 서비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런 목표를 가지고 국가가 다 해준다는 생각으로 더 적극적으로 해주면 좋겠습니다. 검사의 권한이 옛날보다 확 줄다 보니까 인기도 시들해졌고 기존에 검사로 있던 분들도 많이들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검사의 역할은 비대해진 경찰이 수사하지 못한 걸 보완해 주고 인권 침해를 막아 주는 거예요. 진짜 중요한 역할이죠. 본연의 일을 잘하면 박수를 받을 수 있는데, 그 일이 본연의 일로 정착될 때까지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아요. 법원은 판결이 너무 파편화돼 있어요. 판사들이 피드백을 공유하면서 더 균일화해 나가고, 정확하고 신속한 판결을 하는 데 계속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교정은 우리가 전자 발찌 같은 신기술을 많이 도입하고 활용해서 지금 교도소가 포화 상태예요. 교정 시설 재소자 수용률이 2024년 8월 말 기준으로 124.5퍼센트예요.
김세연: 수용 시설이 너무 과밀해서 혹서기에는 숨쉬기도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죠.
정재민: 에어컨은 못 틀더라도 100퍼센트는 돼야죠. 100퍼센트만 돼도 빡빡하거든요. 그리고 미래를 보고 독일식의 심리 치료를 지금부터라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재범률을 실질적으로 낮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우리는 가석방을 잘 안 해줍니다. 사람들이 엄벌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무슨 가석방이야’ 이러지만, 오히려 갑자기 확 나와 버리면 위험해요. 가석방이라는 중간 단계가 꼭 있어야 해요. 우리는 가석방을 빨리 해주면 난리가 나니까,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에 가석방을 해주는데, 그건 의미가 없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정상적인 상호 작용을 하고 살아가는 연착륙을 해야 합니다.
감옥에 있다가 갑자기 탁 나오면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까지 생겨요. 그래서 가석방 기간이 필요한데, 처벌이 너무 가볍지 않냐 하는 사람이 많죠. 그런데 그건 전자 발찌를 활용하면 돼요. 보호 관찰 제도가 잘돼 있어서 관찰하면 돼요. 대신 통제를 강화해야죠. 경찰서장한테 신고해야 하는데, 더 자주 보고하게 하면 돼요. 이렇게 하면 과밀 수용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어요.
김세연: 그렇다면 교정 행정 인력 중에서 전자 발찌를 상황실에서 모니터링하는 인력, 그리고 가석방 비율을 높이는 동시에 가석방 상태인 사람을 보호 관찰하는 인력을 늘려야 하겠네요. 또 기존 교도관들이 심리 치료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히고, 그 전문성을 가진 분들이 와서 전파할 수도 있겠고요. 이런 조치를 통해 교정 행정의 업그레이드가 이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찰 쪽에는 어떤 개선이 필요할까요?
정재민: 경찰의 가장 큰 역할이 수사인데, 수사 인력을 늘려야죠. 그런데 능력이 부족한 인력은 늘려 봤자 의미가 없어요. 잘하는 사람들이 늘어야죠. 그런데 베테랑들이 지구대로 가버려요. 수사하면서 고소, 고발당해서 시달리기보다는 차라리 야근하는 게 낫다는 거예요. 지구대에서 야근하다가 퇴근하면 마음은 편안하잖아요. 그런데 수사 쪽은 너무 힘들다는 거죠.
김세연: 시스템에 과부하를 일으키는 악성 민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습니다. 형사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은 피해자 입장에서 큰 불행이자 비극이며,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가해자 역시 여러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해자가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 않도록 사회적, 제도적으로 효과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큰 숙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러한 문제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시스템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러한 상황에 노출되면, 시스템의 취약성이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부분, 또는 기능 저하로 인해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가 새로운 국가의 밑그림을 그릴 때 어떤 점을 염두에 둬야 할지에 대해 균형 잡힌 진단을 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추가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정재민: 제가 잘 모르는 부분도 많고, 말씀드린 내용 중 부족하거나 틀린 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범죄에 대해서 사회가 나서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범죄는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개입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범죄가 우리 사회 공동체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범죄의 원인이 기본적으로는 개인의 책임이지만, 동시에 사회 구조의 문제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상처는 범죄로 드러납니다. 범죄의 유형을 보면 우리 사회가 뭘 고쳐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국회에서도 중대한 범죄가 발생하면 법이 바뀌잖아요.
마지막으로, 범죄는 결국 가장 약한 사람이 당합니다. 범죄가 계속 일어난다는 것은 약자와 소수자 보호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범죄는 단순히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 중 하나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본과도 연결된 중요한 사안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범죄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다수 지배의 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소수 의견을 가진 이들도 불이익이나 위협을 받지 않는 공화주의 정신이 결합돼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약자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범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짚어 주신 데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