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연: 〈스케치 다이얼로그〉 네 번째 순서입니다. 이번에는 의료 분야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에서 의사 과학자로 재직 중인 김진현 선생님을 모시고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시간은 건강하게 보내겠지만, 때로는 질병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특히 가벼운 질병이 아니라 큰 수술을 받아야 하거나, 고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의료의 중요성이 훨씬 커집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평가받는 의료 시스템의 혜택을 전 국민이 받아 왔습니다. 우수한 의료 전문가들의 희생으로 지탱되어 온 면도 일부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평가받는 의료 시스템이 최근 잘못된 정책적 판단으로 망가지고 있는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현실은 이러하지만 만약 대한민국 이후에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진다면 우리의 의료 시스템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화두로 오늘 대화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이런 논의에서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은, 기존 시스템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시선이 더 갈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담에서는 백지 상태에서 의료 시스템을 새롭게 그려 보려 합니다. 기존의 문제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되 큰 분야들을 백지 위에 새로 배치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료 기관 내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행위들, 의료 기관을 구성하는 조직, 그리고 정책적으로 건강보험과 의료 수가 체계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 구조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건강보험은 보험 가입자들이 내는 보험료로 운영되는데, 이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진단하지 않을 수 없겠죠. 이 진단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백지에 그린다면 어떤 보험 체계가 필요할지, 이와 연동된 의료 시스템은 어떠해야 할지, 의료 전문가들 ― 즉 의사, 간호사, 의료 기사, 행정직, 그리고 여러 중요한 직군을 포함한 ― 양성 체계는 어떻게 구성되고 운영돼야 할지를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선생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부터 토의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김진현: 현재 대한민국 의료 체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하나만 꼽으라면, 큰 그림 없이 의료 포퓰리즘만 계속 추진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지금의 왜곡된 의료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사실 처음 건강보험을 도입했을 때는 의료의 사회화로 시작했거든요. 전 국민 건강보험을 12년 만에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사회화를 유지하려면 사회주의적인 정책이 계속 있어야 했는데, 중간에 의료 포퓰리즘적인 개입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복잡해졌습니다.
현재 의료 체계는 사회주의적 측면과 자본주의적 측면의 단점들이 합쳐져서 왜곡된 상태에 있습니다. 좋게 보자면 대한민국 국민이 빠르게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의료의 질이 올라갔다는 장점도 있지만, 문제는 이 포퓰리즘적 접근이 너무 지나쳐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연금 문제와도 비슷합니다. 65세 이상 빈곤층 어르신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면 좋겠지만, 미래 세대를 생각하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의료 시스템도 그동안 너무 퍼주는 방식으로 운영돼 왔습니다.
의료의 사회화로 시작했으면 계속 그 방향으로 가야 하고, 자본주의적 접근을 하기로 했다면 그쪽으로 계속 가야 했는데, 지금은 의료의 사회화로 시작했다가 자본주의 체계를 포퓰리즘으로만 계속 넣다 보니까 지금 같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의료 시스템을 만들 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라고 했을 때 저는 조금 더 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세연: 초기에 정책 의도가 사회화였다면 일관성과 정합성을 가진 체계로 나아가야 했을 텐데, 이후에 자본화와 민영화의 요소들이 빠르게 강화되면서 지금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형성됐다고 보시는군요.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문제가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굳이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사회화보다는 자본화 쪽을 택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진현: 사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환자의 의료 욕구에 상관없이 똑같이 일정 수준 이상의 의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국민은 자기가 아플 때 언제든 당연히 의료 기관을 방문할 수 있고, 더 좋은 진료를 더 싸게 받고 싶은 욕구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해서 못살 때에 비해 국민의 니즈가 훨씬 다양해졌거든요. 예전에는 의료 사회화가 어느 정도 맞았지만, 국가가 점점 발전하고 국민 수준이 올라가면서 굉장히 다양한 의료의 니즈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건강보험 하나로만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죠. 더 나은 서비스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기고, 반대로 자신이 낸 돈보다 훨씬 좋은 서비스를 받는 사람도 생기다 보니까 모럴 해저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부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의료의 시장화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결국 의료의 사회화 상황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의료의 사회화 상태라면 환자도 해당 지역 내에 통제돼 있어야 하고 의사도 비급여 같은 영리화를 추구하면 안 되거든요.
이게 의료 사회화의 큰 틀입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이런 요소를 도입해서 세금을 많이 내도 의료를 공짜로 이용할 수는 있지만 아주 질 좋은 서비스는 아니고 죽지 않을 정도의 기본적인 서비스만 받을 수 있습니다. 캐나다도 그렇고요.
그런데 미국은 이런 건 자본주의 정신과 맞지 않다고 해서 더 시장화된 상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지역권을 설정해서 환자들에게 해당 지역의 의료 기관을 가라고 통제한다거나, 의사들에게 비급여 진료를 금지하고 정해진 의료 급여 시스템만 쓰라고 한다면 의료 소비자도 공급자도 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의료 시장화를 특정 영역에서 적절히 도입한 일본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사실 다른 나라들보다 의료의 질이 좀 더 좋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나라가 발전하면서 생기는 더 다양한 니즈를 충족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향 중에 하나를 고르자면 의료 시장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김세연: 캐나다와 유럽 국가들, 특히 영국의 악명 높은 의료 시스템에 관해 여러 사례를 들어 본 기억이 있습니다. 환자로서 경험한 구체적인 사례들이었는데, 몸이 어디가 안 좋아서 진료 예약을 하면 기본적으로 한두 달에서 석 달을 기다려야 했다거나, 응급 처치가 필요한데도 시스템이 빠르게 작동하지 않아서 1~2주가 지나서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는 거죠. 이런 시스템과 비교할 때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의료 접근성이나 신속성 면에서 분명 강점이 있습니다.
물론 한국도 1, 2차 의료 기관을 건너뛰고 소위 ‘빅5(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성모병원)’로 불리는 3차 의료 기관으로 환자들이 초집중되는 기형적인 의료 현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가 갈림길에서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지금처럼 국가 경제력과 국민 삶의 질이 향상된 상황에서 다양한 의료 서비스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공급 체계를 만들어 내는 데 자본화의 길이 더 적합하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김진현: 우리나라는 사회적인 측면과 자본주의적인 측면을 모두 갖춘 의료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 현재 국민들이 이용하는 의료 서비스는 전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매우 훌륭합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결국 두 가지 중 하나를 메인으로 선택해야 하는데, 이제 와서 의료 사회화로 가기에는 큰 문제가 있고, 장기적으로도 의료 시장화를 메인으로 의료보험의 다양화를 통해 내부 경쟁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의료 다양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은 일부 사회주의적인 정책 개입을 통해 통제할 필요가 있겠지만, 큰 방향은 의료의 다양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김세연: 냉전 막바지의 미국과 소련 상황을 보면 예컨대 대표적인 소비재이자 내구재인 자동차만 하더라도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GM, 포드, 크라이슬러는 다양한 색상과 성능과 디자인의 차종을 제공했는데, 소련은 몇 안 되는 국영 자동차 회사들이 선택지가 거의 없는 털털거리는 자동차만 제공했습니다. 그마저도 주문을 하면 몇 년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었죠. 북한 장마당은 통제된 경제에서의 정반대 사례입니다. 배급으로는 제공되지 않는 다양한 물건이 무역을 통해 들어와서 거래되고 있죠. 이런 비유가 선생님이 말씀하신 의료 다양화의 취지와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김진현: 말씀하신 내용이 현재 의료 상황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소련 자동차 예시에 대입하자면 죽지 않을 정도로만 환자를 수술하고 약을 쓴다면 후유증이 훨씬 많이 생기겠죠. 하지만 장기적인 국가의 의료 목표는 단순히 환자를 생존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건강하게 여생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수술도 높은 수준으로 이뤄져야 하고, 합병증이나 기타 부작용도 최소화해야 합니다. 이런 목표는 의료의 사회화 체제 안에서는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가 현재 이 목표를 그나마 달성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막대한 돈을 집어넣기 때문인데, 이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핵심 문제입니다.
국민건강보험은 그대로 유지하되 그 안에 여러 가지 형태의 서비스를 두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을 A/B/C/D/E 다섯 개로 나눠서, A는 돈을 적게 내는 대신 필수적인 부분만 보장받을 수 있고, E는 돈을 많이 내는 대신 여러 가지 비급여까지 보장받게 하는 식입니다. 내는 돈에 따라서 A/B/C/D/E 보험들이 각 의료 기관과 협상하고 계약을 맺기 때문에 내부 경쟁하에서 지금보다 더 유연하게 결정될 수 있습니다.
