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연: 이번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는 김서준 해시드 대표님과 함께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김서준 대표님은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솔루션을 10여 년 이상 고민하고 제시해 오셨습니다.
오늘 대담 주제는 한계 상황에 도달한 지금 이 시대의 정치 체제에 관한 것입니다.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기존 방식의 정치 체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지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트럼프 현상’이라는 국면이 나타났습니다.
시대적 흐름을 특정 개인이나 소수의 집단이 막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 대통령은 유권자 투표(popular vote)에서도 앞섰습니다. 이런 흐름이 생겨난 것은 경제의 하부 구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기존 지배 구조 내 엘리트들의 판단을 더는 신뢰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유럽에서 나타나는 극우적 정치 변화도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고, 대한민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근본적인 시각과 판단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구제를 개편해야 한다거나, 정부 형태를 대통령제에서 의원 내각제 혹은 분권형 대통령제로 전환해야 한다거나, 지방 분권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지금까지 논의해 온 주장들이 시대적 상황과 잘 맞지 않게 된 면이 있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인구 급감 시대에 접어들었고 지방 소멸이라는 현실과도 맞물리면서 지방 분권과 같은 의제는 자칫 한가롭게 들릴 수도 있는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 대표님께 첫 번째로 질문드리고 싶은 주제는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신지에 관한 것입니다. 블록체인의 기술적 요소에 굳이 무게를 두지 않고 말씀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최근 미디엄에 게재하신 글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었던 대목은, 새로운 의사 결정 구조들에 대한 제안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토큰을 스테이킹하는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기본적인 의사 결정 권한, 즉 일종의 투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에 관한 내용이었죠. 투표권을 배분한 뒤 이를 특정 주제에 대해 일정 기간 미리 약정하고,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제곱근을 적용해 의결권을 점진적으로 낮춤으로써, 단기 참여자에게도 불이익이 가지 않도록 문제를 조정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현재의 민주주의 시스템, 즉 대의민주제는 정해진 임기 내에서 입법권이든 행정권이든 일정한 권한이 위임되는 구조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행정권입니다. 앞으로는 AI가 정책 집행의 보조자 또는 동반자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하겠죠.
현재 우리나라나 미국은 4~5년의 임기 동안 모든 집행 권한을 일괄적으로 위임하는 방식입니다. 대표님의 생각은 분야별로 그 권한을 분산하자는 것인데요, 이를 통해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또, 임기제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에 의해 반복적으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10년, 20년, 30년에 걸친 장기적인 의사 결정도 가능하게 하는 방식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와 관련한 보다 세부적인 논의는 추후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조금 더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이 개념에 대한 대표님의 생각을 편하게 들을 수 있으면 합니다.
김서준: 최근 제가 출장을 가장 자주 가는 곳이 바로 아랍에미리트연합(United Arab Emirates, UAE)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죠. 실제로 작년 통계를 보면, 전 세계 백만장자의 유입(inflow) 측면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경제 성장의 밀도 또한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UAE를 방문하면서 국가가 분기마다 눈에 띄게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한국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거의 모든 시간을 한국에서 보낸 사람으로서, 국가 시스템이나 거버넌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여겨 온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절대 선이자 최상의 의사 결정 방식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해 왔고요.
그런데 UAE처럼 왕권 체제로 운영되는 국가가, 현실적으로는 민주주의보다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이 있다는 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지니고 있던 세계관이 크게 흔들리는 경험이었습니다.
근본적인 차이를 생각해 보면,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인센티브가 체계적으로 정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구조는 바로 왕권 체제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요. 왕권 국가들은 통치권을 세습할 수 있어서 10년, 20년은 물론 50년, 100년 이상의 장기적인 거버넌스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UAE는 ‘UAE Vision 2071’이라는 100년 계획을 수립해 실행하고 있고, 사우디아라비아도 ‘Vision 2030’을 넘어 NEOM 프로젝트 같은 초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기적 성과보다 장기적인 발전을 목표로 삼는 것이 자연스럽고, 100년까지도 내다보며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당연하도록 인센티브가 작동합니다.
반면, 4~5년 주기로 선거를 치르는 국가에서는 재선에 성공하는 것이 정치인의 최고 목표입니다. 심지어 그마저도 실질적인 인센티브가 되지 않는 상황에 놓인 경우도 많죠. 그래서 정치 행위가 초단기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실질적으로는 1~2년, 2~3년 정도입니다. 임기의 절반이 지나면 레임덕이 시작되기 때문에, 정책을 내놓아도 임기 초반에나 실효성이 있고요.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임기 내에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다음번 선거에서 정권이 바뀌게 되면 후임자에게 인센티브가 돌아가는 것처럼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책적 ‘이어달리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운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에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같은 표현이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표현 자체가 사라지다시피 했죠. 모든 것이 단발성으로 흐르다 보니, 다양한 문제들이 부각되고, 장기적으로 개선이 필요한 사안들은 자연스럽게 뒷전으로 밀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가올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적 정책들만 반영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인 것 같습니다.
대중도 이러한 구조를 이미 학습한 상황이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장기적인 혜택이나 정책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당장의 선거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전략으로 진화해 가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이익 집단들이 존재하고 있고, 시위 등의 형태를 통해 사실상 표를 거래하는 것 같은 형태가 각계각층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점점 더 악순환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측면은 점차 평균으로 회귀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민주주의가 단순히 1인 1표 원칙에 기반할 경우, 의사 결정이 평균값에 수렴하는 경향이 생기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중위 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로도 설명되는데, 정치학자 앤서니 다운스가 제시한 이 이론처럼, 양당제에서는 정당들이 중위 투표자의 선호에 수렴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발생하는 평균 회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은 분들의 이익 쪽으로 사회가 쏠리는 겁니다. 아무래도 대부분이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바로 체감할 수 있는 정책 쪽으로 무게가 기웁니다. 사실, 장기적 정책은 당장의 현실과는 이익이 상충하는 경우가 많죠. 소위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장기 과제가 많은데, 인구의 과반이 그런 고민을 하지는 않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부터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겠죠. 그러다 보니 포퓰리즘 정책들이 더 먹히는 것이고요. 장기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를 더 제시해 보자면, 선거 주기는 4~5년인데 사회 발전 속도나 새로운 어젠다가 등장하는 주기는 4~5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1~2년도 아니고, 거의 한두 달 간격으로 세상이 바뀌는 수준이죠. 여기에 상당한 미스매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스타트업 대표들끼리 이야기할 때도, 3년 계획조차 허무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거든요.
