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연: 이번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오래 근무하셨고, 행정부의 문제점들을 어떻게 개선하고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우리 사회에 던져 주신 노한동 작가님을 모시고 대담을 진행하겠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77년이 흘렀습니다. 그사이 우리는 압축적이고 고도화된 성장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때 작동했던 여러 원리와 우리가 익혔던 방식들이 개인에게는 습관으로, 사회적으로는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쉽게 바꾸기 어려운 요소들이 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성공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모습도 보입니다.
국가의 지속적인 성장과 번영을 위해 다양한 분야가 중요하겠지만, 그중에서도 행정의 역할이 막중합니다. 과거에는 공무원들이 솔선수범했고, 능력 면에서도 누구보다 뛰어났으며, 국가적인 장기 과제들을 잘 설계하고 집행해 온 빛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가 발전 단계가 점차 성숙기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이런 전통들이 많이 약해지거나 변질되어 가는 듯합니다.
개별 사례들을 보면 매우 안타깝고 아무리 비판받아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런 개별 사례는 일단 뒤로하고, 큰 그림을 그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행정이 가진 규제 권한, 그중에서도 각 부처나 부서에 속한 공무원들이 가진 재량권이 선량하게 집행되기보다는, 지나친 감사 등의 이유로 정책 집행 속도를 늦추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형태로 작동합니다. 이로 인해 사회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갈등을 적절한 시점에 조율하고 해소해야 하는데, 이 역할을 방기해 갈등이 더 커지고, 결과적으로 커다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거에 갖고 있던 기획 능력도 많이 상실되거나 망각된 듯합니다. 대부분의 기획 업무는 외주나 용역으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잦은 순환 보직 탓에, 전문성 축적이 어렵죠. 이는 민간과 비교해 전문성이 훨씬 뒤처지는 상황을 만듭니다. 이처럼 매우 복합적인 양상의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조금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고 실험을 해보고자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백지상태에서 국가를 새롭게 설계한다고 가정해 본다면, 행정부는 어떤 원리로 설계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현재의 국가 형태는 대체로 근대 시민 혁명 이후, 산업 혁명 초기에 형성된 틀을 따릅니다. 민족 국가가 형성된 이후, 20세기 전반에는 대공황과 여러 전쟁을 겪었고, 20세기 후반에 들어 복지 시스템을 국가 운영의 핵심에 둔 현대 민주주의 체제가 자리 잡았습니다.
즉, 지금의 정부 시스템은 약 100년에서 150년 전의 세계관과 기술적 조건을 기반으로 설계된 시스템입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환경 변화에는 부합하지 않는, 형태적 혹은 절차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부분, 그리고 이 본질이 현실에서 발현되는 형태적인 부분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해본다면, 어떤 밑그림을 그려 볼 수 있을까요?
노한동: 큰 이야기이니 아주 크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계급제가 주무관, 사무관, 과장, 국장, 실장, 차관, 장관 등 엄청나게 다층적으로 분화되어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의 승진 욕구나 자리를 챙겨 줘야 하는 이해관계가 없는 제로 베이스의 사고 실험으로 간다면, 저는 이 계층을 거의 두 단계로만 줄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리더와 그 아래의 파트장들 정도로 말입니다. 그리고 프로젝트 기반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리더는 가능한 한 장기간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장관이 1년 만에 교체되는 구조는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최소한 5년은 가야 한다고 봅니다.
오래가는 리더, 장기적으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또, 이런 리더를 알아볼 수 있는 대통령의 민주주의적 역할도 필요하겠죠. 일단 5년 임기의 장관, 그리고 조직 내에서 이 일을 할 만한 적임자를 찾아서 프로젝트를 맡기는 능력만 있다면 행정부가 잘 돌아갈 것 같습니다.
김세연: 첫 번째 답변부터 핵심을 잘 짚어 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행정부라는 조직 체계는 원래 국가 초기에 국방과 치안을 위주로 최소한의 기능을 갖춘 야경국가로 시작했습니다. 이후 경제적, 사회적 기능들이 계속 추가되면서 조직이 비대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공공 행정 서비스의 본질은 망각되고, 남은 것은 승진뿐입니다. 예컨대 군마저도 전투 상황을 경험하지 않게 되면서 행정군화되고 있습니다. 전과를 측정할 기준이 없다 보니, 구성원들의 인센티브가 승진에 집중되어 버립니다. 승진의 필요성이나 욕구 자체가 사라지는 시스템을 만든다면, 행정이 다른 본질적인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노한동: 제로 베이스 사고를 전제로 한다면, 꼭 공무원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결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다면, 외부에서 해당 역량을 가진 사람을 데려오는 것도 리더의 역할이 되겠죠.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지방 자치 단체와 중앙 정부의 기능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거대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집행 기능 대부분은 중앙 정부에서 지방 자치 단체로 이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도 조정돼야 할 것이고, 예산 구조도 달라져야 할 겁니다. 여러 지원 예산 등은 지방 자치 단체가 기본적으로 담당해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중앙 정부가 거의 예산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지방 정부는 국가 유지에 필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그 안에서 직업 공무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체제가 필요합니다. 중앙 정부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젝트 단위로 운영하되, 그 인력이 반드시 직업 공무원일 필요는 없는 시스템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고(故)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공유 정부 개념이 상당 부분 이러한 체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김 교수님은 돌아가시기 전 인터뷰에서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관료제”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매우 강한 비판 의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고려할 때, 지금 말씀드린 구조가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세연: 국가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뼈대, 즉 가장 근본적인 구조가 필요합니다. 이 체계만 잘 작동할 수 있게 한다면, 그 사람이 신분이 보장된 공무원이든, 임시로 들어온 민간의 최고 전문가이든 상관없습니다. 세계 각국이 따라 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바로 다르파(DARPA,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입니다. 절묘한 인적 구성과 탁월한 조직 문화, 전통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학계에서도 테뉴어를 받은 교수에게 지속적인 연구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일이 과거보다 쉽지 않아지고 있습니다. 신분 보장에서 오는 안정감은 분명 장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승진 제도와 결합하는 순간, 본래의 취지를 잃고 도구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정은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6개월이든 10년이든 해당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원칙이 행정의 바탕에 깔려야 그 위에 다음 단계의 체계를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조직과 인사 측면에서 핵심을 짚어 주셨는데, 공무원이나 행정 서비스 제공자들이 함께 모여 일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현재 정부 조직은 19부 3처 20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MB 정부 시절에는 대부처화를 내세워 두 개 부처를 통합했다가 다시 복원하는 등, 기능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지엽적 조정이 반복되었습니다. 통신 부문이 어디로 갔다가, 청소년 업무가 어디로 갔다가 하는 식입니다.
