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연: 이번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는 윤영호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원장님과 대담을 나누겠습니다. 원장님과는 제가 18대 국회에서 일할 때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이라는 이름으로 연명의료법의 초안을 발의하는 과정에서 원장님께서 함께 논의해 주셨습니다. 이후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이 법안의 후속 법안이 호스피스법과 통합되어 통과되었습니다.
의학은 대개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롭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원장님은 어떻게 삶을 마무리할 것인가를 깊이 연구하고 해법을 제시해 오셨습니다. 이후에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옮겨서,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하는 연령대의 국민, 특히 직장 생활을 하는 국민의 건강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인지에 천착하셨습니다. 기업과 공공 기관의 ‘건강 경영’을 체계화했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건강문화사업단을 이끌며 설탕 부담금 도입 등 건강 증진을 위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쓰고 계십니다.
여느 의대 교수님의 활동 범위와는 꽤 차이가 나는 궤적을 보여 주셨는데, 그 바탕에는 한 개인의 건강한 삶과 존엄이 지켜지는 죽음까지 생애 주기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 있으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을 사회와 국가의 차원으로 확장해, 구성원 모두가 건강한 삶과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스케치 다이얼로그〉는 국가를 백지상태에서 새로 만든다면 영역별 체계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구상하는 사고 실험입니다. 스케치를 할 때 너무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지엽적인 각론의 이슈들로 인해 숲을 보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대담에서는 큰 그림에 집중해 보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국가에서 모든 구성원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려면, 제도 설계는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요?
윤영호: 제 삶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제가 왜 의사가 됐는지, 왜 죽음과 건강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건강 경영과 건강문화사업단을 거쳐 왜 지금 설탕 부담금을 이야기하는지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새로 만들어진다면 어떤 제도를 설계해야 하느냐는 질문은 거대한 담론처럼 보이지만, 저는 오히려 매우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앞의 문제에만 매달리다 보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놓치기 쉽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듯, 먼저 방향을 정한 뒤 현재와 목표 사이의 격차를 어떻게 줄일지 설계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입니다. 비전을 공유하고 공론화를 거쳐,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 목표가 무엇인지 합의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현재와의 격차를 줄일 로드맵을 구체화해야죠. 국가뿐 아니라 조직과 개인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genda 2050이 준비하는 일이 국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참여하고 싶습니다.
제가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중학생 때 누님이 돌아가신 때였습니다. 의사가 되어 가는 과정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여러 사람을 만났고,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연명의료결정법과 호스피스를 통해 기본 방향은 마련됐지만, 우리 사회의 웰다잉 문화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제도와 사회적 여건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해관계도 이미 형성되어 있고요. 그래서 그 영역에 들어가 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연명의료결정법에 뛰어들기 전부터 건강 분야의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급박하다고 판단해서 준비하던 일을 미루고 약 2년 동안 연명의료와 웰다잉에 집중했고, 그 뒤 다시 원래의 문제의식으로 돌아온 겁니다. 2008년 국회에서 처음 대표님을 만났을 때는 국립암센터에 있었고, 2011년 서울대학교로 옮기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죠.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건강을 결정짓는 요인은 유전이 5퍼센트, 의료가 10퍼센트, 개인 건강 습관이 30퍼센트, 사회 환경이 55퍼센트를 차지합니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 환경을 만드는 일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 환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체가 기업과 지방자치단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기업의 내부 고객인 직원과 외부 고객인 소비자를 대상으로 건강 경영과 건강가치창출 활동을 평가하고 컨설팅하는 일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국립암센터 기획조정실장을 맡으며 기획과 경영을 혼자 공부했는데, 그때 “평가할 수 있어야 관리할 수 있고, 관리할 수 있어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피터 드러커의 말에 주목했습니다. 기존에 개인의 건강을 평가하던 체계를 조직 진단과 컨설팅에 적용해 기업건강경영지수(Worksite Health Index·WHI)를 만들었습니다.
외부 고객인 소비자에 대해서는 기업의 가치 사슬 전반에서 소비자의 건강 가치를 얼마나 창출하는지 진단하는 건강가치창출지수(Health-Friendly Activity Index·HFAI)를 개발했습니다. 105개 항목으로 구성된 지표입니다. 2016년 기업건강경영지수를 과학적으로 검증했고, 2018년부터 건강가치창출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객관적인 평가 결과가 있어야 기업을 움직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서울대학교 건강문화사업단에서는 기업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까지 범위를 넓혔습니다. 한국건강지수(Korea Health Index)를 만들어 전국 252개 기초지방자치단체를 평가했습니다. 기업과 지방자치단체가 개인의 건강에 책임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김세연: 개별 의료 기관을 운영하는 병원 경영은 이미 학문적으로 상당히 정립되어 있습니다. 경영대학원에서 접근하기도 하고, 의료와 경영학을 접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건강 증진을 지표로 체계화하는 시도는 국내에서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까?
윤영호: 직원의 건강 관리 체계를 진단하는 도구를 찾아보니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2008년부터 ‘직장건강평가표(Worksite Health ScoreCard)’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체계와 저희가 만든 지표는 다르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국가가 나서고 있었던 것이죠.
일본은 2010년대 중반부터 경제산업성이 건강 경영과 건강 투자라는 개념을 내세웠습니다. 기업 구성원의 건강과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헬스케어 산업을 육성하려는 접근입니다. 경제산업성과 후생노동성이 지원하고, 의료계와 경제계 등 여러 주체가 참여하는 일본건강회의가 인증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세연: 우리나라에서는 건강 경영 평가나 인증에 참여하는 기업과 기관이 얼마나 되죠?