김세연: 경쟁이란 것이 민간 보험사들끼리의 경쟁이 아니라 국민건강보험 내에서 선택지가 여러 개로 나뉘는 것이었군요. 건강보험 내에서 보장 범위가 다양한 보험이 나오고, 어느 보험에 가입해서 보험료를 얼마를 내고 나중에 보장을 어느 범위로 받을지는 의료 소비자가 결정하는 방식이네요. 지금보다는 소비자의 다양한 수요를 맞춰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나니 ‘경쟁’이라는 표현을 왜 쓰셨는지 알겠습니다. 건강보험이라는 큰 우산은 하나지만 그 안에서 보험 제공자가 여럿 등장해 내부 경쟁을 하게 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경쟁이라고 표현하신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김진현: 사실 의료 민영화를 비판하는 사람 중에 민영화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민영화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의료 기관 설립의 민영화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민간이 의료 기관에 자금을 투입할 수 있지만, 그 수익을 외부로 가져갈 수는 없고 병원 내부에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는 영리 병원이 존재합니다. 병원이 벌어들인 소득을 투자자에게 분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민영화의 한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의료보험의 민영화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모든 국민을 커버하고 있지만,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 2024년 기준으로 6만 9300유로 이상의 고소득자(2003년 이전 민간보험 가입자는 6만 2100유로)는 법정 건강보험 대신 사보험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소득 상위 10~15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건강보험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일부만 대상으로 하고 나머지는 민간 보험에 가입하라고 하는 형태가 의료보험의 민영화입니다.
제가 말하는 의료의 시장화는 전 국민 건강보험은 당연히 지금처럼 유지하면서도, 그 내부에서 1등급부터 5등급까지 5개를 만들어서 납부하는 금액에 따라 보장 범위를 다르게 설정하는 방식입니다. 앞서 언급한 두 민영화의 단점은 건드리지 않고 다르게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김세연: 의료 사회화와 대비되는 의료 시장화는 현재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서도 급여와 비급여로 나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직된 수가 체계에서 의사들은 강도 높은 환경에서 일하면서 과도한 당직 근무나 야간 수술 등으로 개인의 사생활까지 침해받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이 더 높을 뿐만 아니라 기대 소득도 더 높은 비급여 시장을 택하는 의사들이 늘어났습니다.
치과 스케일링과 틀니는 2010년대 초반에 급여화가 됐고, 난임·불임 시술은 저출생 상황에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급여화에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반면 탈모 치료의 급여화는 미용 문제로 보는 시각과 인간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문제로 보는 견해가 대립하기도 했죠.
급여와 비급여의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의료 사회화 기조에서 출발했지만, 시장화된 영역이 급증하면서 맞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만약 시장화를 큰 틀로 선택한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도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처럼 높은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로 연령이나 소득 기준에 따라 지원이 이뤄지기는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많은 사람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거나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의료 다양화에는 이런 부작용도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요?
김진현: 말씀하신 것처럼 미국은 전 국민 의료보험 가입이 법적으로 의무화되어 있지 않아 의료보험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8퍼센트 정도 됩니다. 오바마 행정부 때 일명 ‘오바마 케어(Affordable Care Act·ACA)’를 도입했는데, 보험 미가입자가 계속해서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벌금까지 매기는 내용이 법령에 있었어요. 또 메디케어를 통해서 민간 의료 기관에 정부 돈을 받고 싶으면 정해진 틀에 맞춰 보험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제공하라고 했죠. 그 덕분에 보험이 없는 사람들이 15퍼센트에서 10퍼센트 미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가입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조항을 없애면서 가입률이 정체 상태가 됐어요.
미국에선 보험이 없으면 아예 치료조차 받을 수 없다 보니까, 인간의 기본 권리가 침해받는 수준으로 의료 시장이 자본화돼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방향은 미국처럼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전 국민이 당연히 건강보험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현재 한국의 문제는 하나의 건강보험만 존재해 누구나 다 똑같은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비급여라고 하는 다른 시장이 너무 커지고, 그걸 충당할 실손보험도 비대해지는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국민 건강보험의 틀은 유지하되, 그 안에서 건강보험을 몇 개로 쪼개서 내부에서 경쟁하게 해야 합니다. 현재는 건강보험이 너무 거대해져서 규모의 비경제가 발생하고, 공공 기관이다 보니까 비효율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병원 입장에서도 더 열심히 해서 의료의 질을 높여도 받는 돈은 똑같으니까 굳이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건강보험의 형태가 여러 개로 나뉘고 내부 경쟁이 도입되면 의료 기관끼리 경쟁하게 되고 보험끼리 경쟁하게 돼서 의료 서비스가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김세연: 현재 건강보험공단이 단일 공적 보험사로 존재하며, 이곳에서 보장하지 못하는 부분을 민간 보험사들이 실손보험 형태로 보완하고 있습니다. 의료의 다양화가 이뤄지면 말씀하신 대로 국민건강보험 내에서 여러 보험 상품들이 경쟁하게 되고, 의료 소비자인 국민은 다양한 보험 상품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게 되어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겠습니다. 또 의료 기관들은 여러 보험사와 계약을 맺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이러한 경쟁이 시장의 순기능을 발휘하면서 전체적인 후생이 향상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겠죠.
그러나 시장이 지닌 속성 중에 시장 실패가 있습니다. 경쟁력이 아주 뛰어난 사업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해 시장 독점적 지위에 오를 때 생기는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시장 실패를 정부가 공공재를 제공해 보완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질환의 약물이나 수술 비용, 치료 기간 등 원가가 너무 높아서 의료 기관도, 경쟁 위주의 건강보험도 손대지 않으려고 할 때 정부가 개입해야 하겠죠.
김진현: 시장에서 공급을 못 해주는 부분은 의료의 다양화가 진행되면 공공 의료 기관이 맡아야 합니다. 지금은 민간 의료 기관과 공공 의료 기관 사이에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진료하는 환자나 질환이 다르지 않고, 가격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병원을 세울 때 자금을 민간에서 댔나, 정부에서 댔나 정도입니다. 둘을 구분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정책들을 보면 민간 의료 기관은 공공 의료를 하고 있어도 ‘민간’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공공 의료 기관은 민간에서 하지 않는 중요한 분야를 맡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료의 사회화와 자본화가 이상하게 뒤섞인 상황에서 민간과 공공 의료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공공 기관이 공공 기관으로 있으려면 의료 다양화가 먼저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공공 의료 기관이 맡아야 할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김진현: 예를 들어 흉부외과 수술 중에서 식도암 수술을 민간 의료 기관이 수지가 맞지 않아서 잘 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해 본다면, 그 의료 서비스 공급을 공공 의료 기관이 해야 합니다. 민간에서 식도암 수술을 안 하는 이유는 결국 이 수술을 하는 의사가 적기 때문일 텐데, 공공 의료 기관은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이 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와야겠죠.
사실 이 수술은 높은 비용이 인정돼야 했지만, 시장의 문제였든 정책상의 문제였든 적절한 가격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식도암 수술을 안 하게 되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초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공공 의료 기관에서 의사를 높은 비용으로 고용해 수술을 진행하게 되면, 점차 민간 의료 기관에서도 이런 수술을 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또 공공 의료 기관은 민간에서는 수익성이 낮아 다루지 않는 질병 예방 서비스나 공공 의료 같은 지금 보건소가 하는 일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김세연: 심장 수술이나 뇌 수술 같은 주요 장기 수술은 수술 시간이 10시간 넘게 걸리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런 고난도 수술은 주로 빅5 병원에서 이뤄지고 있죠. 이 병원들이 우리 의료 체계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술이 너무 힘들다 보니까 이같은 필수 의료과나 응급의학과 등에 지원자가 줄고 따라서 이 분야 전문의 배출이 급감하는 위기 상황이 계속 보고되고 있습니다.
빅5 병원은 신경외과나 흉부외과에서 적자를 보면서 고난도 수술을 하고, 그 적자를 장례식장이나 건강검진센터 등을 운영해 보전하는 식으로 비영리 의료 기관으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료 다양화로 선택이 가능해지면 병원들은 적자를 보는 과를 줄이려고 할 것이고, 결국 공공 의료 기관이 현재 빅5 병원이 담당하는 어려운 수술을 거의 다 맡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성형외과, 피부과, 안과 같은 비급여 시장의 주력 과목들이 민간 의료 기관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 나타날 수도 있고요.
처음에는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상호 작용이 일어나 판도가 이렇게 바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상황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장치들이 필요할까요?