당장 올해 계획조차 세우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매달 새로운 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AI 분야의 경우, 거대 언어 모델(LLM) 서비스가 한 차례 업데이트될 때마다 수백 개의 스타트업이 문을 닫을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경제적, 문화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4~5년 단위로 정책을 설정하고 모든 결정을 위임하는 구조는 시대적 흐름과 톱니바퀴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임기 중이라 해도 사회 변화나 주요 사건의 흐름에 따라 민주주의가 정치적 의사 결정에 개입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 4~5년간은 방치된 시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선거를 통해 시민들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주기를 보다 짧게 만들 수 있는 장치가 꼭 필요합니다.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다수당이 되면, 단숨에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죠. 현재 양당이 정권을 주고받으며 국정을 운영하고 있지만, 일단 한쪽이 다수당이 되는 순간, 사실상 거의 모든 사안을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틀에서 보면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는 영국 산업 혁명 초기에 의회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입니다. 당시만 해도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전화기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민의를 모으는 방식으로 4~5년에 한 번씩 투표를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겠죠. 그 이상은 오히려 사회적 효율성을 저해하는 이벤트였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와 IT 서비스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이 분 단위, 심지어 초 단위로도 서로 교류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적절한 신뢰와 규칙을 기반으로 훨씬 더 고도화한 민주주의, 이른바 ‘민주주의 2.0’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효용 중 하나는 바로 ‘신뢰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미국과 한국에는 투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블록체인은 이러한 불신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비대면 투표도 이제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미 1억 원, 10억 원의 자금을 이체할 때도 모바일 뱅킹과 인증서를 통해 문제없이 처리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큰 금액도 은행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 비대면으로 이체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 수준을 네트워크가 이미 확보했다면, 투표라는 행위 역시 충분히 그와 같은 신뢰 수준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4년, 5년에 한 번 투표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요한 이슈나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시민들이 개입해서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투표장에 가야 한다면 물리적인 비용이 듭니다. 선거를 한 번 치를 때마다 수백억 원이 들고요. 하지만 마치 비대면 송금하듯이 가볍게 시민의 의견을 모을 수 있다면 사회적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시민 참여와 대의민주주의를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한 기반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기회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을 활용해 장기적인 정책 흐름 속에서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 내며 민주주의를 업그레이드해 나가는 국가가 다음 세기의 패권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결국, 시대정신이겠죠. 민주주의가 분명히 잘 작동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과거 왕정 국가들이 민주정으로 전환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던 시기 역시 분명 존재합니다. 이는 낡고 경직된 왕정과 독재 체제에서 비롯된 여러 사회적 병폐가 시민 참여를 통해 일시에 해소되면서 사회 시스템의 동력이 활발히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민주주의의 허점을 이용하는 기득권이 사회 곳곳에 자리 잡으면서, 이 시스템 자체를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습니다. 민주주의의 ‘루프홀’을 기득권이 너무 잘 이해하고 악용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민주주의의 운영 체제(OS)를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사실 이 주제가 매우 방대한 성격을 띠고 있어서, 말씀을 듣다 보니 질문하고 싶은 것들이 수십 가지 떠올랐습니다. 한 번에 다 말씀드릴 수는 없으니, 오늘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하나씩 질문드려 보겠습니다.
임기 동안 권한을 위임받은 선출직 공직자들이 집행하는 방식의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시간 지평(Time Horizon)’이 4년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길어질 수 있도록 장기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현재의 제도는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삼는 경향이 강해, 공동체 전체의 장기적인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지 못하고 ‘주인-대리인(Principal-agent problem)’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대리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선이라는 사적 동기를 위해 권한을 행사하게 되는, 제도적 구조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 지평을 장기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습니다. 또,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지고 있어서, 누군가에게 모든 결정을 4년 동안 맡겨 놓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은 선출직 공직자뿐 아니라 임명직 공직자들도 대부분 전문성이 매우 취약한 상황인데, 세상의 변화는 점점 가속하고 있습니다. 각 전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의 일반적인 인식 수준과 전문가들의 판단 간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대중의 학습 속도가 높아지는 측면도 있지만, 민주주의에서 의사 결정권을 행사하는 과반수의 시민이 이러한 변화를 항상 따라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죠.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시간 지평이 길어져야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짧아져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김서준: 한 가지 힌트는, 좋은 선택을 한 시민들, 즉 민주주의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원동력은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게임의 규칙 안에서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경제 활동을 통해 자본을 늘릴 수 있다는 인센티브에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게임에서는, 정책을 열심히 공부하고 국가와 시민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민과 그렇지 않고 가볍게 투표하거나 아예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인센티브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모순입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으로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습니다. 레이 달리오(Ray Dalio)가 운영하는 브리지워터(Bridgewater Associates)에서는 ‘신뢰 가중 투표 제도(believability-weighted voting)’라는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달리오는 《원칙(Principles)》에서 이 시스템을 상세히 설명하는데, 각 직원의 과거 의사 결정 성과를 추적해 0.1부터 10까지의 신뢰도 점수를 부여하고, 이를 투표에 반영합니다.
특정 안건에 있어서 회사의 의사 결정을 할 때, 투표를 받되 해당 안건에 대해 더 높은 적중률을 보였던 심사역들에게 더 많은 가중치(weight)를 부여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환율 예측의 경우 과거에 해당 분야에서 뛰어난 적중률을 보였던 심사역이 더 큰 가중치를 갖는 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정책에 대해 어떻게 투표했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 전혀 추적되지 않습니다. 가상의 아이디, 즉 정책 전용 아이디가 시민들에게 발급되고, 그 데이터가 암호화된다는 전제하에, 시민들이 특정 정책에도 투표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 정보 문제가 있으니, 적절히 암호화해서 관리할 수 있어야겠죠. 저는 정치인뿐 아니라 정책에도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많은 분이 인물보다 정책 중심의 선거가 되어야 한다, 정당보다 정책 중심의 선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연히 안 됩니다. 그런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책에 대해서도 별도로 투표할 수 있는 장치가 분리되어야 합니다. 또, 정책에 대해 투표한 이후 적절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정책이 효과적이었는지, 효과가 없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할 수 있겠죠. 그 장치, 즉 블록체인 오라클(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공급자)을 만드는 것도 사회적 합의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그렇게 해서 효과적인 정책에 꾸준히 투표해 온 사람들에게는 해당 분야에 더 많은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인센티브를 높여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시민뿐만 아니라 정치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다수당이 되었을 때 인센티브가 지나치게 커진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이 잘 동작하고 수시로 조정될 수 있다면, 정치인들의 투표 영향력(voting power)도 실시간으로 바뀐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경노동위원회에서 A당이 B당보다 한 석이 더 많다고 해도, B당에 속한 의원들이 오랫동안 좋은 평판과 성과를 바탕으로 훌륭한 의사 결정을 많이 도출하고 그 효과를 증명해 왔다면, 오히려 그들이 더 큰 투표 영향력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성과에 기반해 투표 영향력을 늘려 주는 장치를 정치인에게 도입하고, 그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시민 모두에게도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김세연: 우선,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의사 결정 체계에 대해 좋은 힌트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회가 성장과 번영을 이루는 시기에는 보통 해당 분야에 정통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이들이 정책 입안과 집행을 주도해 발전의 궤도에 오를 수 있었을 겁니다. 반면, 하강기에 접어든 사회에서는 전문성에 대한 존중이 높지 않을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우리 사회가 그러한 단계에 진입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브리지워터가 신뢰 가중 투표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안에 대해 모든 구성원이 투표하되, 가중치가 각기 다르게 설정되는 것이죠. 경제적 영역, 즉 화폐 단위로 측정 가능한 영역에서의 의사 결정은 계량화가 비교적 용이하기 때문에 합의가 상대적으로 수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기후 위기 같이 단기적으로는 큰 고통과 비용을 감수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은,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더라도 단기적 인센티브를 과도하게 활용하거나 악용하는 사람들의 선동적 주장에 의해 의사 결정이 왜곡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처럼 계량화가 어려운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전문성을 존중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시스템은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신뢰가 확보되지 않은 환경에서는, 아무리 좋은 제도나 기술을 도입하더라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서준: 제가 예전에 페이스북에 미디엄에 남겼던 글을 올렸는데요, 말씀하신 문제에 해당하는 내용을 어떤 분이 댓글로 남겨 주신 적이 있습니다. 기후 변화 사례였습니다. 그래서 관련 통계를 살펴봤는데요, 미국에서는 기후 변화 문제가 정치적으로 크게 갈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서는 각종 국제 협약에서 또다시 탈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요.