윤영호: 저희가 계속 제도를 제안하자 보건복지부가 정책 과제로 검토했고, 법을 개정해 ‘건강친화기업 인증제’를 만들었습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 위탁해 시행하고 있는데, 해마다 20~30개 정도가 참여하는 것으로 압니다. 다만 제가 기대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형식적이고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어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기 어렵습니다. 정부가 공공 기관에 위탁해 운영할 때 나타나는 한계라고 봅니다.
김세연: 다른 영역을 보면 정부나 기업이 사회적 가치를 확산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온 사례가 있습니다. 기후와 ESG 의제가 자본 시장으로 들어오면서 환경과 사회적 가치가 경제 생태계 전반으로 확산했습니다. 블랙록 같은 대형 자산운용사는 ESG 담론을 포용하며 기업의 변화를 요구하고, 존 디어 같은 기업은 공급망에서 아동 노동이나 강제 노동 여부를 점검해 기준에 미달하는 업체를 제재하거나, 모범 업체에 인센티브를 주기도 합니다. 의류 기업이 면화 생산 과정까지 관리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민간의 개별 주체 역시 사회적 가치를 확산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건강 경영도 국가 기관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훨씬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텐데, 현재 제도는 아직 도입 단계의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존 국가와 제도의 한계를 넘어 백지에서 새롭게 설계한다면, 가장 먼저 어떤 요소를 출발점에 탑재해야 할까요?
윤영호: 건강 경영이라는 개념을 확산하려면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인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환경 경영이나 윤리 경영이 주로 사회적 가치에 초점을 맞췄다면, 제가 말하는 건강 경영은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함께 창출하는 접근입니다. 마이클 포터가 말한 공유 가치 창출(CSV)과 같습니다. 사회적 가치가 있는 사업에 투자하면 경제적 가치가 생기고 지속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건강의 관점에서 보면 직원에게 투자하는 것은 단순한 비용이 아닙니다. 직원의 건강이 좋아지면 생산성이 향상되기 때문에 기업을 위한 투자이기도 합니다.
김세연: 이 문제는 기본권의 관점에서도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윤영호: 기본권의 관점에서만 보면 사회적 가치나 윤리적 의무에 머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 경영에 체계적으로 투자하면 생산성이 향상되고 기업 가치도 높아집니다. 기업은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라는 두 가지 이익을 함께 얻을 수 있죠.
김세연: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높일 수 있는 인센티브가 생긴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계약이 다시 이뤄지며 이전에는 없던 권리들이 만들어진 사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근대 민주주의 초기에는 교육을 받을 권리, 환경에 대한 권리, 개인 정보에 대한 권리 같은 개념이 부족했지만, 현대 국가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권리들이 정립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일생을 살아갈 권리도 인권의 중요한 요소로 충분히 편입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단순히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으로 태어난 누구에게나 건강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사회는 개인이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환경과 제도를 마련할 의무가 있다는 원칙입니다. 물론 지금도 건강권이라는 개념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선언적 수준에 머무르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제는 국가 기관과 고용주에게 어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무를 부과할 것인지까지 논의를 확장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윤영호: 사회 구성원의 건강권은 중요한 사회적 가치입니다. 다만 기업에 윤리적 의무만 요구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직원의 건강이 나빠지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기업의 손실도 커진다는 사실을 데이터로 보여 주며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넘어 공유 가치 창출(CSV)의 관점에서 건강에 투자할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비재무적 가치에 초점을 맞췄지만, 재무적 관점에서도 봐야 합니다. 여러 연구에서는 건강 투자에 대한 투자수익률(ROI)이 3 수준이라고 제시합니다. 건강에 1을 투자하면 3의 효과가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정신 건강은 ROI가 6.5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업 경영자뿐 아니라 투자자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기업 구성원의 건강은 생산성과 직결되므로 기업의 투자 가치를 평가하는 데이터가 될 수 있습니다. 투자자는 기업이 구성원의 건강에 얼마나 체계적으로 투자하는지, 구성원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과 윤리, 리스크 관리뿐 아니라 구성원의 건강 관리 수준도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가 그런 관점을 갖게 하자는 것이 제 취지입니다.
김세연: 한 개인의 건강을 결정짓는 요인이 유전 5퍼센트, 의료 10퍼센트, 개인의 건강 습관 30퍼센트, 사회 환경 55퍼센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건강 경영의 틀에 들어오는 사람은 주로 직장인입니다. 자영업자나 프리랜서처럼 조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포괄하기 어려울 텐데요.
윤영호: 그런 영역에는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건강문화사업단은 대기업의 건강 경영을 평가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서 기업들이 건강 경영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도록 유도하려 합니다. 국가는 그 투자에 세제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넛지(nudge)를 줘야 합니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건강 프로그램에 투자한 비용의 일부를 세제상 지원한다면 기업의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투자한 만큼 생산성도 높아져 선순환이 가능해집니다.
대기업은 그렇게 유도할 수 있지만 영세 기업과 소상공인은 다릅니다. 국가가 무료로 진단과 컨설팅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재원이 필요합니다. 제가 설탕 부담금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재원이 있어야 제도를 혁신할 수 있습니다.