김진현: 말씀하신 큰 수술이나 긴 수술이 기피되는 이유는 의사, 간호사, 의료 기사 등 의료 자원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수가가 너무 낮아서 그 수술이나 치료를 기피하는 것이죠. 내부 경쟁을 통해서 수술의 가치를 더 높이 인정해 주면 현재 기피되는 수술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수익성이 좋은 수술도 수익이 줄어들면 공공 의료 기관으로 옮겨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수술이 기피될지는 그 수술에 대한 수가가 얼마나 인정받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비급여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비급여 시술이나 수술, 치료를 많이 할 수 있는 과로 엄청 몰리게 될 겁니다. 민간 의료 기관에 비급여를 지불해 주는 건 우리나라에만 있는 시스템입니다. 다른 나라는 애초 비급여를 허용해 주지 않는 나라가 대부분이에요. 의료의 사회화를 채택한 유럽 나라들은 비급여를 채택하지 않고, 일본과 미국은 비급여를 허용하지만 가격을 의료 기관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게 하거나 혼합 진료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통제합니다. 급여와 비급여 서비스를 한 환자에게 동시에 제공하면, 급여 항목에 대한 비용을 정부가 주지 않는 거죠. 우리나라는 혼합 진료를 허용하고, 비급여 가격도 의료 기관이 정할 수 있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걸 허용해 준 지가 30년이 안 됩니다.
의료의 사회화로 처음에 세팅을 잡아 놨는데, 이게 왜곡이 되면서 결국 이상하게 뒤섞인 형태로 변한 거죠. 비급여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혼합 진료를 금지하고, 급여와 비급여를 함께 제공할 경우 정부 건강보험에서 비용을 지급하지 않는 방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의 왜곡된 의료 체계에 민간 보험도 책임이 있습니다. 2003년 민간 보험이 처음 도입됐을 때 보험사들이 과도한 경쟁을 하면서 손해 보는 계약을 많이 맺었습니다. 이거저거 다 보상해 주다가 이제 경쟁이 대충 끝나니까 이제 와서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민간 보험에만 부담이 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환자가 의료 기관에 방문하면 무조건 정부 돈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핵심적인 부분이 다 급여화돼 있기 때문이에요. 그 청구서가 민간 병원뿐만 아니라 계속 정부 건강보험으로도 오고 있기 때문에 이 틀을 끊어야 어느 정도 안정될 거라고 봅니다. 요약하자면 어떤 시술이 기피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기피되는 수술은 공공 의료 기관에서 담당해야 하고, 확실히 예상되는 비급여 쏠림을 잡으려면 혼합 진료를 금지해야 합니다.
김세연: 혼합 진료의 대표적인 사례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김진현: 현재 가장 많이 언급되는 비급여 치료 중 하나가 도수 치료나 백내장 수술을 할 때 특수한 렌즈를 넣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비급여 치료라는 것이 효과가 없는 치료가 절대 아닙니다. 당연히 효과가 있지만, 비용 대비 효과가 명확하지 않거나 너무 비싸서 건강보험에서 보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비급여 치료입니다.
예를 들어 백내장 수술에서 특수 렌즈를 삽입할 때 렌즈 값은 비급여이지만, 수술 과정에서 의사가 마취를 하고 눈에 항생제를 사용하는 건 다 급여로 묶여 있습니다. 비급여를 함으로써 급여도 같이 나가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환자 입장에서는 모든 비용을 다 민간 보험에서 부담해 주니까 모럴 해저드가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일반 렌즈를 넣어도 만 원, 특수 렌즈를 넣어도 만 원이라면 저 같아도 특수 렌즈를 넣을 것 같거든요.
의료 공급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모럴 해저드를 유발하는 잘못된 짬뽕 같은 체계가 운영되고 있는데, 이제 막아야 할 시기가 됐습니다.
김세연: 최근 건강보험 재정이 급속히 악화하면서 겨우 쌓아 놨던 적립금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습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2028년에 준비금이 고갈될 전망입니다. 급증하는 의료비 때문에 대표적인 준조세인 건강보험료가 빠르게 오르고 있는데, 아마 조금 더 지나면 조세 저항이 더 강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당장 병원 치료를 못 받는 상황이 올 수 있어서 가입자들이 돈을 내고 있지만, 머지않아 한계점에 도달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현재 체계와 달리,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의료 시장화가 이뤄진다면 의료 기관 간, 보험 상품 간 건전한 경쟁을 통해 시장 경제의 핵심 메커니즘인 가격이 왜곡되지 않고 형성되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소비자는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고, 대응하기 어려운 유형의 진료나 수술은 공공 의료 기관이 맡는 구조가 가장 바람직해 보입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가격 결정이 핵심 요소입니다.
의료의 사회화 기조에서 단일 공보험이 책정한 의료 수가 체계는 획일적이고 경직돼 있어서 왜곡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비급여 시장이 급속도로 커졌습니다. 최근 10~20년간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의료 수가 체계에 대해서도 한번 짚어 봐야 할 텐데요, 가격이 탄력적이고 역동적으로 결정되는 구조가 만들어질 때 유의할 점을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진현: 지금은 단일한 국민건강보험 하나만 있어서 그 보험에서 예를 들어 백내장 수술의 수가를 100만 원으로 책정했다면 실제 수술 원가가 150만 원이라도 100만 원만 주니까 의료 기관은 50만 원을 손해 보게 됩니다. 반대로 원가가 50만 원이라도 100만 원을 주기로 했으니까 50만 원 이익을 보는 구조입니다. 원가와 수가가 일치하는 수술도 있지만, 손해를 보는 수술도 있고 이익을 보는 수술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가는 고정되어 있어서 긴 수술이나 어려운 수술, 예를 들어 뇌 수술이나 흉부외과 쪽 수술은 대부분 원가에 미치지 못해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의료 자원이 덜 소비되는 수술 쪽에는 어느 정도 원가 이상의 돈을 받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유연하게 가격이 결정되는 경쟁 상황이면 어느 정도 균형점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현실은 상하방이 매우 견고하게 막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사들이 힘들고 돈이 안 되는 수술보다 경증 쪽으로 이동하는 상황입니다.
수가 체계가 왜곡된 데에는 잘못된 시스템을 만든 정부의 책임이 당연히 큽니다. 그런데 사실 의사 쪽도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정부가 정말 힘든 수술, 예를 들어 뇌 수술의 수가를 올려 주려고 해도, 건강보험 재정이 고정돼 있으니까 한쪽을 올리면 다른 쪽은 덜 올리거나 낮춰야 합니다. 그런데 의료 공급자 대부분이 경증을 다루는 쪽에 있어서 이런 변화를 별로 원하지 않습니다. 시스템도 왜곡돼 있는 데다가, 고치려고 해도 반대가 심해서 잘 고쳐지지 않는 상황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아까 얘기가 나왔던 탈모 급여화나 이전 정부에서 추진했던 MRI 급여화 같은 정책들이 있었는데, 저는 이것들을 의료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급여의 급여화’로 정의할 수 있는데, 이걸 제대로 하려면 건강보험료를 크게 올려서 모든 항목을 커버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험료는 올리지 않고 보장 범위만 확대하는 형태로 되다 보니까 건강보험 재정이 빠르게 소진되는 것입니다.
비급여의 급여화는 국민들의 보장률을 높이는 것이 목표인데, 지금 방식으로는 재정 소진만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대신 저소득층이 최소한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이미 본인 부담금 상한제와 재난적 의료비 지원 제도가 있습니다. 본인 부담금 상한제는 환자가 일정 금액 이상을 의료비로 지출하면 1년 뒤 건보에서 돌려주는 제도입니다. 재난적 의료비 지원은 극빈층이 돈이 없어서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의료비를 주는 제도입니다.
이런 제도를 더 두껍게 하면 저소득층이 조금 더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반면 탈모나 MRI를 전 국민 대상으로 급여화를 하게 되면 효과는 크지 않으면서 돈만 많이 나가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비급여의 급여화는 의료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돈을 쓸 거면 저소득층 지원에 쓰는 것이 정책 방향성이 돼야 한다고 봅니다.
김세연: 생애 총 기대 소득과 생애를 관통하는 삶의 질을 결정하는 두 가지 요소를 꼽는다면 의료와 교육입니다. 이 두 요소는 지방 소멸 문제에도 핵심적인 요인으로 등장합니다. 의료 분야 논의를 하다 보니 교육 분야와 비슷한 이슈가 나타납니다. 바로 민영화에 대한 거부 정서입니다. 교육에서는 자사고나 특목고가 귀족 학교라는 비판이 나오는데, 의료에서는 빅5 병원이 전 국민에게 열려 있어서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 거죠.