훨씬 단순하고 통합적인 인사 체계를 갖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사 제도의 세부 규칙으로 들어가면 복잡하고 세세한 문제들이 많겠지만, 우리는 큰 원칙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정부 조직의 기본 원칙, 즉 정부조직법으로 표현될 수 있는 부분에서 어떤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노한동: 행정학에서는 ‘답이 없는 질문이다’라고들 많이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기존의 것을 자꾸 바꾸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행정학의 주류적인 견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부처가 너무 많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문화체육관광부에 있었습니다만, 문체부가 독립 부처로서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이 항상 있었습니다. 예산 지원 기능은 앞서 말씀드렸듯 모두 지방 자치 단체에서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서울시, 경기도, 전라남도 등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문체부에 남는 일은 청 단위도 안 될 수준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줄이고 줄인다면 교육부 역시 마찬가지겠죠. 많은 사회 부처들이 예산을 나누어 주고 집행하는 기능을 제외하면 아주 작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줄어든 것들을 두고 재구성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린 승진의 원칙 때문에 현실에선 일어나기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겠죠.
김세연: 그렇죠. 현실에서는 실 두 개를 하나로 통폐합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제약에 굴복하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일단 최대한 자유롭게 상상해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담에 임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주제를 너무 깊이 다루면 중요한 다른 논의를 놓칠 수 있으니,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줄이고 줄였을 때 어디까지 줄일 수 있는지, 그래서 콤팩트하면서도 유능하게 잘 작동하게 하는 그림을 함께 그려 보면 좋겠습니다.
요즘 트럼프 행정부의 움직임 때문에 국제 기사에 많이 나옵니다만, 미국의 경우 통상과 산업 기능을 포함하는 상무부가 있습니다. 미국 연방 정부에는 15개 부처가 있는데, 주택부, 교통부처럼 작은 부처도 있고 엄청 큰 부처도 있습니다. 행정부 편제는 그 자체로도 워낙 중요합니다. 행정부에서 우리 사회를 어떤 범주로 구성하고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지가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니까요. 이 부분은 별도 논의로 분리해 보면 좋겠습니다.
인사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이죠. 직급을 사실상 폐지하는 것에 대해 말씀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두 개의 직급도 둘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안에 따라 반복적인 업무는 반복적인 업무대로, 단발성 업무는 단발성 업무대로 리드할 수 있는 사람이 지정되면 되므로, 사실상 직급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예산과 맞닿아 있습니다. 내년도 예산은 700조 원이 넘습니다. 728조 원이죠. GDP 증가율이 예산 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GDP 대비 정부 지출 비율이 20퍼센트 중반대까지 올랐습니다. 절대적으로는 큰 정부가 아니라고 하지만, 향후 급증할 복지 재정 지출과 사회 보험까지 더해서 보자면 이미 민간 활력을 떨어뜨릴 정도로 공공의 비중이 비대화된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예산과 관련하여 중앙 정부의 기능이 이렇게 클 필요가 없으며, 예산 지원 사업들은 지방 자치 단체로 넘겨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앙 정부에서 지방 정부로 기능이 넘어갈 때 예산이 어느 정도 효율화될 수 있을까요?
예산 규모가 현재 수준 그대로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경우에는 생각해 볼 지점이 있습니다. 지방 자치 단체 공무원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지역마다 견제와 감시의 밀도가 중앙 정부보다는 떨어집니다. 같은 지역 기반의 오래된 네트워크로 인해 소위 말하는 카르텔이 훨씬 더 쉽게 자리잡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견제를 약하게 받는 폐단이 우려되므로, 예산을 줄이지 않고 그대로 주면 또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논의는 기존 국가 체계 안에서 하는 논의이므로 완전한 백지에서의 그림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노한동: 그 문제에 대해 첫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못 믿으면 끝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공무원을 못 믿으면 논의가 끝나지 않을 수 있으니, 일단 이 점을 말씀드리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책을 통해 밝힌 내용입니다. 당연히 지방 자치 단체장으로서 국세를 지방으로 많이 이양해 달라는 주장이겠죠. 그런데 기획재정부가 그렇게 지자체를 믿지 못하겠다면, 기재부 인원의 4분의 3을 지자체로 파견 보내 감시관으로 두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중앙 정부가 직접 보라는 거죠.
김세연: 중앙 정부가 파견한 재정관을 통해 독립적인 감시 기능을 강화할 수 있겠네요.
노한동: 저는 상당히 흥미로운 주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세연: 고려와 조선 시대의 상피제(相避制)처럼 적절하게 활용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노한동: 제가 순환 보직을 많이 비판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순환 보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감시 감독 역할 자체는 같은데, 지자체에 포섭되면 안 되니까요. 감독 기능에 대한 순환 보직은 일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세연: 감독 기능을 잠시 말씀드리자면, 공무원들의 행동이 지금처럼 위험 회피적이고 소극적으로 바뀐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지나친 감사입니다. 감사에서 지적받지 않기 위한 결과죠. 물론 이것이 부조리를 차단하고 예방할 수 있는 순기능도 분명히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균형점을 넘어가면 문제가 됩니다. 감사 부서나 감사원의 실적 쌓기를 위한 무리한 감사가 계속되면서 과잉 감사가 되고, 결국 정상적인 행정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 점은 향후 백지에서 그림을 그릴 때 어떻게 제어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노한동: 감사의 KPI를 건수 기준으로 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는 컨설팅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까? 감사 인력이 미리 가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알려 주고 대처 방안을 제시하는 컨설팅 위주로 가야지, 사후적인 감사로 가면 안 됩니다. 오히려 KPI를 잡을 거면 사후적인 것을 잡지 말고 사전적인 것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 감사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런 원칙이 왜 작동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정답이 나와 있는 문제인데 왜 그렇게 안 되는지 말입니다.