김세연: 건강증진기금과 같은 형태로 사업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겠네요. 다만 그 기금으로 큰 조직에 속하지 않은 국민 전체를 포괄할 수 있을지는 구체적인 수치를 놓고 검토해야 하겠습니다.
윤영호: 큰 개념은 ‘건강 공동체’입니다. 개인의 건강 습관과 사회 환경을 어떻게 조화롭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죠. 개인은 공동체의 건강 문화에 참여하고, 기업과 지방자치단체는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듭니다. 개인과 기업, 지방자치단체가 건강 공동체 안에서 함께 움직일 때 건강 증진의 시너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김세연: 그러려면 건강을 판단할 기준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혈압 같은 기본적인 생체 지표에는 합의된 수치가 있지만, 건강한 상태와 건강하지 않은 상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려면 어떤 지표가 필요할까요?
윤영호: 평가할 수 있어야 관리하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조직과 지방자치단체를 평가하는 체계가 필요하고, 그보다 먼저 눈에 보이지 않는 건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평가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첫째는 ‘전인적 건강’입니다. 건강을 신체적·정신적·사회적·영적 차원으로 나눕니다. 신체와 정신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사회적 건강, 삶의 목적과 의미를 추구하는 영적 건강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영적 건강은 반드시 종교적인 의미라기보다 실존적 의미와 목적을 포함합니다. 이 네 차원을 종합한 개념을 ‘메타 건강(meta health)’이라고 부릅니다. 각각을 평가한 뒤 종합 점수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둘째는 건강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는 ‘건강 자산’입니다. 건강 자산의 가치를 평가하는 체계를 만들어, 막연하게 느껴지는 건강을 수치로 보여 주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김세연: 메타 건강은 신체적·정신적·사회적·영적 건강이라는 네 차원으로 구성되는군요. 사회적 건강은 인간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고요. 심리학과 사회학이 건강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연결 통로가 될 것 같습니다.
윤영호: 그렇습니다. 사회적 건강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 문제가 외로움과 고립입니다. 외로움과 고립이 부정적 상태를 설명한다면, 제가 말하는 메타 건강은 긍정적 방향에 초점을 맞춥니다. 신체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는가, 사회적 관계를 잘 맺는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가, 삶의 목적과 의미를 추구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죠. ‘나쁜 건강’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좋은 건강’을 키우는 긍정 건강(positive health)에 집중하는 겁니다.
김세연: 고립되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인스턴트식품을 계속 먹으면서 운동도 하지 않는다면 건강이 좋아지기 어렵습니다. 네 차원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겠군요. 영적 또는 존재론적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자각하지 못하면 행동할 동기를 찾지 못하고 무력감에 빠져 집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네 차원이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로 보입니다.
윤영호: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건강의 의미도 달라졌다고 봅니다. 인간이 자연환경에 직접 노출되어 살던 시기에는 사람마다 생활 여건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의료나 의도적인 건강 습관도 거의 없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 차이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컸을 겁니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며 식량과 주거 문제가 차츰 해결됐고, 집단생활이 확대되면서 사회적 관계가 중요해졌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자 정신적 활동이 늘어 정신 건강의 중요성도 커졌습니다. 이제는 매슬로(Maslow)가 말한 자아실현을 넘어,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세상에 기여하려는 욕구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하면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정신적·신체적 활동에도 동기가 생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로 갈수록 영적 건강, 즉 삶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건강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봅니다. 데이터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세연: 기존에 의료나 보건이라고 부르던 영역은 유전적 요인과 질병 치료에 주로 집중해 왔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구분을 따른다면 사회 환경과 개인의 건강 습관을 제외한 나머지 15퍼센트만을 다루면서 우리는 그것을 ‘헬스케어’를 한다고 착각해 왔던 것입니다. 이 인식을 확장해야 합니다. 다른 대담에서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사실상 ‘식케어(sick care)’, 즉 질병 관리를 헬스케어라고 보고 있는 것이죠. 용어의 오류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윤영호: 세계보건기구는 1948년 헌장에서 건강을 “단지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완벽하게(completely) 안녕한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건강은 질병이 없다는 부정적 개념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좋은 상태를 적극적으로 지향해야 진정한 건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세연: 기업과 공공 기관이 고용한 구성원뿐 아니라 그 범위 밖에 있는 개인까지 국가가 지원해 사회적 환경을 만든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개인의 습관입니다.
습관은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에서 꾸준히 반복하며 형성됩니다. 몸이 나빠진 뒤 스스로 각성해 운동을 습관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몸을 움직이는 일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 결과 노년의 건강 상태에 큰 격차가 생길 수 있습니다. 건강과 교육의 접점을 면밀히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윤영호: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습관을 만들려면 먼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건강한 행동을 실제로 어떻게 수행할지 아는 기술, 즉 스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식과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욕구입니다. 스스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야 지식을 찾고 기술을 반복해서 연습합니다.
그 욕구를 갖게 하는 것이 주도성과 동기 부여이고, 그것을 돕는 방식이 코칭입니다. 강제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고 싶도록 동기를 부여한 뒤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제공해야 합니다. 건강한 선택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사회적 환경, 즉 넛지를 만들고 개인의 실천을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김세연: 오늘 대담은 처음에는 의료나 보건이라는 좁은 주제로 생각했습니다만, 말씀을 따라가다 보니 ‘건강’ 자체가 주제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건강은 교육과도 바로 연결됩니다. 새로운 나라에서 학교 시스템을 설계할 때 건강을 가장 근본에 자리 잡게 하려면 어떤 요소들이 필요할까요?