다만 교육에서는 평준화 이후 예외적인 부분으로 자사고, 특목고 같은 형태가 존재하게 됐는데, 의료에서는 아직 그런 예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국민 정서와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인 것이고, 송도나 제주에도 영리 의료 기관이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겠죠.
건강보험 안에서 보험 상품의 다양화가 이뤄지면 의료 소비자, 즉 국민의 선택지가 넓어질 것이란 점은 자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보험 상품의 다양화가 한국 사회 일각에서 의료 민영화에 대한 비판의 논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내는 돈에 따라 보장 범위가 달라지면, 어떤 사람은 필수 의료만 제공받고 또 어떤 사람은 더 두꺼운 의료 보장을 받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존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백지에서 새로운 나라를 설계할 때도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의 난도가 상당히 높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또 하나는 소득 재분배 기능입니다. 국민연금은 평균 소득 월액을 A값으로 잡아서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을수록 소득 대체율이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건강보험은 소득에 따른 보험료 차이로 인해 소득 재분배 기능이 연금보다 훨씬 큽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건강보험은 조세 저항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데, 선택지가 다양해지면 그런 압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제도 자체를 합의하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진현: 최저 보험료를 내고 가장 적은 보장을 받는 사람들에게 긴급한 수술을 위주로 보장을 해준다고 해도 틈새는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거나, 치료받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케이스를 최소화하려면 앞서 언급한 재난적 의료비 지원이나 본인 부담금 상한제를 더 강화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에서 지원하지 않는 비급여 A라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거나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상황에서, 돈이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지원 시스템을 더 촘촘하게 구축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원 제도를 강화해도 여전히 돈이 없어서 치료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 것입니다.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어느 방향을 선택할지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직장 가입자는 월 급여의 7.09퍼센트를 사업주와 절반씩 나눠 내고 있는데, OECD 국가는 대부분 15퍼센트 가까이 냅니다. 모든 국민이 똑같은 의료를 제공받으려면 지금 내는 돈의 두 배를 내야 하는데, 보험료 인상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일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다양한 시스템을 만들어서 내부 경쟁을 통해 가격을 통제할지를 국민에게 터놓고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에 정답은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의료의 시장화를 선택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김세연: 의료 시장화를 도입한다고 할 때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가격인데, 지금은 경직되고 획일적으로 의료 수가가 책정되어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럼 새로운 체제하에서 의료 수가는 어떻게 결정돼야 할까요? 이 대담이 전문가 아닌 일반 독자도 대상으로 하는 만큼 포괄 수가제와 행위별 수가제의 차이부터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진현: 우리나라는 행위별 수가제와 포괄 수가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신포괄 수가제는 시범 사업 형태). 포괄 수가제는 소비된 의료 서비스의 양에 상관없이 특정 질병에 대해 정해진 금액을 기준으로 의료비를 책정하는 방식입니다. 맹장염 수술(충수돌기 절제술), 제왕절개, 백내장 수술 등 7개 진단이 포함됩니다. 해당 질환에 대한 급여액은 소비된 의료 자원의 비용을 산출하고, 이후 거칠게 표현하면 평균화 과정을 거칩니다. 즉, 의료 기관 입장에서는 한 환자에게 최소한의 자원을 투입해야 이익이 많이 남는 구조입니다.
행위별 수가는 의료 행위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의 양, 의료 자원의 비용 등을 고려한 ‘상대 가치 점수’에 점수당 단가인 ‘환산 지수’를 곱해서 최종 값을 도출하는 방식입니다(조정 계수 별개). 각 의료 행위에 점수를 매긴 상대 가치 점수는 5~10년마다 한 번씩 조정되며(현재 3차 상대 가치 점수 개정), 환산 지수는 매년 계약을 통해 조정됩니다. 이 환산 지수를 결정하는 곳이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건정심)입니다.
환산 지수는 모든 수술에 대해 똑같이 올리는 것이라 상대 가치 점수 부분이 문제로 지적됩니다. 여러 원가를 반영해서 결정했다고 하지만 점수 자체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힘든 수술은 계속해서 원가도 못 받고 있고, 비교적 덜 힘든 수술은 계속해서 더 받는 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각 의료 행위별 점수를 잘 조절해야 하는데, A/B/C/D/E 5가지 건강보험이 나오면 각자의 계산 방법이 나올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뇌 수술에 100만 원을 주겠다, 200만 원을 주겠다, 하는 식이 되면 의료 기관은 당연히 더 높은 쪽으로 몰리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품에서는 보험 가입자들이 그만큼 더 많은 돈을 내야 하니까 가입자가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가격과 원가와 비용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지금은 환산 지수만으로 다 같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문제가 있지만, 각자 계약하는 형태가 되면 보험별로 행위별 가격이 달라질 수 있어서 훨씬 더 유연하게 가격이 조정돼 결국 균형이 맞춰질 가능성이 커집니다.
김세연: 공공 건강보험이 5개의 다양한 보험 상품을 내놓고 서로 경쟁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사례를 하나 들어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때는 환산 지수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특정 수술을 받는 환자가 A/B/C/D/E 보험 상품 중에서 어떤 상품을 택하느냐에 따라 수가가 달라질 수 있을 텐데, 이 경우 진료 수가를 산출하는 건정심이 5개가 되는 건 아니겠죠? 건정심 없이도 수가가 정해질 수 있을 테고요.
김진현: 지금 건정심이 하는 역할은 환산 지수를 매년 결정하는 것인데, 사실 인플레이션을 조절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각 의료 행위에 따라 차별적으로 가격을 올리거나 내리는 게 아니라, 모든 의료 행위에 동일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왜곡된 수가 체계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건정심이 전체 수가를 일괄적으로 정하는 대신, 건강보험 내부의 5가지 보험이 각자 자체적으로 원가를 계산해서 “우리는 이만큼의 돈을 줄 거야” 하고 결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료 기관은 각 보험과의 계약 여부를 선택하는 겁니다. 의료 기관이 더 높은 수익을 주는 보험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구조가 돼야, 가격이 유연하게 결정될 수 있습니다.
환산 지수는 최소한과 최대한의 수가 수준을 결정하고, 매년 올라가는 인플레이션을 조정하는 정도만 해야 합니다. 복잡다단한 의료 서비스의 형태를 정부가 위원회 하나를 두고 결정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건정심은 상·하단의 캡과 인플레이션 설정만 하고 그 외에는 건강보험 내부에서 알아서 계약과 경쟁을 통해 결정되게 해야 합니다.
김세연: 그러한 시스템에서 하나의 의료 기관이 A/B/C/D/E라는 보험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강보험의 세부 단위들과 의료 행위별로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까? 예컨대 백내장 수술은 A와 계약을 하고, 위암 수술은 B와 계약을 하는 식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의료 행위에 대해 한 곳과만 계약을 하는 것인지요?
김진현: 말씀하신 것 중에 전자입니다. 예를 들어 A 보험과 B 보험이 백내장과 위암 수술을 둘 다 커버한다고 가정할 때, 의료 기관이 두 보험 모두와 계약을 맺으면 A와 B 보험 가입 환자 모두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가가 달라서 A 보험 환자가 오면 의료 기관은 적은 수익을 얻고, B 보험 환자가 오면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보험과 계약을 할지는 의료 기관이 정하면 됩니다. 모든 보험과 계약할 수도 있고, 한두 개만 선택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하나 이상의 보험과는 계약을 맺어야 하고요.
의료 기관이 A 보험에 가입한 위암 환자를 통해서 손해를 보더라도 A 보험 환자를 받음으로써 다른 이득을 볼 수 있다고 판단하면 A 보험과 B 보험을 모두 계약하는 겁니다. 반면 A 보험에 가입한 환자는 받지 않겠다면 B 보험과만 계약하면 됩니다. 병원이 수지 타산에 맞게 계약하면 됩니다.