왜 그렇게 건수를 잡고 싶어 할까요? 제가 공무원 조직에서 일하며 크게 느낀 것은, 거의 모든 제도가 결국 불신의 제도화라는 점입니다. 사람을 일단 믿지 않는 제도라는 것이죠. 예컨대 감사원은 각 부처의 감사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같은 식구이니 분명히 봐줬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불신을 제도화한 것을 역으로 돌려야 합니다. 일단 신뢰하고, 문제가 드러나면 사후에 엄중히 처벌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모든 과정을 불신으로 관리하려 하니, 볼펜 하나를 사는 일조차 품의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제도로는 문제가 계속 누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김세연: 여러 가지 논점들이 파생되네요. 감사의 역할이 사후 적발에서 사전 컨설팅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큰 당위가 왜 현실에서 잘 작동하지 않을까요? 다른 영역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국세청의 경우를 보죠. 과거처럼 납세 이후에 문제를 적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납세자가 사전에 문의할 수 있도록 납세지원관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기준에 맞게 적정한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돕는 방식입니다. 기업까지 대상으로 포괄하는 대국민 서비스에 가깝습니다.
의료 분야를 보자면, 흔히 헬스케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발병한 뒤에 가는 것이라 ‘식케어(sick care)’에 가깝습니다. 진정한 헬스케어가 되려면 사전에 디지털 원격으로 바이탈 체크를 하고, 패턴 예측을 통해 문제가 되기 전에 미리 알려 줘 병을 예방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후 적발에서 사전 예방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선거법을 비롯한 일반 행정 규제를 보면, 포지티브 방식에서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포지티브 방식은 하라는 것만 하라는 방식이고, 네거티브 방식은 하지 말라는 것 외에는 다 허용하는 방식이죠. 이 전환이 가로막히는 데에는 경로 의존성이 크게 작용합니다. 기관이나 제도가 처음 만들어질 때 자리 잡은 인식이 일종의 DNA처럼 남아, 수명이 다할 때까지 거의 바뀌지 않고 그대로 갑니다. 우리가 이런 사고 실험을 하는 이유도 기존 제도에는 손을 댈 수 없어서입니다. 새로 그려 봐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국가 설계 단계부터 인간에 대한 불신, 즉 성악설에 기초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믿을 수 없다는 전제 아래, 독재자가 등장하더라도 제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없도록 견제 장치를 설계한 것이죠. 그 덕분에 트럼프의 쓰나미 같은 정치적 충격 속에서도 제도적 블록들이 서로를 지탱하며 1기 임기는 어떻게든 버텨 낼 수 있었습니다. 다만 2기에는 그것마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됩니다. 결국 문제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욕구와 동기로 움직이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제도의 기계적 순환 보직은 유착과 부패를 막기 위한 불신의 산물입니다. 검찰, 법원, 일반 행정 조직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일본 지자체에서는 시골 하수도 담당 공무원이 30년간 같은 일을 맡으며 세계적 전문가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각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성이 지역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누구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이상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버드대 총장은 20~30년씩 임기를 지냅니다. 전성기의 제너럴 일렉트릭에서는 CEO를 한 사람이 20년은 기본으로 맡아야 해서 40대 초반이 넘어가면 임명하기 부담스러워했다고 하죠. 전문 경영인이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걸고 10년, 20년씩 책임을 지는 문화입니다. 그러나 한국 재벌 기업의 전문 경영인 가운데 국민의 머릿속에 이름이 남아 있는 분들이 몇 분 없습니다. 부속품처럼 교체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무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미국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을 맡았던 파우치 박사 같은 사람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로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전문성을 존중받았습니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걸고 일하면 믿을 만합니다. 이러한 개인에 대한 신뢰는 우리 역사적, 문화적 전통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갈 수 있을까요?
노한동: 덧붙이자면, 사실 우리도 발전에 드라이브를 걸던 시기에는 순환 보직을 그렇게 돌리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믿고 가는 분위기였죠. 청와대가 강력하게 주도했고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유능한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기 이름을 걸고 오래 일했습니다. 관선 조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죠. 그때 서울시장 하시던 분들도 굉장히 오래 하셨고, 오원철,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같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김세연: 전설적인 분들이었죠.