그런데 최근 통계를 보면, 미국인 전체를 기준으로 여전히 기후 변화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반이 넘습니다. 연령대로 보면, 젊은 층일수록 기후 변화를 더 심각하게 인식하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제가 정책에 장기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시민, 즉 장기적으로 스테이킹하는 시민에게 더 큰 투표권을 부여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이유도, 이런 문제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물론 모든 문제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현재 여론이 반반으로 나뉘는 경우라고 해보죠. 사회적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가 더 심각하게 인식하는 문제일수록,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이 지속적으로 관심과 책임을 가지고 참여하는 정도가 장기화되면서 투표권도 커집니다. 반면, 나이 든 세대는 사회에서 점차 비중이 줄어듭니다. 그러면 어느 시점이 되면, 젊은 사람들이 5년, 10년 동안 꾸준히 주장해 왔던 아이디어들이 훨씬 더 힘을 받게 되는 시기가 올 것 같습니다.
김세연: 영향력이 처음에는 미약해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지는 방식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미국의 경우 출산율이 크게 떨어지지 않아 노년층과 청년층 간의 인구 불균형 정도가 우리보다는 훨씬 낮은 편입니다. 반면, 우리 사회는 좀 다르죠. 예컨대 최근 뜨거운 이슈였던 국민연금 개혁 논쟁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노년층 또는 노년에 곧 진입할 중년층의 시각과 청년층 또는 이제 막 10대에서 청년층으로 진입하려는 세대가 느끼는 긴박감이 크게 다릅니다. 이러한 세대 간 시각 차이는 안 그래도 사회 통합이 약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과 맞물려, 정책 사안을 둘러싼 세대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앞서 토큰 기반의 ‘스테이킹’ 개념을 언급해 주셨는데요, 스테이크홀더라고 불리는 이해관계자의 참여 정도나 속성이 장기화할수록 그 권한이나 영향력이 강화되는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즉, 제곱근을 씌울 게 아니라 그대로 두거나, 오히려 제곱을 적용해 줘야 하지 않나 하는 겁니다. 우리 같은 인구 구조에서는 지금 20세인 시민이 앞으로 60년, 80년을 바라보는 관점과 지금 80세인 시민이 보는 관점 사이에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오히려 젊은 세대에 대한 가중치를 더 강화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김서준: 사실 이건 시뮬레이션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어떤 방향으로든 과격한 변화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을 텐데요, 제곱근만 적용하더라도 시간이 5년 정도만 지나면 꽤 큰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곱근이 최적의 방식일지, 단순히 선형적으로 가중치를 곱하는 방식이 맞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디어의 핵심은, 장기간 정책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일정 시점부터 점차 영향력을 키워주는 ‘스노우볼링 임팩트(눈덩이 효과)’를 주자는 겁니다. 이런 구조가 잘 작동한다면, 젊은 세대나 투표에서 상대적으로 약자로 분류되는 사회 구성원들이 패배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장치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세연: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에 있는 글렌 웨일 전 시카고대 교수가 2013년 방한 당시에 했던 발제를 들어 보면, 제곱근 방식을 도입하는 핵심적인 이유가 한국 재벌 개혁의 방안 중 하나로 의결권 비중에 변화를 주자는 취지였습니다. 다수의 폭력성을 제어해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자는 내용이었죠.
그러나 현재 미국에서는 다원주의가 빠르게 훼손될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만약 다수의 폭력이 다시 등장할 위험이 있다면, 다수의 의사 결정 권한에 제곱근과 같은 조정을 가하는 방안이 필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을 어디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구체적인 사안별로 신중히 판단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그런 관점에서 검토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어떻게 하면 전문성이 존중받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돌아가 보죠. 예를 들어, 개인의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어린이들 앞에 마시멜로를 둔 뒤 ‘기다리면 더 큰 보상을 준다’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참지 못하고 먼저 먹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참고 기다리는 아이도 있죠. 스탠퍼드대의 마시멜로 실험입니다.
이를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단기적으로 포퓰리즘 정책과 같은 ‘퍼주기’식 정책이 등장할 때 이를 당장 소진하지 않고 장기적 혜택을 위해 기다릴 수 있는 인센티브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단기적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집단적 인내심과 내성을 키우고, 개인의 도파민 보상에 대한 저항력처럼 포퓰리즘 정책에 대한 저항과 자제력을 사회 전반의 문화와 제도로 구조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기적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장기적인 이익과 필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의 존재가 필요하겠죠. 아울러 시민 사회 전반에 걸쳐 전문성에 대한 존중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대의민주주의입니다. 정치 역시 전문 분야라고 본다면,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결정을 받아서 집행으로 이어 갈 전문성이 정치인에게 있어야 합니다. 정치인은 대의민주주의의 대리인입니다. 전문가들과 충분히 교류도 가능하고요. 정치인 본인이 전문가 수준까지는 안 되더라도 전문가 집단과 소통이 막히지 않을 정도의 전문성이 필요한데, 우리는 지금 이 부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구현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김서준: 시민을 설득하고 안내하는 전문가의 역할을 담당할 최전선에는 정치인들이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미지 정치’라는 말을 합니다. 실제로 이미지를 활용해 정치를 하기도 하고, 그런 정치인이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하죠. 예를 들어 대선 후보로 출마한 정치인들에 대해, 국회의원 시절 지난 회기 동안 몇 건의 안건을 발의했고, 몇 차례 투표에 참여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 축구, 야구, 농구 선수들의 경우에는 몸값이 스탯(기록)에 의해 결정됩니다. 타율, 홈런 수, 삼진 수 등 다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평가하죠.
물론 이미지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데이터 기반의 성과가 뒷받침되는 상황에서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다양한 이미지까지 더해져 하나의 스타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치인에 대해서는 이런 데이터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데이터 자체는 있지만, 이를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장치가 없고, 평가와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
개별 국회에서 통과되는 각종 안건을 예로 들어 보죠.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하기도 하고, 찬반 투표에 참여하기도 하는데요, 그 정책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10년짜리인지, 3년 내에 효과가 나야 하는지 등의 시간 지평을 발의할 때 명시하도록 하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배심원제가 운영되고 있는데요, 무작위로 선정된 일반 시민들이 다수로 구성되어 해당 사안에 대해 찬반 투표를 하고, 이를 통해 사건에 대한 평가를 수행하는 방식입니다. 미국 하원의 운영 방식도 이러한 시스템의 확장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이런 제도들에 착안해서 일반 시민들의 판단과 가까운 구조를 만들어 보는 겁니다. 정부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정책에 대해 평가할 시기가 되면,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들에게 해당 정책 평가를 하도록 ‘대배심원’을 맡깁니다. 정책의 점수를 매기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사후적으로 정치인들의 점수가 기록되어 쌓이게 됩니다.