만약 이윤이 적게 남아도 환자를 많이 보겠다면 A 보험과 계약을 하겠죠. 반대로 고급 의료 서비스를 원하는 환자들만 보기를 원한다면 가장 높은 단계의 E 보험과 계약을 하는 겁니다. A/B/C/D/E 중 최소한 하나는 계약을 해야 하지만, 어디와 할지, 또 몇 곳과 계약을 할지는 의료 기관이 알아서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보험 사이에서도 더 많은 의료 기관과 계약할 수 있는 유인이 있어야 내부 경쟁의 취지에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고비용 고가격의 부티크 형태의 병원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고, 반대로 많은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병원, 또 종합 서비스를 전부 제공하는 병원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 다양화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하셨는데, 의료 공급자들이 더 다양해지고 더 세분화한 서비스가 이뤄질 수 있는 체계라는 차원에서 시장화를 말씀하셨다는 취지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제까지 의료비의 가격 결정 메커니즘이 어떻게 되는지는 살펴봤습니다. 수요와 공급, 그리고 둘 사이의 매개자로서의 보험사, 피보험자까지 있는 전체 체계를 한번 짚어 봤습니다. 그런데 미래 국가의 설계도를 그릴 때 핵심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기술 진보입니다. 이 요소를 빼놓으면 미래의 제도를 설계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기존의 시스템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교육, 행정,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구 급감과 더불어 AI의 특이점 도래, 즉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일반 인공 지능)의 출현과 같은 전에 없던 변수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과거 농경 시대에 증기 기관이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방식의 의사 결정이 무용지물이 되었듯, 이제는 의료에 새로운 기술 요소를 어떻게 들여올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기술이 천차만별로 다양하고 깊이나 규모의 차이가 있을 텐데, 핵심적인 두 가지만 다뤄 보겠습니다.
먼저, AI가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AI가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은 이후엔 AI가 판단한 것을 인간이 사후 모니터링 정도만 하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수술 분야에서도 머지 않은 미래에 손떨림이 없는 로봇이 인간보다 더 정교하게 수술을 할 수도 있겠죠. AI와 로봇이 판단, 시술, 수술에서 인간을 보조하거나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했을 때 의료 시스템, 특히 건강보험에서 AI와 로봇의 도입을 어떻게 고려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건정심이 수가 결정을 독점하고 있는데, 다양한 보험이 공급되는 새로운 건강보험 체계에서 이런 기술 요소를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까요?
또 하나는 바이오 신약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mRNA 백신이 처음 시도됐고, 최근에는 다양한 RNA 치료제들이 속속 시도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근본적인 유전자 치료도 가능해지겠죠. 올해 노벨 화학상도 구글 딥마인드에서 알파폴드를 개발한 연구자들이 받았습니다. 단백질에 대한 이해와 설계, 합성 단계까지 더 깊이 들어가면 혁신적인 신약이 훨씬 더 빠르고 다양하게 개발되고 공급될 텐데, 기존 시스템이 이 속도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행위별 수가 논의로 돌아가자면 새로운 행위들이 빠르게 늘어날 것 같거든요.
새로운 의료 행위의 신설, 수가의 변동, 여기에 원가 혁신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존에는 인간 의사 서너 명이 와야 하는 수술이었는데, 인간 의사 한 명이 로봇과 함께 충분히 수술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수술의 수가가 확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된 상황 속에서는 어떤 고려가 필요할까요?
김진현: 지난해 〈란셋 디지털 헬스(Lancet Digital Health)〉라는 의학 저널에 AI의 유방 검진 영상 분석에 대한 연구가 실렸습니다. 인간 의사 두 명인 경우와 인간 의사 한 명이 AI 영상 분석 솔루션 ‘루닛’을 활용한 경우에 따른 유방 촬영술 분석 차이에 대한 논문인데, 수검자 1000명당 암 발견율이 인간 의사 한 명과 루닛을 결합한 팀이 4.7건, 인간 의사 두 명은 4.5건으로 나타났고, 통계적 유의성도 확인됐습니다. AI를 사용한 인간 의사 한 명이 조금 더 잘 본다는 거죠.
김세연: 이미 몇 년 전에 AI가 안과에서 난도가 높다고 하는 녹내장의 진단 오진율에서 인간 안과 의사를 큰 차이로 앞질렀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죠.
김진현: 결국 영상의학 분야는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크고, 장기적으로는 다른 의료 분야에도 AI가 도입될 것 같습니다. 의료 효율성이 올라가니까 그만큼 의료 인력이 덜 필요해지겠죠. 의료 인력 수급을 제대로 파악해서 줄일 땐 줄이고 늘릴 땐 늘려야지 계속 고정된 상태로 가면 의료 공급 과잉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AI 기술을 의료 수가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입니다. 우리나라 수가 체계에서는 급여든 비급여든 여기에 들어오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기술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일단 보험 체계 안에 들어와야 쓸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그럼, 비용을 어떻게 할지가 문제일 텐데, 처음에는 인간 의사의 판독료와 비슷한 수준으로 책정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료 기관 입장에서 인간 의사를 고용하는 것보다 AI 판독 기능을 도입하는 게 돈이 훨씬 적게 든다면 전문의 대신 AI가 대체하는 비중이 커지겠죠. 그럼 의료 기관에 그만큼 이익이 남을 텐데, 건강보험이 이를 감지하고 AI 판독료를 낮추게 되면 의료 기관은 선택을 해야겠죠. 너무 낮게 책정됐다면 그 보험과는 계약을 안 하는 거고, 적당히 낮췄다면 이익이 좀 줄어도 계속할 수 있겠죠. 이 과정에서 가격의 균형이 맞춰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시스템에서는 어쨌든 보험 체계 안에 들어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시술이나 의약품이 보험에 들어오면 신의료 기술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의료 기관이 수익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도록 비용을 높이 잡아 줍니다. 의료 기관이 더 많이 쓰도록 유도하는 거죠.
신약 역시 효과가 매우 뛰어나고 대체할 다른 방법이 없다면,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서 허가 절차를 간소화해 빠르게 도입하기도 합니다. 대신 ‘리스크 셰어링’이라고 해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의 비용을 제약 회사와 정부가 분담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의료 문화가 다소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 새로운 의료가 나왔을 때 도입하게 하는 유인이 없으면 도입이 더딜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급여 비용을 높게 잡아 줘야 의료 기관과 의료진이 더 잘 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세연: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기술 혁신으로 의료 원가 혁신이 발생할 때 그로 인한 차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의사 두 명이 할 일을 의사 한 명과 AI 솔루션이 협업해서 처리할 때 발생하는 이익을 의료 기관이 가져가게 할지, 아니면 낮춰진 수가를 통해 보험료를 내려서 소비자에게 혜택을 줄지의 문제입니다. 이 균형점은 보험사의 수가 체계가 유연하게 움직이며 결정될 수 있을 텐데, 이런 가격 메커니즘을 통해 기술 진보에 따른 소비자의 편익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의사 정원을 추계하고 결정할 때 기술 발전을 주요 요소로 편입해야 합니다. 아울러 정원 논의 과정에 과학 기술 발전의 양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내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 참여해야 더 정확한 예측을 바탕으로 의사 정원을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술의 요소에서 의료 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식약처는 신약뿐만 아니라 의료 기기도 관장하죠. 또 논란이 있습니다만 원격 의료 같은 혁신적 기술도 빠르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의료를 헬스케어(healthcare)라고 하지만 실은 식케어(sickcare)다.” 아프기 전에 아프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면 전체 의료 비용이 훨씬 줄어들 텐데, 지금은 병에 걸린 뒤에 치료를 시작하니까 개개인의 고통이나 사회 전체의 비용을 훨씬 키울 수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입니다.
국민건강검진을 1~2년에 한 번씩 받도록 해서 암 조기 발견이 많이 되고 덕분에 암 완치율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상시적이고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헬스케어가 충분히 제공될 수 있는 환경이 됐습니다. 이런 영역에서 의료 기관과 건강보험의 역할은 어떤 것이 될까요?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이 나와도 보수적인 의사 결정 구조 때문에 도입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식약처에서 의료 기기 인가를 받았지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서 수가 인정을 안 해줘서 의료 현장에서 쓰이지 못하고 사장되는 사례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김진현: 그 문제는 심평원, 식약처, 보건복지부, 건강보험공단 등 한 기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의료 시스템 전체가 관료화되어 있고, 의료 자체가 보수적이기도 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보니 새로운 기술이나 기법을 도입할 때 잘못하면 큰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을 고려한다 해도 느린 행정 시스템은 해결해야 할 부분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신기술이 사장되거나, 해외 기업이 한국 시장에는 약을 출시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심평원을 두 개로 나눠 서로 경쟁하게 해서 더 빠르게 처리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신의료 기술이나 신약 도입에 있어서 아까 말씀드린 리스크 셰어링 방식을 더욱 확대해야 합니다.