노한동: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당시에는 전적인 권한을 부여받았고, 최고 권력자의 믿음으로 일이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굉장히 질투와 시샘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김시덕 교수가 쓴 《도시문헌학자 김시덕의 강남》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유력자들이 정보를 빼돌려 강남땅을 사고, 불로 소득을 챙기기 위해 강남 개발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죠.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서울시청 이전 계획 등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가운데 민간 부동산 업자들이 가격을 올리자 정부가 비자금을 조성할 수도 있지 않나 하면서 뒤늦게 들어갔던 것이지, 처음부터 부당한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강남 개발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역사가 지나온 과정을 보면 문화적으로 사람을 못 믿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제는 깨끗해져야 한다’라고 하면서 공무원이 공격의 주요 타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는 노력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한 사람이 자기 명예를 걸고 일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면, 역설적으로 그 사람은 직업 공무원이 아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외부에서도 일하고 내부에서도 일하면서 자신의 명성을 쌓고, 그것에 대해 사람들이 신뢰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한 직장에 들어가면 호봉제와 연공급제로 평생을 책임져 주는 제도, 마치 지대를 보호해 주는 것 같은 제도를 정부, 기업, 학교 모두가 부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명성과 신뢰와 권한이 쌓이고 전문성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김세연: 특정 분야에서 신뢰와 명성을 쌓은 분들이 엄청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 추락하는 사례들이 최근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른바 ‘동학 개미 운동’에 불을 붙인 존 리나, 외식 프랜차이즈 기업을 상장시킨 백종원 대표 같은 경우입니다. 이분들이 받은 빛과 그림자가 너무 분명한데, 권위가 무너지는 과정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비난을 더 증폭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노한동: 결국 이것이 공화정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긴장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공화정을 지키려면 자유주의의 가치를 수호할 사람들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맡는 것은 대체로 사회의 엘리트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다릅니다. 엘리트들이 오히려 공화정을 공격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을 공격하는 식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단순히 포퓰리즘 탓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엘리트의 저질화는 국가 말기 증상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법원 판결의 문제만 보더라도 같은 법관의 판결이 한때는 ‘역사적 명판결’로 칭송되었다가, 시간이 지나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헌법 체계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마지막 보루인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을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것은 마치 인체의 자가 면역 반응과 같습니다. 자기 몸을 스스로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국가로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백지에 밑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잠시 현실을 보겠습니다.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점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고민해야 할 지점은, 어떻게 해야 그 종말이 공동체 구성원에게 고통이 가장 적은 형태가 될 수 있을지입니다. 아직은 이런 논의가 잘 안 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핵심 질문은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입니다. 미국이 250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에서 쌓아 올린 제도의 방벽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우리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노한동: 행정만 놓고 보자면, 미국은 직업 공무원에 대한 신뢰가 낮습니다. 엽관제(葉官制, 정권을 잡은 정당이나 정치 세력이 공직을 자기 사람들로 채워 넣는 제도) 전통이 강한 나라입니다. 그런 식으로 순환을 많이 하면서 전문성을 쌓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재무부 장관을 지낸 재닛 옐런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과 하버드대, UC버클리대 교수를 거쳤습니다. 반면, 현 재무부 장관 스콧 베센트는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입니다. 이처럼 엽관제적 특성을 잘 활용해 외부 인사를 데려와서 전문성을 발휘하게 합니다.
미국은 실장급, 국장급 중에서 10~20퍼센트를 직업 공무원이 아닌 정부가 임명하는 외부 전문가로 채웁니다. 우리는 정무직 외에는 이런 제도가 없습니다. 개방형 임용 제도가 있지만 사실상 주요 보직은 모두 직업 공무원이 맡습니다. 이 모델이 이제 한계에 왔고요. 이런 점이 미국과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미 비교적 유연한 인사 체계를 갖춘 미국에서도,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이른바 ‘스케줄 F(Schedule F)’ 제도를 추진했습니다. 연방 공무원 가운데 정책 결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직무를 ‘정치적 임명 가능(Excepted Service)’ 직군으로 새로 분류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기존의 경직된 신분 보장을 완화하고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대폭 넓히려 했던 것입니다. 미국과 비교할 때 우리는 훨씬 더 경직된 인사 체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도적 유연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세연: 한국은 미국과 비교할 때 인재 풀의 단절도 훨씬 심해서 유연성을 접목하기가 더 어려운 환경인 것 같습니다. 학계와 관료계의 교류만 보더라도 분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선거에 출마한 것도 아닌데, 임명직 공직에 진출했다가 다시 학계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폴리페서’라고 학내에서 공격을 받습니다. 한국 학계에서는 정치권과 거리를 둘수록 학문적 권위를 보존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 각 분야 최고의 학자들이 정치·행정 영역과 거의 교류하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학문적 성취보다 현실 권력에 관심이 더 많은 분들이 선거 때마다 서류철을 들고 가서 자기 어젠다를 공약에 집어넣고 한 자리를 받는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이를 ‘학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서 출세하려고 한다’라고 평가하고요.
미국의 상황은 다릅니다. 미국의 인재 풀 교류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 보면, 상시적이고 유기적인 교류가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조교수 정도의 경력과 나이에 행정부 과장급으로 들어갔다가, 뜻을 같이하는 정권이 집권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학교나 연구소로 돌아갑니다. 그러다 다시 부교수쯤 되었을 때 국장으로 가는 식입니다. 이렇게 국가 인재 풀이 막혀 있지 않고 흐릅니다. 인재 풀을 넓게 쓰는 거죠.
반면, 한국은 인재 풀이 토막 나 있습니다. 한 번 경계를 넘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단절 구조가 고착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엽관제적 요소와 사람에 대한 순혈주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이 단절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의견 부탁드립니다.
노한동: 방향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엽관제 모델과 정반대에 있는 것이 일본식 모델입니다. 일본 모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직업 공무원만을 기용합니다. 한 번 들어가면 30년 뒤 자신의 자리가 어디쯤일지 대략 가늠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성적이 좋은 사람은 이 자리에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 저 자리에 간다는 식으로 말이죠.
김세연: 예측 가능성이 아주 크네요.
노한동: 그래서 역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신 직업 안정성은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 직업 공무원들이 몸을 갈아 넣듯 일하게 되고, 권한 역시 주어집니다. 일본의 경우 정치권의 힘이 아주 강하지는 않은데, 직업 공무원들이 성실히 일한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제가 들은 바로는 중앙 부처 국장들이 국회의원들을 직접 ‘과외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나름의 합리성이 담긴 모델이 따로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사람은 가두어 놓고 권한은 주지 않으니, 모두 머리를 굴려 일하지 않는 시스템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분명히 정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사회와 국민이 선택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공무원 물이 덜 빠졌을 때는 일본식 모델에 가깝게 가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서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꼭 직업 공무원일 필요도 없고, 돌아다니며 순환시키는 구조가 오히려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일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지금의 체제를 그대로 두면 우리는 피크아웃(peak out) 국면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락세가 불가피해 보이는 만큼, 무엇이든 시도해야 한다면 우선 칸막이를 없애고 교류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앞서 지적하신 학계와 행정 간의 교류 문제에도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 점이 늘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김세연: 지금까지는 기존 시스템의 문제와 이를 어떻게 고쳐볼 수 있을지, 현실적 진단을 중심으로 논의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져 작동할 때, 시간이 지나도 오염되거나 타락하지 않고 잘 견딜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초기 설계 단계에서부터 최대한 좋은 설계를 해야 하겠죠. 물론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운영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으면 금세 망가지지만, 설계 단계에서 부패와 왜곡을 예방할 수 있는 장치를 담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치가 가능할지는 앞으로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노한동: 만약 제로 베이스에서 새롭게 출발한다면, 저는 기술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클라우드, AI, 블록체인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기술을 행정에 접목하면 불필요한 업무를 크게 줄일 수 있고, 감사 기능 또한 투명하게 공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정부 차원의 클라우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챗GPT와 같은 민간 도구는 보안 문제로 쓰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 내부에서만 자료를 안전하게 올리고 공유할 수 있는 별도의 클라우드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공공사업, 법령, 예산을 기준으로, 개별 공무원들이 각자의 컴퓨터에만 보관하던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올리고, 새로 작성되는 문서들도 모두 축적하는 방식입니다.