이러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면, 평가 데이터가 쌓임에 따라 시민들 또한 정책에 스테이킹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나중에 각 시민들의 선택에 관해서도 옳았는지, 틀렸는지 데이터가 계속 쌓일 테고요.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모든 대배심원의 표가 동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갖추고 꾸준히 정확한 판단을 해온 시민들에게 더 많은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전문화할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핵심은 정책에 대한 사후 평가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현재처럼 평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은 벗어나야 합니다. 최소한의 기준점이라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어떤 문제에 관해 논쟁이 한창 뜨거웠던 시점의 대중적, 사회적 판단과 실제 결과가 달랐던 경우가 있습니다. 논쟁으로부터 10~30년 정도 지나 돌아보면 당시의 주장과는 상당히 다른 양태로 나타나는 겁니다.
1990년대 스크린 쿼터 폐지 문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당시에는 스크린 쿼터가 폐지되면 한국 영화 산업이 몰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고, 이에 대한 반대 운동도 거셌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조치가 우리 영화 산업 경쟁력을 크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단기적인 판단과 장기적인 결과가 상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정책에 스테이킹을 하고 그 효과에 대한 사후 평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김서준: 예를 들어 어떤 정책이 5년 단위로 평가된다고 가정할 때, 5년 후에 한 차례 평가를 실시하되, 그 평가 시점에서 두 배 정도 지난 시점에 다시 한 번 추가 평가를 진행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최초 평가 당시에는 적절했던 판단이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질 수도 있고, 반대로 처음에는 잘못된 것으로 보였던 결정이 나중에 옳았던 것으로 평가될 가능성도 열어둘 수 있습니다.
김세연: 글렌 웨일 전 교수의 이야기 중 이 논의에 적용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파라미터(parameter, 매개 변수)를 인위적으로 추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제곱근이나 a, b 같은 상수값을 붙이지 않고 단순히 제곱근만 적용하는 것이죠.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에 가깝고, 인간의 재량이 개입되면서 생기는 왜곡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매우 인상적이더군요.
마찬가지로, 시간 지평을 어떻게 설정하고 가중치를 어떻게 부여할지도 사람이 거의 개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왜곡이 줄어들 것 같습니다. 사람이 개입할 여지를 둔다면 제도 도입 초기에는 순기능이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점이 악용되며 시스템이 무너지는 속도가 빠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이 제도 설계 시 반영되어야 하겠습니다.
김서준: 말씀에 동의합니다. 최대한 통일장 이론처럼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세연: 맞습니다.
김서준: 그럼, 이런 부분도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단기 정책과 장기 정책을 구분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평가를 진행하는 겁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초기에는 옳았던 판단이 틀릴 수도 있고, 반대로 틀렸던 판단이 맞았던 것으로 바뀔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올바른 정책 방향을 꾸준히 지지해 온 사람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김세연: 그리고 반드시 그 정책의 효과가 측정되어 데이터로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또한, 제도가 복잡해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루프홀(loophole) 등의 문제로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니 최대한 단순한 구조로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이런 함의를 도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서준: 국회에서는 1년에 대략 몇 개 정도의 법안이 발의되나요?
김세연: 21대 국회(2020~2024년) 기준으로 1년에 발의되는 법안이 6000건이 넘었습니다. 17대 국회(2004~2008년) 4년간 발의된 법안이 7000건이 좀 넘었는데, 갈수록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폭증하고 있죠.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총선시민연대’라는 NGO 연합체가 16대 국회 시절에 만들어져서 낙천·낙선 운동을 펼쳤는데, 17대 공천 과정부터 의원들을 계량화된 지표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정 법안을 몇 건 제출했는지, 개정 법안을 몇 건 제출했는지에 가중치를 주기 시작하니까 제정 법안 수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개정 법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제처에서 일본식 법률 용어를 더 이해하기 쉽게 우리말로 고치는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같은 작업을 하는데, 일부 몰지각한 의원들이 이걸 낚아채서 한 사람이 수십, 수백 건씩 발의하기도 했죠. 이러한 개정 법안들까지 모두 발의 건수에 포함되니까 무분별하게 제출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가장 심각한 사례 중 하나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법안들을 전부 찾아서 법안 초반부에 5년마다 기본 계획, 1년마다 시행 계획을 갱신하도록 내용을 추가한 겁니다. 원래는 각 부처가 별도의 복잡한 절차 없이 운영하던 것을 획일적으로 5년 단위, 1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게 했습니다. 한 의원이 ‘복붙’으로 이렇게 쏟아낸 몇십 건의 법안이 본회의 단 하루에 모두 처리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본인 입법 성과 계량 지표를 끌어올리려 행정 시스템에 엄청난 과부하를 겁니다. 잘못된 인센티브가 초래한 왜곡된 행위의 결과죠.
김서준: 이공계 분야에서 전 세계 연구자들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바로 h-인덱스입니다. 논문을 다작한다고 해서 h-인덱스가 무조건 상승하는 것은 아닙니다. h-인덱스는 얼마나 많은 논문이 일정 수준 이상의 인용을 받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또,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 IF)라는 지표도 있습니다. 학술지(저널)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지표인데, 이것이 높은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일수록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즉, 단순히 논문 수만 많다고 해서 평가 점수가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말씀하신 문제들이 발생하는 이유는 측정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세연: 맞습니다. 만약 피드백 루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텐데, 숫자 위주로만 측정하다 보니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법안 처리 건수를 높여야 하면 원내대표실에서 법사위와 각 상임위 간사들에게 처리 건수를 높이라고 사인을 줍니다. 그럼 처리 건수를 높이기 위해 깊은 숙의와 토론이 필요한 법안들은 계속 뒤로 밀리고 합의에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사소한 수정안들이 앞으로 나옵니다. 단순히 법안을 읽고 바로 끝내는 식인데, 법안 소위에서 법안 한 건당 심의 시간이 5분도 되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상임위, 법사위를 통과한 법안들을 하루 200건 이상 본회의에서 처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봤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공무라기보다는 가짜 노동, 입법 연극에 가깝죠. 영국 의회의 경우, 연간 통과시키는 법안 건수가 몇십 건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정성껏 심의하고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수천 건에 이르는 법안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김서준: 앞서 말씀드린 대배심원제와 유사한 방식을 통해 이러한 평가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청년 투표권자들에게 거버넌스에 참여할 수 있는 도구, 앱 같은 것을 제공하는 겁니다. 전체 9000건의 정책이 있다고 한다면, 인구 1인당 무작위로 약 10건의 정책을 배정해 평가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각 정책의 옳고 그름, 그리고 정책 효과에 대해 평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당 정책이 질적으로 논의할 가치가 있는지 여부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일부 표현을 바꾸거나 사소한 내용으로 양을 채우려고 법안을 제출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평가를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개별 법안에 대한 평점이 생성된다면, 일종의 ‘정책 타율’과 같은 지표가 나올 것 같습니다.