원격 의료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저는 원격 의료 자체는 찬성하지만 대형 병원에서 원격 의료를 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대형 병원은 중증 환자를 주로 봐야 하는 역할이 있는데, 원격 의료를 한다는 건 경증 환자를 주로 보겠다는 의미거든요. 원격 의료는 1차 의료 기관이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성은 당연히 올라갈 겁니다. 환자 입장에서도 시간적 이점이 크고, 병원에 못 가는 사이의 질병 진행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원격 의료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이니까 수가도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돼야 합니다. 환자가 계속 원격 의료만을 통해서 약을 받는 경우 진단이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본인 부담금을 조금 높여 대면 진료를 장려해야 합니다. 원격 의료는 보조적 수단으로 급할 때만 사용하고, 메인은 대면 진료가 되어야 최고의 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질병 예방 측면에서는 인센티브 체계가 필요합니다. 해외에서는 설탕세나 비만세처럼 금전적인 장치를 도입해 예방 효과를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강검진이 잘 이뤄지고 있지만, 비용 대비 효과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예방 서비스 태스크 포스(United States Preventive Services Task Force·USPSTF)는 갑상선 기능 검사가 비용 효과성이 부족하다고 결론짓고 하지 않을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포퓰리즘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면이 있습니다.
예방을 강화하려면 건강검진 외에도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인센티브를 줘야 합니다. 세금 같은 건 페널티에 가까운데, 인센티브 개념으로 환자에게 줄 수 있는 게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건강 계좌 같은 제도를 도입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상태여서 의료 기관을 이용하지 않으면, 건강보험료의 일부를 적립해 줍니다. 그 돈을 인출할 수는 없고 나중에 필요할 때 의료비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싱가포르에서 이미 도입한 시스템인데, 우리나라도 이런 금전적 인센티브를 도입해야 예방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세연: 말씀하신 내용은 일종의 환급제인데, 인출의 자유는 제한하는 방식이네요. 원격 의료가 대형 병원에 집중되는 것은 문제라고 하신 점은 충분히 이해되는데, 원격 진료와 원격 의료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2019년에 5G가 나오면서 구급차 안에서도 원격으로 고해상도 데이터를 원활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구현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계는 남아 있겠죠. 의사와 환자 간의 일반적인 문진에는 어려움이 없겠지만 가령 피부에 나타난 병변을 봐야 하는 경우, 육안과는 달리 카메라나 디스플레이에서 색상 왜곡에서 오는 오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원격 진료 말고 원격 의료는 상시 모니터링이 가능합니다. 내 바이탈 사인 또는 그 외 추가적인 건강 지표를 내 주치의나 주치의가 속한 의료 기관에서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을 도입할 수도 있겠죠. 물론 의료 정보는 개인 정보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정보에 해당해 개인 정보 보호와 활용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많습니다. 또 다른 굵직한 토의 거리여서 오늘 그 영역까지 넘어가지는 않겠습니다.
만약 이런 상시 모니터링 시스템이 구현된다면 보험사까지 연계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마이크로니들을 이용해 혈당을 실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당뇨가 오기 전에 식습관에 대한 실시간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계속 탄수화물을 많이 섭취해서 혈당 스파이크가 자주 발생하면 보험료가 올라가는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겠죠. 반대로 심혈 관계 질환 예방을 위해 유산소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면, 예컨대 일정 심박수를 일주일에 세 번 30분간 유지하면 보험료를 내려 주는 겁니다. 물론 이 데이터는 신뢰성이 높고 조작할 수 없어야겠죠.
또 숙면 여부 같은 요소도 모니터링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민감한 개인 정보를 어디까지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법적 수용입니다. 이러한 기술적인 요소들은 이미 기술적으로 구현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지만, 실제로 헬스케어 시스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국가의 헬스케어 시스템을 논의할 때는 이런 기술적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고 보는데, 선생님께서는 기술 기반의 헬스케어 시스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진현: 법적 문제를 차치하고 기술적, 건강적 측면만을 고려했을 때, 저도 이런 시스템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생각나는 예시가 있는데, 내비게이션 앱에서 운전 습관에 따라 운전 점수를 매기고, 이를 자동차 보험료와 연동해서 안전하게 운전하면 보험료를 낮춰 주는 시스템이 있더라고요.
건강 측면에서도 데이터 수집이 중요한데, 특정 장치를 착용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데이터가 수집되면 충분히 점수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혈당 스파이크 횟수나 평균 혈당 수준만 측정해도 점수를 매길 수 있죠. 사실 꼭 AI가 도입되지 않더라도 이런 데이터를 통해 충분히 관리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봤던 회사 중 하나는, 자가 호흡이 어려운 환자의 산소 공급량을 자동으로 조절해 주는 AI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의사가 검사 결과 수치를 보고 맞춰 줘야 했는데, 환자가 너무 많아지면 컨트롤이 안 되니까 AI를 도입해서 이걸 자동 조절해 최선의 결과를 내겠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도 혈압, 맥박, 혈당 같은 지표를 점수화해서, 성인성 질환이 발생할 위험도를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위험도가 높다면 점수가 낮아지고, 반대로 잘 관리하고 있으면 점수가 높아지고, 이 점수를 보험료와 연동해 건강 관리 상태에 따라 보험료가 달라지는 시스템을 도입하면, 충분히 예방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세연: 이 방향으로 정책이나 서비스가 나아갈 때 가장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 또는 직역은 아마 의료계와 제약업계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다른 차원의 논쟁이 될 수 있겠습니다만 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건강검진이 보편화하면서 그렇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 암 발병률이나 조기 진단으로 인한 5년 생존율의 급격한 상승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 유형의 암들이 속속 정복되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만약 1년에 한 번 받는 건강검진 대신에 실시간 상시 모니터링이 가능해진다면, 많은 질환을 예방하고 조기에 발견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데이터 양은 크게 늘겠지만, 다행히 컴퓨팅 파워와 저장 용량의 급속한 발전 덕분에 이 모든 데이터를 처리하고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술의 발전 속도를 고려할 때 22세기가 오기 전에 충분히 구현 가능한 사회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진현: 사실 기술적인 면에서는 말씀하신 대로 이미 가능할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 법적 문제나 개인 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 때문에 도입이 더딘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 주제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실제 효과를 보려면 장기간의 데이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잠깐 하루 이틀만 측정한다고 해서 장기 추세를 예측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런 데이터를 얻으려면 뭔가를 몸에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데, 일반 국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조금 있습니다.
김세연: 그래서 그 데이터가 건강보험료와 연동된다면 보험료를 줄이는 등의 인센티브가 생길 수 있겠죠. 또 사람이 피드백을 받게 되면 자신의 행동을 바꾸려는 동기가 생기는데, 꼭 금전적 보상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건강이 악화하지 않거나 향상되고 있다는 사실을 피드백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피드백이 없으면 건강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 교정으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겠죠. 피드백 시스템이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김진현: 몇몇 연구 논문을 봐도 금전적 인센티브가 없으면 효과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하다는 결론이 많습니다. 그래서 행동 변화를 유도하려면 금전적 인센티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이라는 건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와닿는 거라서 건강 습관을 점수화해 건강보험료를 낮추는 방식으로 제공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평생 건강하게 살면 그만큼 건강보험료에서 지출되는 비용이 줄어드니까 무조건 퍼주는 제도라고 할 수도 없고요.
김세연: 영양 섭취, 수면의 질, 심혈 관계 같은 순환 문제 외에도, 근육의 유연성과 근육량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근육 감소로 인한 골절이 생애 마지막 단계에서 의료비 급증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근육의 유연성과 근육량을 계량화, 지표화해서 관리할 수 있다면 요양 병원에 누워 몇 달 몇 년을 보내며 급격한 삶의 질 저하를 경험하는 어르신이나 응급실에서 소통이 안 되는 상태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국민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 것 같습니다.
김진현: 최근에 혈당 다이어트라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패치를 통해 음식을 먹고 난 후 혈당을 확인하고 혈당 스파이크가 발생하면 바로 운동하는 방식이라고 하더군요. 젊었을 때부터 이런 관리를 지속하면 장기적으로 당뇨를 포함한 다양한 질병의 위험을 줄일 수 있겠죠
정신과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입니다. 즉각적인 개입과 피드백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생활 습관에서도 마찬가지로, 지금 먹은 것이 문제가 있다는 식의 즉각적인 피드백을 주고, 바로 걷거나 운동하라는 지침을 주는 것이 건강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적절한 예방 시스템은 노령층의 건강과 보험 재정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노인 장기 요양은 현재는 문제가 크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문제가 커질 것입니다. 자식들은 일해야 하고, 그렇다고 부모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으니까 요양 시설에 보내는 경우가 많아질 텐데, 그 비용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직장 가입자의 건강보험료는 월 소득의 7.09퍼센트인데, 건강보험료의 12.95퍼센트를 장기요양보험료로 내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건강보험료뿐만 아니라 장기요양보험료도 크게 증가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 식습관, 운동 습관, 생활 습관을 피드백해 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지금까지 의료에 기술 요소를 어떻게 들여올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눴습니다. 다음으로 논의하고 싶은 부분은 의료 인력의 양성과 의료 기관의 운영에 관한 부분입니다. 역시 백지에서 새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의견 부탁드립니다.