현재의 ‘온나라’ 문서는 공식 전자 문서 유통 시스템이지만, 실제로 공무원들이 하는 일의 10퍼센트도 올라와 있지 않습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쁘게 꾸며진 문서들일 뿐입니다. 실무자들에게는 각자 자기 폴더 안에 정리해 놓은 문서들이 있습니다.
김세연: 그 문서들은 정권 바뀔 때 파기되기도 하죠.
노한동: 공무원들이 날것 그대로의 문서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클라우드에 올리고, 이를 권한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열람할 수 있게 하면 됩니다. 예컨대 ‘서비스 경제’와 관련된 정책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AI가 해당 키워드를 기준으로 문서를 자동으로 묶어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료가 모두 클라우드에 축적되어 있다면, “우리 정부가 서비스 경제에 얼마만큼의 예산을 쓰고 있고, 어떤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곧바로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기술적으로는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필요한 잡무가 사라집니다. 예산 작업을 할 때도 기획재정부와 각 부처가 매번 엑셀 파일을 주고받고, 한글 문서를 새로 작성하는 절차가 필요 없어집니다. 기획재정부가 예산을 편성할 때, 클라우드에 이미 올라가 있는 자료에 직접 접근하면 모든 정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존의 관료적 관행에 휘둘리지 않고 더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앞서 논의했던 지자체와 중앙 정부 간의 권한 문제 역시, 이 시스템을 통해 자연스럽게 완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투명성은 블록체인으로 확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를 블록체인에 기록하면 됩니다. 공상처럼 들릴 수 있지만, 제로 베이스에서 제도를 새로 설계한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방식입니다.
김세연: 결코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결심만 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실에서 실행되지 못하는 이유는 저항 세력이 너무 크고 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기에 격렬히 반발하게 되고, 결국 추진이 쉽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백지에서 새롭게 그릴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노한동: 제가 만약 이 구상을 백지상태가 아니라 현실의 대한민국 정부에 제안한다면, 최소한 예산 작업만이라도 이렇게 시도해 보자는 의견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획재정부가 시스템을 구축해 각 부처가 예산별로 검토한 자료와 소관 부처의 세부 내용을 차례대로 올리도록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획재정부와 각 부처 모두 업무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겁니다. 자료를 기획재정부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면, 예산 편성 과정 역시 훨씬 간단해지겠죠.
김세연: 공유 엑셀 문서를 두고 서로 의견을 달아 조율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보면, 엑셀이나 구글 검색의 시대 자체가 이미 저물어 가는 듯합니다. MS 오피스나 한글 워드 프로세서 같은 도구들은 ‘21세기의 원유’라 불리는 데이터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LLM을 구동하는 텍스트 기반 데이터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hwp 파일은 이 중요한 자산을 ‘갈라파고스화’시켜 버렸습니다. 사실 그 보호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입니다.
이 문서들을 잘 활용한다면, 다른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처럼 계속 고립된 채, 고립된 줄도 모른 채 쓰다 보면 시대착오적인 상황에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이 좀 이해가 안 갑니다.
방금 말씀하신 방식으로, 예산 편성 절차나 각종 협의·조율 방식을 조금 바꾸는 것만으로도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것 같습니다. 민간에서 돌아가고 있는 시스템의 효율성을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보다 훨씬 적은 예산과 인력으로도 정부 기능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한동: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시스템이 실제로 구현된다면, 기획재정부의 정책 조정 관련 조직 구성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재 기재부에는 정책 조정 기능을 담당하는 ‘국’이 네 개나 있는데, 제 판단으로는 그중 세 개는 없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조직이 주로 하는 일이 자료 취합인데, 클라우드 기반 시스템만 구축되면 누구든 필요한 자료를 실시간으로 열람하고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김세연: 사실 이런 이야기가 요즘 기준으로는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마이클 포터가 처음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을 주창했을 때 소개했던 사례 가운데 하나가 보험 회사의 클레임 처리였습니다. 과거에 문서로 처리할 때 몇 주씩 걸리던 절차를, 프로세스를 재설계해서 단 며칠 만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례는 분야를 막론하고 수없이 많습니다.
노한동: 그리고 ‘연혁이 쌓인다’는 점이야말로 큰 장점입니다. 지금은 업무의 기록이 개별 공무원의 컴퓨터 속에 흩어져 있어,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준입니다. 놀랍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한자리에서 파악할 수 있는 연혁은 길어야 10년 남짓에 불과합니다. 15년, 20년 전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컴퓨터를 교체하면서 하드가 날아가고, 문서 관리 체계가 부실해 자료가 사라진 경우가 많습니다.
온나라 문서 시스템에는 실질적인 자료가 거의 올라와 있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20년 전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확인하려면 암묵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공 기관에 오래 근무하신 분에게 전화를 걸어 “참여정부 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하셨는지 기억나십니까?”라고 묻는 식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겁니다.
김세연: 조선왕조는 적어도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통해 국정 운영의 모든 대화와 세세한 상황까지 다 기록했는데, 현대 국가인 대한민국의 행정 기록이 이렇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노한동: 제가 말하는 행정 기록은 단순히 결재받은 공문서가 아닙니다. 날것 그대로의 로우 데이터, 곧 우리가 실제로 어떤 고민을 했는지, 기획의 취지가 무엇이었는지, 왜 이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 같은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연혁이 쌓인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세연: 기록이 힘이고 데이터가 자원인 시대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바인데, 듣고 나니 놀랍습니다.