윤영호: 미국에는 학교의 건강 관리 체계를 진단하는 도구가 이미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학생을 신체와 정신, 관계와 환경을 포괄하는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전인 교육의 관점에서 평가합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학교건강지수(School Health Index·SHI)입니다. 저도 기업건강경영지수를 개발한 경험을 학교에 적용해 학교 건강 평가 체계인 학교건강평가표(School Health Score Card)를 만들었습니다. 30개 학교를 조사하고 학생들의 건강 데이터를 함께 분석해 학교가 건강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지원하는지 평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김세연: 평가는 결국 학생 한 명 한 명의 건강 증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앞서 말씀하신 건강해지기 위한 지식과 기술, 욕구가 결합해 실천이 지속되도록 하려면 학교 시스템에 어떤 요소를 넣어야 할까요?
윤영호: 학생은 아직 자기 동기 부여와 건강 습관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단계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생활 습관과 위험 요인 노출은 유전적 소인이 실제로 나타나는 양상, 즉 표현형에 영향을 주고 성인기의 만성 질환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흡연이나 비만 같은 요인에 성장기부터 노출되면 그 영향이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학생 스스로 동기를 갖게 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학교와 가정, 지방자치단체와 국가가 함께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학부모도 학교의 건강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가족, 학교, 지방자치단체, 국가의 공동체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죠.
김세연: 교과 과정은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요?
윤영호: 플립 러닝(flipped learning)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학생이 자료를 미리 받아 스스로 학습하고, 교실에서는 질문과 토론을 통해 이해를 넓힌 뒤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지금처럼 교사가 강의하고 학생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가 학습과 토론을 결합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식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역량을 키울 수 있습니다.
김세연: AI가 보편화되면 학교의 역할과 기능도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 같습니다. 지식을 전달하고 습득한 내용을 시험하는 일보다 사회적 관계를 건강하게 형성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자각을 기르는 일이 중요해질 겁니다. 스포츠 활동을 통해 협동을 체험하고, 신체 활동의 비중도 지금보다 높여야 합니다.
알코올이나 약물, 디지털 기기 등 여러 중독을 예방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도 교과 과정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신체적·정신적 건강과 직결됩니다. 영적인 건강 측면에서는 윤리 시간에 철학과 존재론을 스쳐 가듯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나는 누구이며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학교 교육 과정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질문드렸습니다.
윤영호: 동의합니다. AI가 발전한 시대에 학교 교육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묻는다면, 결국 질문하고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답하겠습니다. 학생에게 실제 문제를 주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게 해야 합니다. 질문하고 생각하고 토론한 뒤, 논의를 통해 합의와 의사 결정에 이르는 과정까지 경험해야 진정한 교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세연: 합의가 형성되는 과정을 직접 체험하며 학습한다면 민주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다.
윤영호: 그것이 바로 리더를 기르는 과정입니다. AI를 활용하되 AI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AI로 데이터와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그대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참고해 자기 생각을 구축해야 합니다. 각자 어떤 자료를 근거로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떻게 사고했는지에 따라 답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서로 준비한 생각을 토론하고 조정하는 과정에서 더 합리적인 의사 결정에 이를 수 있습니다.
김세연: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있지만, 사회적 문제는 대부분 함께 풀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사회적 건강도 자연스럽게 기를 수 있겠습니다.
윤영호: 한 번 합의했다고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합의한 내용을 실행하고, 그 결과를 다시 논의의 장으로 가져와 검토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세연: 공교육은 단순 지식 암기와 테스트 중심에서 벗어나, 사회적 상호 작용을 직접 경험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기술과 경험을 익혀 사회적·정신적 건강을 기르고, 체육 활동을 통해 자신의 몸을 돌보는 습관과 신체적 건강도 함양해야 합니다.
학교뿐 아니라 가정에서 형성되는 습관과 상호 작용도 매우 중요합니다. 성인이 겪는 심리적 문제 가운데 상당수는 성장 과정에서의 결핍이나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된 뒤 중독이나 괴롭힘 같은 다른 문제로 그 영향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건강을 증진하는 틀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요?
윤영호: 아이가 사회에 본격적으로 나가기 전에 가장 먼저 경험하는 사회는 가정입니다. 가정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의 습관이 만들어지고 전인적 건강의 토대가 형성됩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만 강조하기보다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 것인지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외로움과 고립, 우울과 질병 같은 부정적 상태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좋은 방향을 지향하고 주도적으로 실천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소통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김세연: 아이와 제대로 소통하려면 부모가 먼저 그런 인식을 갖추고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이들이 바람직한 양육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모가 될 준비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윤영호: 부모도 지역 사회와 조직에 속한 사회 구성원입니다. 기업과 지방자치단체, 국가가 건강 공동체의 관점에서 다양한 문화와 교육 활동을 제공하고 참여하게 하면, 부모가 그 내용을 학습하고 내면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태도와 습관은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자녀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김세연: 부모로서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역량을 사회 캠페인이나 사회 교육으로 길러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학교 교육에서도 ‘부모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미리 생각하고 준비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윤영호: 돌아보면 우리는 주로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를 했습니다. 대인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는 사회에 나온 뒤에야 하나의 기술처럼 배웠죠. 부모가 어떤 자세와 지식을 갖춰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배우는 과정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자기 부모의 모습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경험을 참고하면서 익힙니다. 부모에게 어떤 역량이 필요한지, 그것을 사회가 어느 수준까지 요구할 수 있는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자격이 필요한가’라는 질문도 사회적으로 합의하기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김세연: 합의는 어렵겠지만 방법론은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 양육·상담 전문가의 활동을 보면 획일적으로 계량하기는 어려워도 부모가 배울 수 있는 원칙과 기술은 존재할 것 같은데요.