김진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갈등이 심한 부분은 의료 인력 중에 특히 의사 인력 문제입니다. 사실 의료 시스템 내에 의료 관리, 보험 제도, 전달 체계 등이 있고, 그중 하나가 의료 인력이고 그중 하나가 의사인데, 여기에 지나치게 집중되고 있어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그만큼 더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사 수가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과별로 전문의가 얼마나 필요한지, 어떻게 교육할지 사실 체계적인 연구나 계획이 거의 없습니다. 연구가 있어도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의사 수 증감은 주로 이익 단체들과의 협상이나 포퓰리즘적인 측면에서 결정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계획이나 예측에 기반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영삼 정부 때는 시혜식으로 지방에 의대 신설을 나눠주기도 했고, 2000년에 의약 분업으로 인한 의료계 파업 이후에는 의대 정원을 줄였는데, 이런 결정은 국가의 의료 수요나 고령화 같은 장기적인 전망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타협과 이해관계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이로 인해 의료 인력 수급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의료 인력 수급에 관한 문제는 정답이 없어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더 공신력이 있고 권한을 가진 위원회를 구성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5년 단위 또는 10년 단위로 필요한 의사 수를 예측하고, 그에 맞춰 의사를 더 뽑거나 덜 뽑아야 합니다.
전문의가 얼마나 필요할지도 생각해야 하는데, 이번에 의대 정원을 1500명 늘릴 때 가장 많이 나왔던 이야기가 소아과 오픈런 문제였습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는데, 2000년부터 현재까지 소아 한 명당 소아과 전문의 수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왜 생기는지 원인을 찾지 않고 단지 소아과 오픈런 현상이 있으니까 무조건 소아과 전문의를 늘려야겠다고 하는 거죠.
우리나라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한의사를 제외하면 2.1명입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의료체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2.7명)이나 일본(2.6명)보다 적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정도는 돼야 의료 체계를 유지할 수 있어서 증원 자체가 불필요한 건 아니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련의 질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수련이 잘되고 있는 미국의 경우를 보면 예를 들어 보통 맹장 수술이라고 하는 충수돌기 절제술의 수련을 평가할 때, 몇 번 이상 교수와 같이 수술실에 들어가서 옆에서 수술 어시스트를 하면서 어떻게 하는지 배우고, 이후에는 슈퍼바이저가 있는 상태에서 혼자 수술을 합니다. 그때도 이 전공의가 배를 정확하게 잘 갈랐는지, 또 충수돌기를 잘 떼서 비닐(수술용 엔도백)에 잘 담았는지, 그다음에 그걸 잘 뺐는지, 각각 평가 항목이 있습니다.
이런 항목들에서 다 어느 정도 점수 이상이 되면 그다음부터 혼자서 수술하는 시스템인데, 우리나라는 그런 교육 과정이 없습니다. 어떤 학회는 다른 학회 것 그냥 그대로 가져다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하는 데도 있어요. 사실 정신과 정도만 해도 커리큘럼이 어느 정도 되어 있는 편인데, 저만 해도 전문의가 됐을 때 혼자서 환자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외과 쪽은 특히 더하죠. 4~5년 전에 설문 조사를 했는데, 전공의들한테 전문의가 됐을 때 혼자 독립적인 진료를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더니 절반 이상이 “혼자 못 한다”라고 응답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전공의 교육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네가 할 여러 잡무를 다 처리하고 알아서 배워라, 하는 형태가 계속 도제식으로 이어져 오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퀄리티 컨트롤이 안 되는 상태에서 전문의가 계속 배출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의사 사회와 학회에서 뼈아프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에요.
물론 정부도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OECD 국가들은 전공의 수련 커리큘럼 개발을 정부가 지원합니다. 미국조차도 전공의 수련에 예산을 지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의사에게 돈을 지원한다는 것 자체에 국민적 반감이 있어서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학 병원 역시 전공의에게 굳이 비용을 들여 수련시킬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공의들은 4~5년 있다가 병원을 떠나니까 어느 정도 잡일을 시키다가 배출시키면 또 바로 후배가 들어오니까요. 그렇게 지금까지 굴러왔던 게 이번에 전공의들이 다 나가면서 여러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요약하자면, 의사와 전문의 수에 대한 정확한 연구를 통해 필요한 인력을 예측하는 것이 양적인 측면에서 중요하고, 수련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우선 커리큘럼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김세연: 놀랍네요. 의료 현장의 이런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김진현: 덧붙이자면, 전공의 수련을 더 잘 시키려면 결국 전공의가 하던 일을 누군가가 대신해야 합니다. 전공의들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배우는 과정에 있는데, 남는 일을 누가 할 거냐. 교수님들은 당연히 그 시간에 더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수술을 해야 합니다. 전공의가 하던 잡무를 맡기는 것은 적합하지 않죠.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도입하려는 호스피탈리스트 제도, 즉 입원 전담 전문의를 통해 이런 역할을 분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존속되기 어려운 것이 그들도 결국 전문의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역할을 법제화한 간호법 개정안이 통과됐는데, 결국 PA 간호사가 이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전환하기 위해 단순히 전문의를 많이 뽑겠다는 방향은 실효성이 없습니다. 의사 면허의 일부 역할을 새로운 직종으로 넘겨서 전공의들이 수련을 잘 받을 수 있게 하고, PA 간호사가 지금 전공의가 하는 역할을 일부 대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의사 단체는 PA 간호사가 자신의 면허 범위를 넘어서는 것에 극도로 반대하고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또한 간호법 개정에 상당한 역할을 한 간호사 단체도 정치적인 득실만 따져 추진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김세연: 아까 의사 수 규모를 추산하는 전문 위원회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일반인의 시각에서 보면 이와 함께 전공의들이 제대로 된 수련 과정을 겪지 못하고 도제식 교육을 받는 현실을 개선하려면 체계적인 분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공의들은 수련 과정에 집중하고, 실무적인 일들은 전문의들의 부담을 덜어 줄 또 다른 전문가 집단이 필요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PA 간호사들이 현실적으로 필요했는데, 이분들이 법적인 회색 지대에 존재했다가 이번에 양성화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제가 로봇 공학을 연구하는 교수님과 대화한 적이 있는데, 한국 대학의 로봇 연구실과 미국 대학 연구실의 가장 큰 차이가 테크니션의 존재라고 하시더군요. 한국에서는 석·박사 과정의 대학원생들이 모든 사소한 잡무까지 맡아서 전부 밤새면서 작업을 하는데, 미국 대학에서는 오랜 전문성을 가진 테크니션들이 있어서 대학원생들은 창의적인 설계나 복잡한 문제 해결에만 집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작과 관련된 실무 부분을 노련한 테크니션들이 맡아 주기 때문에 연구 효율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죠. 방금 말씀을 들으면서 이러한 환경 차이가 떠올랐습니다.
김진현: 병원 상황도 비슷합니다. 전공의가 많은 행정 잡무와 실무적인 일에 시간을 보내다 보니, 실제로 수련하고 배울 시간이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혈액 검사나 심전도(EKG)를 찍는 건 당연히 여러 번 해봐야 하지만, 수련 기간 내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숙달만 하면 되는 실무적인 부분까지 다 하고 있으니까 정작 뭔가를 배우고 수련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는데, 자기 시간을 더 투자하고 혼자 공부해서 교수까지 된 특출난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문제를 크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전공의 수련의 질 자체를 올려야 합니다.
김세연: 대한민국에서는 일부 분야에서 전근대적인 시스템이 조금씩 극복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체계적인 실력 양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개인의 역량으로 시스템의 핸디캡을 뚫어내야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특별한 개인들이 그동안 시스템 붕괴를 막아 온 수준에서 아직 우리가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 들었던 생각은, 의료 직종은 서비스업 중에서도 가장 고도화되고 전문성이 높은 분야인데, 이곳에서조차 생산성이 너무나 낮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전반적인 사무 생산성이 미국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분석이 30~4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고, 크게 바뀌지 않았더라고요. 수련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왜 사무 생산성이 낮은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의료 인력 양성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조직의 구성과 운영에 대해 논의해 보면 좋겠습니다. 혹시 분절화된 전공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없습니까?