노한동: 그러다 보니 민간에게 휘둘립니다. 민간은 한 사람이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일하니까요. 공무원이 “우리 입장은 이거다”라고 하면 민간에서는 “아니다. 10년 전에는 그걸 반대로 말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클라우드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된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기록이 차곡차곡 쌓이게 되겠죠. 기존 자료와 새로 축적되는 자료를 한곳에서 바로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정부의 소중한 행정 자료들이 개인 컴퓨터의 하드 관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김세연: 말도 안 되는 일은, 행정 기록의 보존 연한이 보통 5년으로 정해져 있어 그 기간이 지나면 파기된다는 점입니다. 종이에 필사하고 등사하고 출력물을 쌓아 두던 시절에는 보관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까지 이런 기록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없애 버린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노한동: 모순이죠. 이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쉬운 이야기입니다. 다만 제가 걱정되는 것은 이런 것을 하자고 하면 실제로는 구현도 안 되면서 쓸데없는 일 하나 늘어나는 쪽으로 귀결될까 봐 그것이 정말 두렵습니다.
김세연: 미국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에드워드 스노든의 ‘프리즘(PRISM)’ 폭로로, 구글이든 어디든 이미 선이 다 연결돼 있어 미국 정부가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미국 정부는 아마도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의 클라우드를 쓰고 있겠죠. 마찬가지로 공무원들이 문서를 작성하기만 하면 네이버든 카카오든, KT든 SKT든 어느 플랫폼이든 자동으로 아카이빙되도록 만들면 되는 거죠.
노한동: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스스로 올리도록 두면 자료를 선택적으로 올릴 수 있습니다.
김세연: 클라우드에 자동으로 아카이빙되지 않는 문서는 아예 쓰지 못하도록 해두면 모든 기록이 빠짐없이 남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하면 민간 기업의 서버에 자료가 저장된다는 점에서 논란이 될 수 있겠죠. 그래서 정부가 자체적으로 서버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텐데, 이 경우에 과연 제대로 작동할지에 대한 우려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사 조직, 예산,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역할, 행정부 내외부의 인사 풀 공유, 인사 기록 시스템, 그리고 기록 저장 및 관리, 기술적인 부분까지 쭉 한번 살펴봤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인사 문제를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우선 공무원과 비공무원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공무원 내부의 계층 구조, 즉 직급 체계를 두 개 또는 하나로 층의 구분을 두지 않고 유연성을 극대화할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아울러 외부 전문가들이 행정 사무를 합법적으로 맡아서 책임질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공무원’이라는 용어 자체를 다시 정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노한동: 지방 자치 단체 공무원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수도 정비처럼 현장을 유지·관리하는 업무는 지속적으로 담당할 인력이 있어야 하니까요. 또 국가의 핵심 기능을 맡는 경찰, 소방 공무원 같은 분들은 민관 교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유 업무에 전념하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지자체 공무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의미의 ‘공무원’으로 남는 것이 좋고, 중앙 정부 공무원은 국가 차원에서 순환하며 활용될 수 있는 ‘공유 인재 풀’ 정도로 정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정부 운영의 효율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래야 엘리트들이 꾸준히 공부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은 20대 후반에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공부를 멈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이 공부하게 하려면 순환 구조로 돌려야 합니다.
김세연: 행정 고시를 통과한 분들은 이미 지적 역량이 입증된 인재들입니다. 이들이 사고가 굳어지기 전에 다양한 현장을 경험하게 하면 어떨까요? 스타트업, 다른 형태의 기업, 복지 시설, 학교, 군, 경찰 등 여러 분야에서 1~2년, 혹은 2~3년씩 순환 보직을 하도록 하는 것이죠. IT 분야에서도 일정 기간 일해 보면 좋겠고요.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다양한 관점을 종합적으로 갖추게 되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입체적 시야를 기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한동: 사실 이런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참여정부 때 공무원을 현대자동차나 대한항공에 파견했는데, ‘돈 많이 받고 가서 논다’라는 십자 포화를 받아서 제도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실제로 그분이 정말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제도가 사실상 사라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국 공무원을 제도 안에만 가둬 두니 이런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제 또래, 경력 10년 안팎의 공무원들이 유학을 많이 가는데, 자기 계발을 목적으로 떠나는 경우는 손에 꼽습니다. 대부분은 가족과 함께 쉬러 가는 것이죠.
《우리는 미국을 모른다》라는 책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한 김동연 작가가 쓴 책인데, 거기서도 한국 외교관, 공무원, 기자들이 미국에 와서는 현지 인맥을 쌓기보다 자기들끼리 모여 골프 치고 논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고여 있으니, 현지에서 행정학 같은 범용적인 학문 이외에 어떤 특정한 전공으로 학위를 딸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2년 동안 최대한 편하게 지내며 자녀 영어 교육에만 몰두하게 되는 이런 구조를 깨려면, 앞서 말씀드린 순환 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
김세연: 엘리트들이 공부를 멈추면 안 되죠. 지대 추구, 무임승차, 도덕적 해이에 그대로 빠져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일단 성채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성장을 안 하는 것이죠. 국가주의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지만, 우리와 비슷한 경쟁 위치에 있는 다른 나라의 엘리트들을 보면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그들의 지적 성장은 끝이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어떤 주제를 꺼내도 막힘이 없고, 세부적인 맥락까지 정확히 이해하며, 자신의 관점을 논리적으로 이야기합니다. 60대의 경륜 있는 인물이든, 40대, 30대, 20대의 한창 성장하는 사람들이든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좀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우리 현실과 비교하면 부끄럽기도 합니다. 저는 사실 이 사람들만큼 세세히 다 알고 있지 못해서 어떤 주제를 가볍게 툭 던져 봤는데, 너무나 해박하게 알고 있어서 부끄러울 때도 있었습니다.