또, 개별 의원에 대해서도 단순히 법안 제출 건수만이 아니라, 의원 활동의 평균적인 임팩트가 어느 정도였는지 수치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데이터가 한 사이클만 쌓여도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타율, 타점, 득점 등의 정보를 비교하듯 의원들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비교해 가며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겠죠. 이렇게 되면 기존의 이미지 정치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생길 것 같습니다.
김세연: 이미지나 감정에 기반한 의사 결정은 선동이나 포퓰리즘에 취약합니다. 그 구조를 상당 부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미에서의 극단적인 예외도 생각해 보죠. 예를 들어, 어떤 정치인이 법안을 하나도 안 냈습니다. 하지만, 수백 건의 심의 중인 법안에 대해 의미 있는 피드백과 개선안을 제시해서, 단순히 건수 채우기에 급급한 의원들보다 양적으로는 부족하더라도 질적으로 매우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김서준: 이런 방식은 어떨까요? 연구 논문에서 1저자, 2저자, 3저자, 4저자가 있죠. 법안 발의를 직접 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피드백을 제공했다면, 2저자나 3저자처럼 여러 법안에 기여한 점이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여가 임팩트로 측정된다면, 높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세연: 우리의 논의가 확장될 것 같습니다. 현재 의회의 입법 메커니즘은 매우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발의 건수라는 단순하고 표면적인 지표에만 의존하다 보니 중요한 데이터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메커니즘의 각 요소에서 작용하는 활동들을 더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면, 계량화 과정에서도 질적 측면이 묻히지 않고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겠습니다. 즉, 계량화를 통해 오히려 질적 평가를 강화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김서준: 대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에게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겠습니다. 현재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으면 바로 허무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표의 효용이 사라지니까요.
비록 선거 자체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시민들이 정책 평가와 참여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에 관한 임팩트 팩터를 꾸준히 쌓아 간다면, 신중하고 성실하게 활동한 시민들은 점차 더 큰 투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당권 선거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이 직접 반영되지 않더라도, 개인의 영향력이 누적되어 점차 커지는 과정에서 마치 게임에서 레벨이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이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세연: 게이미피케이션의 원리를 민주주의 거버넌스에 접목하려는 노력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죠. 정당 내 당원들이 실제로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할 수 있는 정도가 매우 낮습니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소수 인물이 당의 의사 결정을 왜곡하거나 조작할 여지가 생기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론 조사를 의사 결정 과정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론 조사를 악용하는 사례도 발생합니다. 최근에도 사례가 있었다시피 조작도 시도되고 있고요. 따라서 전체 당원의 의사를 온전히 반영할 방법을 찾을지, 아니면 배심원제처럼 전형적인 샘플링 방식을 적용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단기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샘플링 방식이 더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가 퇴보하는 원인 중 하나는 정치적 의사 결정에 대한 무관심, 시민이 정치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교육 과정과 연계하여, 시민들이 납세 의무와 마찬가지로 참정 의무를 진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누구나 정책의 의미와 효과를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서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예를 들어, 모병제에 대한 논의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드론이나 로봇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의 시연 영상이 많죠. 과연 인간 병사가 전쟁에서 싸우는 전쟁이라는 것이 효용이 있는지 논쟁도 벌어지고요.
물론 국방의 의무는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오랜 기간 교련 수업 같은 것도 있었죠. 또, 많은 성인 남성이 귀중한 시간을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투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국방의 의무가 로봇 등에 의해 모병제로 전환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기의 문제일 뿐이죠.
그렇다면, 시민으로서의 의미, 의무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저는 우리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국방의 의무보다도 더 중요한 책임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국가 정책 참여를 위한 운영 체제가 열리고, 이것이 교과 과정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합니다. 핀란드는 이미 2016년부터 ‘Open Ministry’라는 플랫폼을 통해 시민들이 직접 법안을 제안하고, 5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의회에서 의무적으로 논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에스토니아의 ‘e-Residency’ 프로그램도 디지털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입니다. 시민들이 이 시스템을 어떻게 활용하고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시민들이 이 시스템을 어떻게 활용하고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 시스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것이죠. 그런 과정이 교육 제도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 선발 과정도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정책을 만들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오픈 소스 플랫폼을 활용하여 법안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마치 깃허브(GitHub)와 같은 플랫폼에서 오픈 소스로 세계 최고의 프로그래밍 코드가 만들어지듯 말입니다. 법안 역시 주도하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이 있긴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오픈 소스로 의견을 취합하는 방식을 도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 활발히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시민들은 1저자는 아니더라도 2저자, 3저자와 같은 형태로 자신의 기여를 인정받아 자신의 크레딧을 쌓아 갈 수 있습니다.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확보해 크레딧을 가진 사람들이 해당 분야에서 비례대표로 선발되거나, 지역구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단순히 인맥이나 줄타기에 의해 발탁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정치 참여 활동이 체계적으로 통합되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인이 양성되는 구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사실 ‘스케치 다이얼로그’라는 이 대담의 타이틀은 기획 마무리 단계에서 붙인 것입니다. 초기 검토에서는 백지상태에서 국가 설계도를 새로 그려보는 사고 실험 과정을 ‘사회 운영 체계의 대규모 오픈 소스 개발 과정’이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습니다. 대표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현재와 같은 형태의 법률이 과연 계속 필요할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습니다. 물론 법률이 여전히 필요할 가능성도 꽤 크다고 생각합니다.
오픈 소스 기반의 사회 운영 체계, 또는 국가 운영 체계를 깃허브(GitHub)와 같은 플랫폼에서 완전한 프로그램 형태든, 혹은 그 기능을 탑재한 모듈 형태로 구현하는 방안에 관한 이야기는 예전에 잠시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한 팟캐스트 대담에서 화성에서 새로운 거버넌스를 구상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을 이야기했는데, 법률을 지금처럼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더군요. 법률을 보다 알기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작성해야 하고, 조립이 용이한 모듈처럼 법률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헌법과 법률, 시행령에서는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에 이어 실무적인 내규까지, 즉 헌법부터 법령까지 체계가 짜여 있습니다. 이 체계를 OS의 코드로 본다면, 우리 헌법은 개정이 너무 어렵게 되어 있어 1987년 이후 약 40년간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헌을 시도할 때마다 다음 대통령 유력 주자가 반대하며 무산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죠. 미세 조정을 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OS 업그레이드에 비유하자면,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그러니까 주 버전이 바뀌는 큰 변화도 있겠지만, 소수점 단위의 마이너 업그레이드는 항상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거버넌스가 근본적으로 바뀐다면, 이런 새로운 체계에 대한 상상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서준: 사실 오픈 소스 커뮤니티는 누구나 제안할 수 있고 제안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커미터들이 합의해 원본 소스 코드에 반영하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오픈 소스 진영 중에서 성공적인 곳일수록 제안 검토와 반영 절차를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운영합니다. 반면 많은 제안이 무시되거나 피드백 없이 방치되는 커뮤니티는 쇠퇴합니다. 검증되지도 않은 아이디어를 무분별하게 반영하면 시스템이 망가질 위험이 있으니 이를 잘 조율할 수 있는 거버넌스 체계가 잘 구축된 커뮤니티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에서 참고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세연: 제약 없이 가장 근본적인 대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논의하고 있으니, 조금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런 토의는 다른 맥락에서는 잘 진전되지 않았는데요, 오픈 소스 진영을 보면 여러 개의 공동체가 같은 주제를 둘러싸고 존재하고, 그중에는 참여자들의 선택을 받아 번성하는 곳도 있고 소멸하는 곳도 있습니다.