적극적 의미의 건강에는 심리적 건강도 포함됩니다. 학교가 아이의 운동 습관을 길러 줘서 신체적 건강의 증진을 돕듯, 부모도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아이의 심리와 행동을 이해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학교 교육과 가정 교육을 연결하는 요소로 이러한 역량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윤영호: 한 가지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습니다. 가톨릭 성당에서 혼인하려면 예비부부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사회 전체에도 결혼이나 부모 됨을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혼인 신고의 자격처럼 의무화할 것인지, 자발적 참여를 지원할 것인지는 논의가 필요하겠죠.
저는 일방적인 교육보다 코칭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립암센터 기획조정실장으로 일할 때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2박 3일간 주도성, 상호 이익, 끊임없는 쇄신 같은 원칙을 배우며 리더에게 이런 훈련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이후 코칭을 공부해 리더십 코칭을 건강에 접목한 ‘건강리더십과 코칭(Leadership and Coaching for Health·LEACH)’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부모가 되는 과정에도 코칭이 필요합니다.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동기를 찾도록 돕고,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연습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사회가 이런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경험도 있습니다. 리더십 코칭 훈련을 받은 뒤 아내에게도 배워 보라고 권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게 있으니까 한번 해보라고 했더니 아내가 “당신 하는 거 보고 하겠다”고 하더군요. 머리가 띵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꾸려 하기 전에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부부와 부모·자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전이나 신혼기에 참여할 수 있는 코칭 프로그램을 국가가 마련하고, 바우처나 예산을 통해 지원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김세연: 아이가 건강하려면 부모가 먼저 건강해야 하고, 학생이 건강하려면 선생님이 먼저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영호: 상담이나 컨설팅과 코칭에는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상담이 과거의 문제를 해석하고 부정적인 상태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코칭은 긍정적인 방향과 미래의 성장에 초점을 맞춥니다. 물론 실제 현장에서는 서로 보완할 수 있지만, 코칭의 핵심은 당사자에게 힘과 주도성을 부여하는 데 있습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문제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에만 머물지 않고 ‘함께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미래 지향적 프로그램을 만들고, 바우처 등을 통해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습니다.
김세연: 아이들이 가정에서는 코칭 등의 방법을 통해 부모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고, 학교에서도 역시 그러한 좋은 영향을 받으려면 교원 양성 과정까지도 함께 개편할 필요가 있겠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유전과 의료, 개인의 습관과 사회 환경이라는 건강 결정 요인을 살펴보고, 관련 제도와 기관의 역할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논의를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드는 기술 변화를 대입해 보겠습니다.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가 구현될 시점이 머지않았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예상 시기가 2028년 말에서 2029년 무렵으로 좁혀지고 있습니다. 재귀적 자기 개선(recursive self-improvement)이 가능해지면 AI는 인간의 개입 없이 더 뛰어난 다음 세대의 AI를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알파폴드와 신약 개발에서 이미 확인된 잠재력을 고려할 때 의료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질 수 있습니다.
레이 커즈와일은 기술 발전으로 늘어나는 기대 수명이 실제로 흐르는 시간보다 길어지는 지점을 ‘수명 탈출 속도(longevity escape velocity)’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시점이 오게 되면 이론적으로는 영생할 수도 있는 것이죠. 동시에 AI로 인간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고용이 줄어들 때 사회적 건강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의료 기술이 기존의 구분을 흔들 수도 있습니다. 위고비나 마운자로 같은 비만 치료제는 개인의 습관과 의료의 경계를 바꾸고 있습니다. KRAS 변이를 표적으로 하는 췌장암 치료 연구처럼 기존에 어려웠던 질병을 다루는 기술도 계속 등장합니다. AI와 의료 기술의 발전이 앞서 논의한 건강 체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윤영호: 위고비와 마운자로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런 약물은 식욕을 낮추고 포만감을 높여 음식 섭취량을 줄이게 합니다. 에너지를 소비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먹는 양을 조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체중을 관리할 목적이 분명하고, 스스로 체중과 식사량을 계속 점검하며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약물 없이도 관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활 습관과 생물학적 요인,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의지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약물 치료가 필요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약물에만 의존해서는 ‘요요 현상’으로 다시 체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과 행동 변화를 통해 건강 습관을 만드는 노력을 병행해야 합니다.
김세연: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체중도 꾸준히 측정하는 것 자체가 관리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겠습니다.
윤영호: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왜 어려운지 살펴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습관이 오래 지속되고 동기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경우, 행동을 바꾸는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분에게 위고비나 마운자로 같은 치료제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물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치료와 함께 스스로 관리할 동기를 만들고 행동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취약 계층에는 비만 치료제의 급여 적용이나 바우처 지원을 검토할 수 있지만, 행동 요법과 자기 관리 지원을 병행해야 합니다.