노한동: 그런 분들에게 국회 상임위 전날에 답변서를 드리는 문화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분들인데, 굳이 새벽까지 ‘이렇게 답변하시면 됩니다’라고 적어 갖다 드린들 그대로 답변하겠습니까? 반면 우리 현실은 다릅니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불안해합니다. 내가 이 업무와 이 영역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모두가 안고 있는 듯합니다.
김세연: 그러면 공직에 나오지 말아야죠.
노한동: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하나하나 챙겨 주기를 원합니다. 모두 연결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김세연: 이 주제를 다시 정리하자면, 행정과 정치의 엘리트들이 성장을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와 문화를 어떻게 장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사실 고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한두 가지를 손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안주하게 만드는 시스템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격제, 라이선스 제도, 변호사·회계사 같은 전문직, 공무원, 신분이 보장되는 교수까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어떻게 바꾸어 지속적인 성장을 유도할 수 있을까요?
노한동: 제가 보기에는 지대처럼 보장된 커리어 자체를 없애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중앙 부처에 직업 공무원이라는 개념을 아예 두지 않는 것입니다. 공무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더라도 반드시 외부로 나가 공부하고 돌아와야 국장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반대로 여기서만 20년 근무한다면, 아무리 오래 버텨도 국장은 될 수 없다는 식의 제도가 필요합니다.
김세연: 사실 골드만삭스 회장을 지낸 분이 미국 재무장관을 맡는 것에 대해 잘된 일이라고 하지, 누구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엔터테인먼트 분야 정상급 회사의 전문 경영인이나 창업자가 관련 공직을 맡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물론 이해 상충 문제를 기술적으로 조율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가 이를 용인할 수 있느냐, 그리고 해당 인물에 대해 신뢰를 부여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노한동: 제도의 문제도 있겠지만, 문화의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은 이해 상충 문제를 사전에 시시콜콜 따지지 않고 나중에 선거로 판단을 받는 문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시콜콜 사전에 따지니 아무것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김세연: 우리 문화에서는 이런 시도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최근 읽은 책에서 본 태종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조선 후기 세도 정치 시절, 외척들이 권력을 차지했던 것도 결국 틈이 보이면 외척이 개입하는 구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종이 왕권 기반을 확고히 하려고 처남 넷을 죽이는 식으로 대응했다는 겁니다. 이런 문화를 더 깊이 연구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우리 문화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바꾸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백지상태로 돌아가서 인사 문제를 다시 살펴봤습니다. 행정학에서는 조직의 형태를 되도록 손대지 않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집니다. 인간의 인지로는 복잡한 연결 관계를 모두 그리거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조직을 지식 그래프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기술의 도움을 전제로 최소한의 구획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유연성과 효율성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수 있습니다.
물론 n차원이 되면 복잡성이 올라가서 인간의 시각적 인지로는 조직도를 읽는 것조차 어려워지겠죠. 하지만 기술로 처리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LLM도 예측이 어렵지만, 인간의 인지로 파악이 안 되는 영역까지 다음 단어를 토큰화해서 예측하고 생성하는 모델을 만든 것이니까요. 생성형 AI가 인간의 인지를 넘어서는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직의 구성과 운영 역시 전통적인 피라미드 구조가 아니라, 기술을 활용해 n차원으로 재편할 수 있지 않을까요?
노한동: 사실 이것은 이미 현실에서 나타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체육, 보건, 복지 영역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면 보건의 영역으로 넘어가 보건복지부가 담당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람이 건강한 식습관을 갖고 운동을 통해 자기 수명과 건강을 관리하는 부분은 예방적 의료의 영역입니다. 지금은 두 영역이 구분되어 있지만, 사실 사회가 만든 인위적인 구분일 뿐입니다.
우리 사회가 만든 조직도상에서는 체육과 의료를 분리해 놓았지만, 현장에서 보면 두 영역은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입니다. 요즘 의사 선생님들이 방송에 나와 운동법을 알려 주고 식단을 권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병원에 가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체육, 헬스, 케어가 모두 하나로 가고 있는데, 우리가 행정적으로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잘 포착한다면 구조를 단순화할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사회에서 이슈가 되거나 문제가 되는 지점을 기준으로 LLM에 한번 뽑아 보라고 하면, 보건과 체육처럼 당연히 함께 다뤄야 하는 사안이 훨씬 많이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스케치 다이얼로그〉는 ‘아젠다 2050’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2050년이 되기 전에 우리가 해결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문제들을 시도해 보자는 취지입니다. 연구 단체에서 사단 법인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젠다 2050’이 처음 출발했을 때의 문제의식은 새로운 기술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술이 변하면 산업이 달라지고, 특히 AI와 로봇이 일상으로 들어오면 노동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이 달라지면 복지가 달라져야 하고, 복지가 달라지면 재정이 바뀌어야 합니다. 결국 모든 요소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하나의 현상을 분절화된 시스템으로 풀려면 해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연결되어 있는 것을 연결하지 않고 풀려면 복잡해서 해결할 수 없죠. 따라서 여러 개의 차원을 하나로 꿰듯 관통할 수 있는 ‘웜홀’ 같은 해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아젠다 2050’이 출발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옵시디언’이라는 툴이 등장했고, ‘슬랙’, ‘노션’ 같은 도구가 업무 방식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게시판 형식이 소통의 기본 플랫폼이 되었고, 노션은 이를 더 직관적이고 시각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옵시디언은 특히 ‘마크다운’이라는 문서 표준을 채택해 개방성을 보장했습니다. 다른 플랫폼으로 언제든 자료를 옮길 수 있죠. 옵시디언은 그래프 뷰를 제공해서 인간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연결 관계를 쌓아 갈 수 있게 합니다. 네트워크 이론 기반의 철학으로 나아가니 ‘리좀’ 개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요. 