국가의 정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실체는 폭력의 독점입니다. 대외적으로는 국방을 통해 외침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내부적으로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모든 국민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치안 및 사법 체계를 운영합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실질적으로 사형 제도가 폐지된 국가로 분류되지만, 국가는 합법적으로 살인까지 포함하는 폭력을 독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국가 운영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죠. 국가의 본질인 폭력의 독점과 충돌할 수 있어 쉽지는 않겠습니다만, 서비스적인 일부 분야는 경쟁이 존재하는 편이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유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폭력의 독점이 반드시 필요한 영역은 독점 상태를 유지해야 하겠지만 말이죠.
이때 독점이어야 할 부분과 독점이 필요 없는 부분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활발히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결코 쉬운 논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개념적으로 두 영역을 구분할 수 있다면 독점이 불필요한 영역에서는 다양한 운영 체계가 병립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서준: 저도 같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비록 정확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물건을 살 때 쿠팡이나 네이버, G마켓 등 여러 플랫폼 중에서 선택할 수 있고, 이 경쟁 덕분에 서비스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부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도 복수의 공기업 간 경쟁을 유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를 무조건 사기업처럼 운영할 경우 비용 상승이나 지나친 영리 추구라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공기업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겠습니다.
재원은 결국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부담하도록 하는 방식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쿠팡과 같은 서비스에서는 월정액 구독자에 한해 배달비를 무료로 해 주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죠.
예를 들어, 국가가 제공해야 하는 몇 가지 서비스 영역에 대해 다양한 모델로 경쟁할 수 있는 소규모 기관들을 설립하고, 시민들이 그중 하나를 구독하도록 한다면 자연스럽게 더 나은 혜택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네덜란드의 건강보험 시스템은 민간 보험 회사들이 경쟁하되 기본 보장은 의무화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 OECD 국가 중 높은 만족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세연: 지금 저희가 진행하는 ‘스케치 다이얼로그’는 ‘아젠다 2050’이라는 사단법인의 활동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현재는 시즌 3에 해당합니다. 시즌 1에서 이런 이야기를 좀 해본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큰 반향 없이 묻혔습니다. 그런데 지금 거의 같은 개념을 말씀해 주시니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김서준: 다소 급진적이지만, 국민연금 시스템을 새롭게 설계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최근 국민연금 구조가 젊은 층에 불리한 방향으로 개정되었습니다. 또한, 최적의 의사 결정에 따라 가장 큰 수익을 낼 수 있도록 자본 시장의 논리로 경쟁해야 하는데, 이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고요.
따라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국민연금 2, 3과 같은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겁니다. 공기업 형태로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시민들이 직접 어떤 국민연금에 돈을 낼지 결정하게 하는 겁니다.
김세연: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은 준조세로 분류됩니다. 의무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옵트아웃(가입 거부)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불이익이 너무 큽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은 아예 가입하지 않는 경우를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로 국민연금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온라인과 모바일 서비스가 많이 강화되어 과거에 비해 편의성은 개선되었지만, 행정 서류 발급 절차와 같은 정부 및 공공 기관의 비효율성이 여전히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복지 전달 체계나 일반 행정 업무 등에 다양한 문제점이 존재합니다. ‘아젠다 2050’ 시즌 1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한 바 있습니다.
과점 상태라도 엄밀한 의미의 독점은 아니기 때문에 경쟁은 존재합니다. 비슷한 개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만, 예를 들어 항공기 엔진 시장이나 발전기 터빈, 미국의 전투기 산업 등은 원래 여러 업체가 있었으나 산업 재편 과정을 거쳐 현재는 두세 개 업체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입찰 과정에서 이들이 경쟁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젠다 2050의 시즌 1 당시 논의에서, 이처럼 행정부의 서비스 조직을 별도로 떼어내 ‘정책 공사’로 분리하고, 두세 개의 공공 기관이 동일한 서비스를 놓고 경쟁하게 하면 어떨까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두 개만 운영할 경우 담합 우려가 있을 수 있겠죠. 현재 이동통신 시장처럼 세 개의 사업자가 존재하는 구조도 참고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정책 공사 형태로 공공성과 안정성, 신뢰성을 확보하면서도 적절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입니다.
김서준: 미국에서는 ‘국민연금’이라는 개념보다는 ‘퇴직연금’이 일반적이고, 이를 운영하는 사기업이 많습니다. 하지만 100퍼센트 사기업 형태로 운영할 경우, 그 회사가 잘못 운영해서 파산하게 되면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그 중간쯤에 위치한 새로운 모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세연: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미국에서 국책 모기지 금융 회사인 프레디맥(Freddie Mac, Federal Home Loan Mortgage Corporation,), 패니메이(Fannie Mae, Federal National Mortgage Association,)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죠.
김서준: 따라서 정부는 적절한 규제와 관리 감독을 수행하되, 운영 방식에서는 사기업처럼 경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은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하는 상황일 때 대안이 없습니다. 자극이 될 만한 경쟁 요소가 없는 겁니다.
김세연: 새로운 설계도는 이러한 요소들이 원칙으로 명확히 정해진 상태에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온 민주주의 시스템, 즉 중세가 끝나고 근대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을 거치며 자본주의가 결합된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은, 제조업이 번성하여 물건과 일자리를 대량 생산함으로써 중산층을 두텁게 만드는 경제 산업 구조에 기반했습니다. 그 위에서 안정적인 정치 체제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본격적인 금융 혁명이 일어난 이후 제조업의 비중이 다소 줄긴 했지만 말입니다.
반면, AI와 로봇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보급으로 노동 시장의 본질적 변화가 예고되고 있습니다. 조만간 커다란 물결이 밀려옵니다. 기존의 세계관과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초입에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가 주로 대의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한 현대 민주주의 시스템의 보완과 고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앞서 대담 초반에는 UAE 사례처럼 장기 집행이 가져올 엄청난 잠재력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셨다는 점을 말씀 주셨죠.
경로 의존성을 좀 탈피해 보겠습니다. 현행 거버넌스는 선출 시스템에 내재된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습니다. AI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는 반면, 인간은 디지털 기반 기술과 달리 생물학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기계는 에러가 날 수 있겠지만, 인간은 외부 자극과 내분비계 호르몬 작용에 취약하며, 감정에 휘둘리고 이성적 판단보다는 탐욕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이성적으로는 공적인 의사 결정 시 공익이 사익에 우선하고 다수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빈번하죠.