대표님께서도 체중을 관리하실 겁니다. 먹고 싶은 것을 어느 정도 절제하면서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세연: 건강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영호: 바로 그 목적의식이 있는 겁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음식 자극에 반응하는 보상 회로와 행동 패턴이 오랫동안 굳어져 쉽게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치료와 행동 변화 지원을 함께 제공해 그 회로와 습관을 다시 조정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치료 기술이 아무리 좋아져도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동기가 전혀 형성되지 않으면 문제가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김세연: 아까 건강을 결정짓는 요소로 유전 5퍼센트, 의료 10퍼센트, 개인의 건강 습관 30퍼센트, 사회 환경 55퍼센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위고비나 마운자로 같은 새로운 치료제가 기존에는 개인의 건강 습관 혹은 유전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부분에 의료적으로 개입해 비만 문제를 해결한다면, 결과적으로 건강 수준이 높아지는 것 아닌지요?
윤영호: 치료제가 체중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전인적 건강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만이라는 부정적 상태를 줄이는 데서 더 나아가 신체적·정신적·사회적·영적 건강을 함께 키워야 합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한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돌보고,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을 관리하는 과정 안에서 체중도 관리합니다. 약물은 질병이나 위험 요인을 줄여 상태를 ‘제로’에 가깝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긍정적인 건강과 성장은 별도의 과제입니다. 미래의 건강 정책은 두 방향을 함께 봐야 합니다.
김세연: 비만보다 더 논쟁적인 사례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탈모 치료를 건강보험 급여 대상으로 포함할 것인지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윤영호: 저는 급여 적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탈모를 단순한 미용 문제로만 보고 우선순위를 낮추는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탈모가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업무 효율과 대인 관계에 영향을 주며, 사회적 회피와 고립·우울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치료 대상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김세연: 비만도 우울감이나 사회적 위축을 일으킬 수 있지 않습니까?
윤영호: 물론 비만도 정신적·사회적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탈모와는 개입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비만은 유전과 생물학적 요인,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식사와 운동 등 행동 변화로 조절할 여지가 있습니다. 약물 치료를 중단하면 체중이 다시 늘 수 있으므로 생활 습관을 함께 바꾸는 일이 중요합니다. 반면 탈모는 개인이 마음먹고 행동을 바꾼다고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두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그럼, 안경은 어떻습니까?
윤영호: 시력이 나쁘면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고 사고 위험도 커집니다. 그래서 독일 같은 나라는 일정한 요건 아래 시력 교정 비용을 공적 보험에서 지원해 줍니다. 안경을 패션으로 쓰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시력 교정 자체를 미용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건강을 질병의 유무만으로 좁게 보면 안경은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신체적·정신적·사회적 활동을 원활하게 하도록 돕는 적극적 건강의 관점에서 보면 시력은 중요합니다. 어떤 상태가 신체 활동이나 정신 건강, 사회생활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데 제약을 준다면 건강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수명과 건강 수명을 구분해야 합니다. 의학은 수명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춰 왔지만, 건강의 관점에서는 오래 사는 것만큼 오래 건강하게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수명만 늘릴 것인지, 더 짧더라도 건강하고 의미 있게 살 것인지 가치의 충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오래 사는 것 자체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건강하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100세, 200세를 살아도 계속 질병과 고통을 겪는다면 삶의 연장만으로 충분하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건강의 개념을 수명의 연장에서 삶의 질과 의미까지 포괄하도록 새롭게 잡아야 합니다.
김세연: 논의를 건강보험 체계로 옮겨 보겠습니다.
윤영호: 건강보험은 질병 치료 중심에서 질병 예방과 건강 증진 중심으로 무게를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 질병 자체를 줄일 수 있습니다.
김세연: 사실 제도의 출발은 ‘의료보험’이었고 지금은 ‘건강보험’으로 이름이 바뀌었죠.
윤영호: 이름은 건강보험인데, 실제 재원의 우선순위를 보면 여전히 의료보험입니다. 질병 치료에 대부분의 자원을 쓰고 예방적 조치에는 충분히 투자하지 않습니다. 사전에 효과적으로 예방하면 장기적으로 의료비를 줄일 수 있다는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김세연: 건강보험 재정이 한동안 흑자를 유지하다가 ‘문재인 케어’에 따른 보장성 강화 이후 적자 상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도수 치료의 수가와 급여 기준을 조정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는데요, 이른바 의료 쇼핑 문제는 제도 개선을 통해 비교적 단기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어디까지를 건강보험의 대상으로 볼 것이냐입니다. 탈모와 비만처럼 질병과 미용의 경계에 놓인 문제도 있고, 치료가 아니라 건강을 위한 적극적 예방 조치도 있습니다. 건강보험 체계를 새롭게 디자인한다면 어떤 요소들을 고려해야 할까요?
윤영호: 지금의 건강보험은 사실상 의료보험이기 때문에 급여를 인정할 때 우선 의학적 효과에 관한 과학적 근거를 요구합니다. 또 비용 효과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용 효과 분석(cost-effectiveness analysis·CEA)을 통해 투자한 비용에 비해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 검증합니다. 이 비용 효과성이 검증되어야 급여 체계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 기준을 예방과 건강 증진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앞서 건강 투자에 대한 투자 수익률이 3 수준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정신 건강 투자는 6.5 수준이라는 연구도 있습니다. 과학적 근거와 투자 효과가 있는데도 충분히 투자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질병 중심의 관점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방에 투자해 질병이 줄어드는 효과를 국민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강 경영을 잘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면 당장은 세수가 줄어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산성이 높아져 기업 활동과 소득이 늘면 장기적으로 세수도 늘 수 있습니다. 현안에만 매달리지 말고 이런 선순환을 보는 큰 틀의 사고가 필요합니다.