사실 저 역시 아직 깊이 탐구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범주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도, 새로운 도구 덕분에 이제는 현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제가 몸담은 회사 조직에 적용해 보는 실험을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존 조직도를 새롭게 바꿔 보려는 시도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A라는 프로젝트는 B와 C라는 두 개의 모듈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D라는 모듈 안에 다시 C가 포함됩니다. B는 또 다른 모듈 F와 연결됩니다. 이런 식으로 관계가 점점 얽히고설키며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조직도는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이 위에 1차원 선으로 그린 기존 조직도는 인간이 인지적으로 노력을 가장 덜 들이고 그린 결과입니다. 이걸 다르게 풀면 2차원 조직도 있고, 매트릭스 구조도 가능하고, 더 나아가 다차원 구조로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연결 관계가 너무 복합적이라 유형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의 체육 수업과 예방의학과, 의대 체계를 보겠습니다. 가정의학과와 심혈관내과는 연결되어 있을 수 있고, 여기에 재활의학과, 물리치료, 스포츠 역학이 같이 엮여 있습니다. 공유되는 요소도 있고, 공유되지 않는 요소도 있습니다. 노드와 노드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방식과 속성이 너무나 다양해서, 인간의 인지로 알아보기 쉽게 단순화하면 본질을 왜곡할 위험이 큽니다. 따라서 복잡한 것은 복잡한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쥐의 뇌세포 1mm를 떼어 시냅스 연결을 형광색으로 시각화한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신경망이 우주의 성운들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정부 기능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신경망 연결이든 정부 기능이든 사실 인간 생활상이 그대로 담기는 축소판 또는 하나의 뷰(view)입니다. 정책적 뷰로 사회상을 보는 것이죠. 예를 들어 교육과 복지, 교육과 문화, 문화와 복지, 교육과 국방, 국방과 창업, 산업과 과학 기술과 국방 등 이 관계는 끝도 없습니다. 부처 이름으로만 말해도 이 정도인데, 더 쪼개면 거의 무한한 연결이 나올 것입니다. 조직은 정말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조직 문제를 별도로 깊이 논의하는 시간을 가져 보면 좋겠다는 말씀을 앞서 드렸습니다.
노한동: 말씀하신 내용을 실현하려면 결국 노드와 노드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민의 생활상을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 노드들이 나올 텐데, 정부의 업무가 어떻게 노드로 얽혀 있는지를 보려면 앞서 말씀드린 ‘클라우딩’부터 되어야 합니다. 개개인이 보관하던 데이터가 클라우드에 올라가야 노드와 노드 간의 연결 관계가 제대로 보일 겁니다. 어디에서 미스 매칭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드러나겠죠.
김세연: 앞서 사라져 버린 정보들은 사실상 되살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존재하는 데이터들을 한곳에 모아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면, 그 속에서 유의미한 관계들이 포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엮어내면 지금의 경직된 사일로 구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구체화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 — 공식적인 용어로 정립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 ‘부처 소관 법률 독점주의’를 폐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청소년 관련 법안을 보더라도 교육부가 담당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학교 밖 청소년은 청소년위원회나 복지부, 여성가족부가 따로 법안을 냅니다. 심지어 다른 부처의 법안을 거의 복사하듯 내기도 합니다. 개인정보 역시 금융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행정안전부가 제각각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법체계가 누더기가 되는 것은 곧 조직 구조가 분절되어 있다는 반영입니다. 각 부처가 ‘자기 법’을 반드시 하나쯤 쥐고 있어야 한다는 관성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트렌드가 바뀌면 선점 경쟁을 하듯 앞다투어 법안을 내놓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미국의 경우 하나의 법률이 여러 상임위를 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최근에는 법률 하나의 소관 부처가 복수로 지정되는 빈도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기존 시스템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 그런 흐름이 나타나는 것이겠죠. 그러나 소관 부처에 포함되지 않으면 별도 법안을 만들거나 특별법을 만들려고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원인이 아니라 현상이자 결과입니다. 따라서 법률 체계 개혁에 있어 법제처가 일종의 ‘혁신 센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존 시스템 개선을 목적으로 한다면 LLM이 예산을 다루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수학과 과학에 특화된 모델을 파생시켜 만든다면 잘할 수도 있겠죠. 앞으로는 예산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에이전트, 혹은 에이전트 집단 같은 형태의 모델이 필요할 겁니다. 법률을 다루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존하는 법률이 1700개 정도 됩니다. 법률을 전부 집어넣고 통폐합해서 최소화하는 시도를 해볼 수도 있습니다. 100개로 만들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아마 안 되겠지만, 10개로 만들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과가 이상하게 나오면, 50개로 만들게 하는 거죠. 이 문제는 관심 있는 연구자라면 논문 주제로 삼아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노한동: 연장선상에서 법원 판결문 공개 논의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전체 판결문의 30퍼센트 정도가 공개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하급심이나 민사 사건의 판결문은 공개율이 현저히 낮습니다. 그런데 판결문 공개에 반대하는 분이 과연 있을까요? 일반 국민 중에 판결문 공개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김세연: 다만 프라이버시와 직접 연결되는 민사 사건, 특히 개인정보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이슈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사 사건은 성격이 다릅니다. 형법 영역은 완전히 열어야 하고, 대법원의 양형 기준도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계속 튜닝해 나가야 합니다.
노한동: 한편에서는, 그동안 얼마나 장난을 쳐왔는지가 드러날까 봐 법조계에서 반대한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김세연: 물론 소급해서 처벌하는 것은 원칙상 옳지 않지만, 지금이라도 개방해서 장난을 못 치게 해야죠.
노한동: 우리 사회의 리더들, 엘리트들이 해야 할 일은 판결문을 공개하는 방향으로 사법부를 압박해서 투명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개별 판결을 두고 공격하는 것이 과연 그들의 역할인지, 심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김세연: 복잡한 문제입니다. 저희 대담은 한 번에 정답을 명쾌하게 내놓는 자리가 아니라, 자유롭게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행정 분야를 중심으로 첫발을 뗐습니다. 앞으로도 논의를 이어 가며 다른 분야와 맞물리는 지점을 찾아 고민하고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답변이 쉽지 않은 주제들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주시고, 깊이 있는 의견을 들려주신 노한동 작가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노한동: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