이런 상황에서 AGI(인공 일반 지능)나 ASI(초지능)의 등장 이후 인간이 현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해지는 국면에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정책 집행에 대한 승인이나 허가, 합의 등 최종 결정권은 인간이 가지되, 집행의 객관성과 정파를 초월하는 장기적 관점은 기계와 인간이 거버넌스를 협업해 운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정체순환론’을 설파했었죠. 일맥상통하는 얘기입니다. 왕정이 타락해 독재가 되고, 귀족정이 타락해 과두정이 되며, 민주정이 타락해 중우정 또는 폭민정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각 정치 체제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결국 민주정이 다시 왕정으로 회귀합니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2000년 전 예측이 현실화한다면, 우리 앞에 놓인 다음 정치 체제는 왕정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이 왕정이 호르몬과 감정에 취약한 인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좌우될지, 아니면 보다 냉정한 존재에게 맡겨야 할지 생각해 보죠. 물론, 이 존재가 지나치게 냉정해 인간을 학살하지 않도록 견제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UAE에서 경험하신 세계관의 변화를 바탕으로, 경로 의존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로로 한번 들어가 보는 논의를 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서준: 저도 AI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코파일럿’이라고 하잖아요. 저 역시 거의 모든 활동에 AI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리서치부터 글쓰기는 물론이고 생각을 점검할 때도 항상 AI와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AI 자체도 편향과 거짓말이 심각하다는 점입니다. AI가 더욱 고도화될수록 편향도 고도화되고, 거짓말도 더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훨씬 더 쉬워집니다.
현재도 능숙한 정치인이 사람을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AI가 열 수 앞을 내다보며 정교하게 사람들을 속이기 시작한다면, 그 목적은 무엇일까요? 어떤 인센티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겠죠. 결국 사람에게 적용하든, AI에 적용하든 마지막 단계의 인센티브를 통제하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사회적 규범 내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AI 모델 자체도 필연적으로 여러 개가 경쟁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이더리움의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은 ‘신뢰할 수 있는 중립성(Credible Neutr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단일 주체가 시스템을 통제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블록체인의 핵심 가치라고 강조합니다.
김세연: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김서준: 하나의 거대한 AI 모델만 동작하는 순간, 그 AI의 지배권은 소수의 사람이 쥐고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오픈AI는 이름과 달리 오픈되어 있지 않죠. 대표인 샘 올트먼도 이사회 회의에서 갑작스레 해임되었다가 복귀하는 등 내부 갈등을 겪은 바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어 낼 수는 없지만, 오픈AI 가장 기저의 철학과 운영 원칙은 몇 줄의 코드로 구현되어 있으며, 이를 통제하는 소수의 엔지니어들이 있을 것이란 얘깁니다. 다른 AI 모델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제미나이나 클로드 같은 것 말입니다. 그나마 오픈 소스로 개발되는 딥시크 같은 사례가 오히려 조금 나을 수 있겠고요.
결국 AI의 기저에 깔린 철학이 다양한 버전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끼리 경쟁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AI는 철저히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세연: 소위 미국의 빅테크 기업인 M7 등 기업 생태계가 요즘 계속 바뀌는 것 같습니다만, 국가의 역량을 뛰어넘는 기술과 자원을 갖춘 빅테크도 데이터 센터, AI 모델, 로봇 등의 새로운 산업 분야에서는 소수의 플레이어들이 각각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되고 있더군요. 이런 상황이 일정 부분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AI 역시 하나의 LLM이 전체를 지배하는 상황은 위험합니다. 파레토의 법칙에서 20퍼센트의 개미가 80퍼센트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일을 많이 하는 개미를 치우면 남은 개미 중에 또 일을 많이 하는 개미가 나옵니다. 이처럼 다양성이 존재하면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생존과 지속 가능성도 이 동적인 균형 안에서 계속 담보될 가능성이 올라갑니다.
사실 AI는 이미 인간 지능을 넘어선 지점까지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프리 힌튼 교수는 AI가 마치 세 살배기 아이를 다루듯 인간의 행동을 조종할 가능성에 대해 계속 우려하죠. 꼭 AI가 왕이 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오자면, 왕정 시대처럼 왕권이 세습된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왕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무능한 왕, 미친 왕들이 심심찮게 등장했습니다. 물론 성군도 존재했지만, 한계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지금의 UAE나 사우디아라비아도 논란이 많습니다. 권력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같은 왕족이나 언론 탄압 사건들도 있었죠.
민주주의에 대응되는 정치 체제로 권위주의, 즉 독재를 택한 나라도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죠. 덩샤오핑이 설계한 집단 지도 체제는 전형적인 귀족정의 형태로, 공산당과는 어울리지 않는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시진핑 체제에서 독재정으로 전환을 시도하면서 여러 파열음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까지 다 종합해서 보자면, 꼭 우리나라에만 특정할 것이 아니라, 인류가 직면한 기술, 경제, 사회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정치 체제가 어떻게 변화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김서준: 매우 거대한 담론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이고, 왕정 체제는 왕의 신체적 유전자를 자녀에게 물려주며 국가를 계승한다는 개념에 기반합니다. 그러니 내가 통치하는 나라를 장기적으로 잘 관리해야 한다는 개인적 이기심이 사회의 장기적 발전과 맞물려 잘 작동하는 시기에는 잘 작동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제는 생물학적 유전자를 넘어 사회적 차원의 ‘유전자’를 고민할 수 있는 의식이 생겨난 것 아닐까요? 그런 것이 잘 측정되고 관리되어 계승될 수 있다는 전제가 형성된다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같은 국가에서는 전문 경영인 체제를 바탕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 빅테크 기업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사회가 작동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창업자의 의사 결정 구조와 철학, 비전을 가장 잘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물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방식으로 창업자의 사업적 유전자를 이어 가는 시스템이 극도로 잘 발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향으로 이사회와 차기 경영진을 키우는 것이죠.
특히 50년 이상 지속되는 기업들은 이러한 DNA를 확실히 구축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시스템을 국가와 정치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하는 점이겠죠. 다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들은 성공을 평가하는 명확한 기준과 지표(매트릭)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업에서는 매출과 순이익 증대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항목들을 정렬해 나갑니다.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평가 지표가 무엇일까요? 부탄의 국민총행복(GNH) 지수나 뉴질랜드의 웰빙 예산(Wellbeing Budget) 같은 시도들이 있지만, 아직 전 세계적으로 합의된 국가 성과 지표는 부재한 상황입니다. 물론 재정적으로 국가도 수익을 내고 흑자를 유지해야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 있는 발전 지표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물론 재정적으로 국가도 수익을 내고 흑자를 유지해야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 있는 발전 지표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러한 지표들을 보장하기 위한, 헌법에 준하는 기본 철학이 명확해진다면 혈연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계승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가장 큰 문제는 그 철학이 무엇인지 정의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같은 정당 내 후임자들조차 그 철학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당 자체도 명확한 철학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우선 그 기본 철학이 분명히 정립되어야 하겠습니다.
요즘 ‘기업보다 정치가 못하다’라는 식의 얘기 많이 하잖아요. 한국 사회에서는 ‘국민은 일류, 기업은 이류, 정치는 삼류’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죠. 국가와 정치의 핵심 성과 지표(KPI)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왜 존재하는지, 국가와 정치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 명확하고 일관된 답이 없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릅니다.
김세연: 삼김(三金) 시대에는 삼김에 대한 비판이 많았습니다. 정치가 체계화되지 못한 채 인물 중심, 지역 기반의 정당 체제로 운영되었다는 것이죠. 특정 지역에서 선출직을 하려면 특정 정당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런 비판이 많았죠.