호스피스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호스피스를 활성화하면 말기 환자가 불필요한 치료를 덜 받고 적절한 돌봄을 받으면서 의료비도 절감할 수 있다는 명확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지 않습니다.
김세연: 병원 입장에서는 매출이 줄어드니 그렇겠죠.
윤영호: 병원의 이해관계는 그렇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전체 체계를 봐야죠. 호스피스 병동을 확충하고 환자가 적절한 돌봄으로 이동하게 하면 불필요한 병상 이용을 줄일 수 있고, 급성기 병상은 실제로 집중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 배분할 수 있습니다. 병원 수익 구조도 그 방향에 맞게 설계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지 답답합니다.
김세연: 왜 바뀌지 않는다고 보십니까?
윤영호: 정책 결정자들의 한계라고 봅니다. 닫힌 사고에 머무르는 관료도 문제이고, 과학적 근거를 만들어 설득하려는 의료인의 노력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이 웰다잉 국가 책임자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야 부처가 움직입니다.
최근 대통령이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한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줘야 하지 않느냐고 하니까, 논의가 의료비를 깎아 주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는 문제로만 좁혀졌습니다. 갇혀 있는 생각을 하는 거죠. 말기 환자가 품위 있게 삶을 마무리하도록 필요한 돌봄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인센티브입니다.
그렇다고 관료만 탓해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과학적 근거와 사회적 가치를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할 구조가 필요합니다. 데이터를 만들고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반영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정치의 역할입니다. 정치권이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근거를 축적하며 사회적 합의를 정책으로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고 봅니다.
김세연: 기존 시스템 안에서는 문제가 쳇바퀴 돌듯 반복되기 쉽습니다. 백지에서 새로 설계한다면 어떤 요소를 기본에 놓으시겠습니까?
윤영호: 다시 “평가할 수 있어야 관리할 수 있고, 관리할 수 있어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먼저 체계적인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만 평가에 앞서 무엇을 지향할지 정해야 하므로 미션과 비전,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 목표가 평가 체계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미션과 비전을 공유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합의를 위해서는 데이터와 근거가 필요하고,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도 함께 반영해야 합니다. 20년 또는 30년 뒤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지금부터 큰 담론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측 가능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의 문제를 검토하고, 공론화를 통해 다양한 사람의 가치를 반영한 방향을 합의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합의한 목표와 현재 사이의 격차를 어떻게 줄일지 로드맵을 만들어야 합니다.
김세연: 원장님이 사회적 합의를 위한 초안을 쓴다면, 30년 뒤 새로운 국가에서 개인과 사회가 모두 건강한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요? 앞서 여러 요소를 말씀해 주셨는데, 최대한 압축해 주신다면요.
윤영호: 결국 두 가지 질문으로 모입니다. 하나는 인간이 지금까지 어떤 존재로 진화해 왔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미래에 어떤 인간을 지향할 것인가입니다. 먼저 ‘인간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김세연: 결국 존재론의 영역으로 가는군요.
윤영호: 그렇습니다. 인간은 동물에서 출발해 신을 지향하지만, 신에는 도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신과 동물 사이에서 더 나은 존재를 꿈꾸면서도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김세연: AI의 등장은 그런 존재론적 질문을 현실의 문제로 끌어오고 있습니다.
윤영호: AI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인간이 지향해 온 능력을 AI가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됐습니다. 인간이 신과 같은 능력을 꿈꾸는 사이 AI가 인간을 추월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인식하게 된 것이죠.
김세연: 윤리적, 철학적 차원에서 매우 깊은 논의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윤영호: 제가 최근 쓰고 있는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인간은 신을 지향하지만 도달하지 못하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AI에는 오히려 추월당할 수 있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김세연: 예전에는 영화 〈E.T.〉에 나오는 외계인의 모습이 인류의 미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운동은 하지 않고 컴퓨터만 사용하며, 텔레파시로만 대화하다 보면 결국 그런 신체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였죠.
윤영호: 그렇다면 인간은 신체를 버릴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신체를 갖는다는 것은 불멸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몸을 가진 순간 언젠가 죽습니다. 결국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두가 죽지 않는다면 인구 폭발과 환경 파괴 같은 문제도 생길 겁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공동체를 연속선으로 봅니다. 생명 공동체에서 시작해 건강 공동체와 삶의 공동체, 돌봄 공동체를 거쳐 웰다잉 공동체로 이어집니다. 생명의 시작부터 죽음까지를 하나의 연속된 공동체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인간은 신도 로봇도 아닙니다. 동물에서 출발해 더 나은 존재를 지향하지만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만이 아니라 ‘우리’를 중심에 놓는 공동체적 사고를 되살려야 합니다.
김세연: 인간이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다른 모든 생물보다 우위에 선 지배종으로 살아왔습니다. 비인간 유기체에 비해 절대 우위에 있었는데, 이제는 비인간 존재의 강력한 위협을 곧 받게 될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특히 의식을 클라우드에 업로드할 수 있고, 수명 탈출 속도에 도달해 영생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되면, 인구 폭발로 인간의 희소성은 떨어지고 인간 노동의 수요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윤영호: 어떤 사람은 우주로 가면 된다고 이야기하죠.
김세연: 지금의 인체로 중력이 다른 천체에 가서 생활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윤영호: 그래서 몸은 가지 않고 정신이나 기억만 가지고 가는 거죠.