김진현: 과별 협진은 비교적 잘 운영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다학제적 치료 과정에서 여러 과의 전문의들이 함께 의견을 나누고, 놓칠 수 있는 부분까지 논의하며 치료하는 과정은 교수님들 단에서는 잘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치료 과정을 뒷받침하는 실무적인 부분이 중요한데, 그동안은 전공의들이 스스로 처리해 왔습니다. 교수님들이 큰 방향을 결정해 주면, 전공의들이 실무를 맡아 환자를 직접 만나고 치료를 진행해 왔죠. 하지만 모든 실무적인 부분을 전공의에게 의지하다 보니 수련의 질이 떨어지고, 의료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전공의와 PA 간호사 같은 다른 직군이 실무적인 역할을 나눠서 처리해야 합니다. 운영의 축을 전공의와 PA로 가져가는 거죠. 하지만 현재 PA 제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최근 간호법이 도입됐지만, 사실 저는 간호법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현재 간호협회에서 많은 결정을 내리고 있지만, 실제로 실무를 수행하는 간호사들 입장에서는 이 시스템이 잘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젊은 간호사들 사이에서 “업무 범위만 이렇게 늘려 놨는데, 그럼 신규 간호사를 데려다 PA 시키고 교육한다고 영상 몇 개 보여 주라는 얘기냐” 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처럼 직역 자체를 새로 만들어야 하고, 그에 따른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전공의 역할을 대체하는 거니까 보상 수준도 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간호법은 단순히 간호사의 면허 범위만 늘려놨기 때문에 이게 잘 돌아갈지 모르겠습니다. 인력 공급 측면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의료의 질을 올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결국 단순히 실무를 하는 간호사의 업무만 늘어나고, 준비되지 않은 책임만 지게 될 뿐입니다.
김세연: 정리하자면 교수 레벨에서 이뤄지는 대학 병원의 협진은 잘 이뤄지고 있는데, 그에 반해 실무진 레벨에서의 체계적인 협업은 아직 그에 미치지 못하므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전근대적인 도제식 교육에서 탈피하는 과정에서, 의료 기관 내부에서 전공과들 사이의 정보 공유, 통합적인 문제 해결 방식, 적절한 역할 분담 같은 요소들이 앞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할 때 강조돼야 할 부분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관점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을 수 있지만, 향후 대학 병원이나 상급 종합 병원뿐만 아니라 작은 규모의 병원에서도 이러한 체계적 시스템이 잘 마련돼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의료 전달 체계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현재의 시스템을 비판적 분석을 기반으로, 향후의 새로운 모델을 그려 봤습니다. 의료에서 가격 균형 메커니즘이 시스템을 어떻게 잘 작동하게 할지, 의료 공급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의료진 수련 과정이나 의료 기관 내부 협업 체계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또 기술 요인이 도입됐을 때 현재처럼 발병 후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예방적으로 발병률 자체를 떨어뜨리는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지 등을 논의했습니다.
이제까지 나눈 논의를 예방적인 측면으로 더 확장해 보면, 현재의 의료 전달 체계는 주로 식케어 영역에서 작동하고 있고, 1차, 2차, 3차 의료 기관으로 구분돼 있는 시스템에 빅5 병원이 최상위 리그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4차 의료 기관 지정 논의까지 나오고 있는데, 또 하나의 계층을 만든다고 해서 의료 시스템이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어서 너무 나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오히려 3차 의료 기관으로 몰리는 현상을 막고, 1차, 2차는 물론이고 예방적으로 0차 의료 시스템을 강화하는 방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장기요양보험까지 고려한다면 사실 의료뿐만 아니라 복지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지역 사회, 의료 복지, 생활 복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고요.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도 포함돼 있죠. 이런 모든 걸 포괄하는 종합적인 예방, 그리고 복지까지 확장되는 의료 복지 전달 체계를 구현해야 할 텐데, 이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면 좋을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김진현: 현 시스템에서 가장 큰 문제는 환자가 의료 기관을 선택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1차 병원에서 진료 의뢰서를 받아야 3차 병원에 갈 수 있는데, 사실 안 받아도 갈 수는 있습니다. 다만 건강보험 적용을 안 해주니까 진료 의뢰서를 받아서 가는 건데, 일반 의원에 가서 대학 병원 갈 거니까 진료 의뢰서 써달라고 하면 그냥 써줍니다. 거름막 역할을 하지 못하고 돈만 한 번 더 나가는 형태가 돼 있습니다.
대담 서두에 논의했던 것처럼 의료의 사회화 형태에서는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안 되는 겁니다. 지역권을 설정해서 그 안에서 해결하게 하고 정말 문제가 되는 게 발생하면 그때 상급 병원으로 보내야 하는데, 지금은 모든 제한이 풀려 있습니다. KTX도 발달이 잘돼서 지역에서 다 올라오죠. 의료 소비자의 의료 기관 선택에 제약이 전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건강보험 체계가 여러 가지로 나뉘어 A 건보에는 특정 의료 기관만 포함하는 등 ― 물론 그 안에 1차, 2차, 3차 의료 기관이 들어가 있겠습니다만 ― 의료 기관 선택에 제약을 두면, 지금처럼 모든 병원에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시스템보다 안정적인 의료 전달 체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결국에는 한 건강보험 안에서 진료 의뢰서만 있으면 상급 병원으로 갈 수 있어서 제도 개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메디케어처럼 입원 기간이 늘어날수록 본인 부담금을 조금씩 늘리거나 소득에 따른 일정 금액 공제제(deductible)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자가 오랫동안 상급 병원에 머무르지 않도록 유도하는 방식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약간의 금전적 압박을 통해서 1차와 2차 병원에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환자들이 상급 병원에 계속 머무는 모럴 해저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급여 1종 환자들은 입원료 부담이 거의 없어서 일부 환자는 상급 종합 병원을 무리하게 이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큰 병원에서 2주간 입원해도 5000원도 안 나옵니다. 현재의 의료 전달 체계는 모럴 해저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3차 병원에 아예 못 가게 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영국은 주치의가 직접 의뢰서를 써주지 않으면 상급 병원으로 갈 수 없게 돼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주치의가 진료 의뢰서를 쓰면 약간의 페널티를 받기 때문에, 가능한 한 1차 의료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체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방식은 옳다고 보지 않습니다. 환자에게 선택권을 주되, 3차로 가고 싶다면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하게 하고, 추가로 각 의료 기관이 맞지 않는 환자를 진료하면 패널티를 주는 방식이 체계를 안정화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방 측면에서는 말씀하신 0차 의료 기관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일 것 같습니다. 건강 습관을 잘 길러서 건강 점수가 높으면 보험료를 낮춰 주는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이 결국 0차 의료 기관을 장려하는 방향이겠죠. 결국, 금전적 인센티브를 도입해 시스템을 안정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현재처럼 환자가 마음대로 의료 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방식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김세연: 1차 의료 기관이 0차 예방 의료까지 커버할 수 있는 제도적 설계가 마련된다면, 현재 1차 의료 기관들이 겪는 생존 위협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은 일부 과목을 제외하고 비급여 항목인 물리 치료, 도수 치료 쪽으로 팽창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구조가 변화할 여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영국식 주치의 제도에서는 환자가 주치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배정받는 방식인데, 만약 권역별로 선택 가능한 복수의 의사 중에서 환자가 주치의를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면 어떨까요? 1차 의료 기관에 종사하는 의사분들 입장에서는 경쟁이 생기기 때문에 불만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취지에는 더 부합할 것 같습니다. 의사에게 독점 권역을 주지 않고, 권역을 조금 넓게 열어 줘서 환자에게 최소한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거죠.
이 문제는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면에서 의료 사회화냐, 시장화냐의 출발인 것 같습니다. 선택권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효율성을 떨어뜨리지 않는 제도로 설계된다면 이상적인 의료 시스템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대담을 통해 다양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요,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김진현: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건강보험의 다양화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급진적인 변화여서, 특히 의료 사회화를 주장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건강보험 다양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최소한 정부, 의사, 환자가 조금씩 양보하는 형태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은 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세연: 대한민국이 현재의 의료 시스템을 개혁할 역량이 있을지 의구심이 들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백지상태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잘 설계해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봅니다. 의료 분야는 중요성과 함께 복잡성도 높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용어도 어려운데, 최대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고 종합적으로 조망하며 좋은 대안을 제시해 주셔서 다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진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