김세연: 이런 기술 변화는 변수의 규모가 너무 큽니다. 지금 논의하는 건강 공동체와 인간 존재의 조건 자체가 달라지는 문제를 곧바로 결부해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주요한 논쟁의 대상으로서는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윤영호: 종교계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AI가 신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기존 종교관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새로운 신’처럼 보이는 AI가 나타났을 때 신앙과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물어야 하겠죠.
김세연: 이미 초기적인 형태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경이나 성경 등 각 종교의 경전을 학습한 AI가 신자의 질문에 답한다면 사제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신앙은 영적 건강, 삶의 의미와도 연결되므로 건강 문제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다시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듯합니다.
윤영호: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지금부터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세연: 그렇다면 건강 공동체의 뚜렷한 상을 세우려면 이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논의와 합의도 필요하겠습니다. 완전한 하나의 답에 합의하기는 어렵고 여러 해법이 공존할 수도 있겠지만,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기본 원칙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윤영호: 건강을 정의하려면 먼저 인간을 정의해야 합니다. 인간은 신체적 존재이면서 정신적 존재이고, 관계와 역할을 지닌 사회적 존재이며, 삶의 의미를 찾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 인간관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 건강입니다. 매슬로의 욕구 단계와 연결해 보면 신체적 필요에서 사회적 관계와 자아실현으로 나아가고, 더 나아가 자신을 넘어 세상에 기여하려는 욕구에 이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세상에 나누려 합니다. 죽음도 어쩌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은 그런 방향을 지향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은 바로 신체를 지탱하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정신적 활동을 통해 삶의 목적을 달성하고 의미를 구현하는 인간의 삶을 완성하게 합니다.
김세연: 앞으로 평균 수명이 더 길어지면 이 문제는 더욱 첨예해지겠군요.
윤영호: 누군가는 가능한 한 오래 살고 싶어 할 것이고, 누군가는 더 사는 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경제적·정신적 어려움에 떠밀린 판단이 아니라, 충분히 자유롭고 합리적인 상태에서 진정성 있게 “나의 삶은 여기까지로 완성됐고 더 사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 이제 내가 가진 것을 세상에 나누고 떠나겠다”고 결정한다면 우리는 그 선택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 질문이 제가 의사 조력 자살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출발점입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스스로 숙고해 내린 판단이라면, 당사자의 입장을 사회가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삶과 죽음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윤영호: 종교계에서는 당연히 반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의사 조력 자살을 허용해야 한다고 보는 이유는 제가 그것을 선택하거나 직접 돕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사자가 자발적이고 합리적이며 진정성 있게 내린 결정을 국가가 일률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 결정권이라는 관점에서 일정한 조건 아래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제도가 만들어지면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신체적 고통이 적절히 치료되지 않았는지, 경제적 곤란이나 돌봄 부족 때문에 내린 결정인지, 우울증 같은 정신 건강 문제가 영향을 미쳤는지 면밀히 확인하고 먼저 해결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숙고와 반복 확인, 독립된 전문 판단을 거치게 하면 충동적이거나 강요된 선택을 걸러낼 수 있습니다. 금지만 할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보자는 뜻입니다. 여러 나라가 제도화 논의를 이어 가는 만큼 우리도 결국 헌법적 판단과 입법 논의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오늘 대담은 연명의료와 호스피스에서 시작해 건강 공동체로 갔다가, 다시 삶의 마지막 단계로 돌아왔습니다.
윤영호: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죠. 인간을 정의할 때 죽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세연: 살아 있다는 것의 바로 뒷면에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숙명이 있습니다.
윤영호: 그것이 인간이죠. 죽음이 없다면 인간이 아닙니다. 영원히 작동하는 로봇이나 AI일 수도 있고, 우리가 상상하는 신일 수도 있겠죠. 신도 로봇도 아닌 인간은 죽음을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김세연: 그렇다면 인간이 로봇이나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선택한다면, 그 또한 존중되어야 하겠네요.
윤영호: 그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우리가 말하는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합니다. 신체가 사라져도 의식이 클라우드나 우주 공간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로봇일까요, AI일까요, 신일까요?
김세연: 로봇도 신도 아닌 새로운 존재일 수 있겠습니다.
윤영호: 저는 로봇에 가깝다고 봅니다. 단순히 계속 존재한다고 해서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로봇과 AI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하나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은 무엇이며, 신과 AI의 차이는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합니다. AI는 이미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영역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가톨릭이 말하는 아버지로서의 신은 무엇인지, 기독교와 유대교가 말하는 신은 무엇인지, 더 넓게는 우주 자체를 신으로 볼 수 있는지까지 질문할 수 있겠죠.
김세연: 오늘은 의료 체계에서 출발해 건강 공동체를 논의하려 했는데, 존재론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다다랐습니다.
윤영호: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그 삶을 온전하게 지속시키는 건강도 정의할 수 있으니까요.
김세연: 사실 건강은 빙산의 수면 위에 드러난 부분과도 같습니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온전한 상태임을 보여 주는 표피적인 것이고, 그 아래에는 존재의 의미 같은 훨씬 큰 부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을 함께 보지 않고서는 앞뒤가 맞는 해법을 만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본질적인 고민과 통찰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영호: 좋은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받으니 생각하게 되고, 말하는 동안 저 역시 생각이 정리됩니다.
김세연: 바쁘신 가운데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나눈 뜻깊은 대화를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 앞으로 이어질 논의의 중요한 초석으로 삼겠습니다.
윤영호: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