하지만 30~40년이 지난 현재, 재평가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정당, 한 인물이 모든 걸 완벽하게 해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각 시대의 소명과 자신의 과업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들을 해낸 임기들이 반복되면서 우리가 선진국의 문턱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쇠퇴기에 들어섰다고 봅니다. 지금 각 정당은 국가 권력 쟁취를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 정당이라는 발판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관성이 있으니까 정당들이 대략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는 알겠는데, 근본적인 철학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지점입니다.
현재 우리가 논의하는 내용은 현실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서 더 깊게 이야기를 이어 가지는 않고 망가진 민주주의 시스템을 개선하는 방안에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4년보다 훨씬 긴 임기의 집행관을 선출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겠죠. 또한,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특정 분야의 정책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국 사례를 응용하면 대통령이 AI, 반도체, 기후, 인구 등 특정 분야에 차르를 임명하는 거죠. 분야별 집행관에게 절차적 비효율을 넘어서는 강력한 집행 권한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정상적인 국가로 기능하고 있다면 내각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대통령의 임기 자체가 단기적이고, 장기적 혹은 초장기적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실제로 정책의 효과가 발현되기 전에 자원만 소진되고 방향을 잃거나, 역행하는 경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서준: 저는 궁극적으로 선출직 임기가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대통령 임기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지만, 국회의원 임기에 관해서는 제가 자주 비유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PoS(지분 증명, Proof of Stake) 기반으로 운영되는 블록체인 시스템을 보면, 액티브하게 참여하는 밸리데이터(검증자)의 수를 예를 들어 150개 정도로 설정해 둔 체인들이 많은데, 이 경우, 스테이킹을 받은 토큰의 양에 따라 150번째와 후보군에 속하는 151번째 밸리데이터 간의 순위 변동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밸리데이터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체인에서 발생하는 트랜잭션을 보안을 지키면서 처리하는 역할입니다. 둘째, 거버넌스 보팅(Governance Voting) 시 대리 투표를 수행하는 역할입니다. 많은 토큰이 위임된 밸리데이터일수록 더 큰 권한으로 투표에 참여하게 됩니다.
모든 안건에 대해 토큰 홀더가 직접 투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각자 신뢰하는 밸리데이터에게 토큰을 위임하고 그 밸리데이터가 대신 투표하는 방식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원하는 경우 특정 안건에 대해 직접 투표하거나, 위임한 밸리데이터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리퀴드 데모크라시(liquid democracy)’라고 합니다. 특히 PoS 기반 블록체인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현재 Cosmos, Polkadot 등의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실제로 구현되어 수천억 원 규모의 자산이 이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 방식의 특징 중 하나는 밸리데이터의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즉, 꾸준히 활동하고 참여해 스테이킹을 유지하고 있으면 밸리데이터는 임기가 사실상 평생 지속됩니다.
반면에 활동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블록 생성이 안 될 정도로 서버가 꺼지는 경우, 투표 참여가 저조한 경우에는 위임된 토큰이 점차 다른 밸리데이터로 이동합니다. 심지어는 후보군이었던 밸리데이터들에게 차례가 오기도 합니다.
따라서 임기가 사실상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 있으며, 성과가 부족한 경우에는 즉시 후보 명단으로 밀려날 수도 있는 방식입니다. 극단적으로 국회의원이나 시의원, 구의원 같은 공직자 선출 방식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김세연: 착안할 만한 두 가지 사례가 떠오르네요. 첫 번째는 ‘내 투자금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입니다. 워런 버핏에게 맡기면, 60년 동안 좋은 투자를 통해 자산을 증식시켜 줍니다. 신뢰가 있다면 그냥 계속 맡겨 놓을 수 있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30세인 어떤 사람이 여러 면에서 괜찮아 보인다면, 내 모든 정책 영역의 의사 결정을 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겠죠. 환경은 A에게, 교육은 B에게, 의료는 C에게 위임하는 방식도 가능하겠지요.
이런 유동적 민주주의는 과거 독일 해적당에서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정당 기반이 무너지면서 현실 정치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코인 생태계에서는 이 구조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죠.
두 번째는 역사적인 사례입니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로 돌아가 보죠. ‘발로 하는 투표(vote with their feet)’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내가 한 지역에 태어났고 그곳의 영주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가정하죠. 예컨대 세금을 적절하게 걷고 외부의 침입에서도 잘 지켜 주는 인물입니다. 그러면 그 영토 안에서 일정 세금을 내며 보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죠. 반면, 영주가 폭정을 일삼으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중세 상황을 지금의 민주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결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대표자를 선택할 수 있는 재량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임기를 유동적으로 운용하는 구조도 가능할 겁니다. 임기가 4년, 5년, 이렇게 정해진 것도 사실 그냥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니까요.
김서준: 특히 예전에는 선거를 치르는 데 경제적,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한 기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만약 선거 비용이 공인인증서 인증하듯 간단히 처리된다면, 그 주기가 훨씬 짧아질 수도 있겠죠.
김세연: 맞습니다. 극단적으로는 안건이 생길 때마다 그때그때 투표하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다만, 그것이 너무 번거로우니까 일반적으로 4년 주기의 선거가 정착되었고, 그 결과 정치인이라는 전문 직업군이 생겨난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들어 그 전문성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데, 해외의 정치 선진국들은 모든 정치인이 전문성을 갖춘 것은 아니더라도 선거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유권자의 의사를 수렴해 대의민주주의 시스템 내에서 반영하는 커뮤니케이터이자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 일부는 더 넓은 범위와 높은 단계의 리더십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기도 합니다.
리퀴드 데모크라시 논의로 돌아오죠. 이런 시스템이 현실 정치에서 구현된다면, 권한 위임 체계나 선거 주기를 꼭 고정할 필요 없이,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구조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 앞서 초반부에 언급된 시민으로서의 덕목은 단순한 윤리적 이상같이 막연한 수준을 넘어, 현실에서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더 많은 보상이 돌아오는 구조로 설계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 보상을 어떻게 정의하고 측정할 것인지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이런 참여가 의미 있으려면, 일정 수준의 기초 지식이 필요합니다. 올바르고 정교한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암기식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 아니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간 교육 체계가 필요합니다. 모든 시민이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겠지만, 적어도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논쟁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 즉 선동되지 않을 정도의 기초적 전문 소양은 시민의 기본 의무로 탑재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서준: 그런 감각은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반장 선거나 전교 회장 선거 같은 것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선도부 선거 같은 것도 그렇고요. 체험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김세연: 맞습니다. 스마트폰이 외장 하드디스크처럼 내 뇌를 보조하는 도구가 된 것처럼, 지식의 기억과 검색은 AI와 함께 이루어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치적 메커니즘 안에서 인간은 더 주도적이고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교육에도 반드시 반영돼야 합니다.
김서준: 정책의 종류에 따라서도 난이도 차이가 있을 겁니다. 전문적인 판단이 필요한 복잡한 정책도 있지만, 초등학생이 자기 세계관 안에서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책도 있을 수 있죠. 그런 정책들에 관해 실제 학교 과제로 에세이를 써보게 한다든지 해서 사회에 나가 겪게 될 일들을 학교에서 미리 노출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연: 오늘 대담이 열 번째입니다. 그중 교육 주제로 두 차례 이야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사실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영역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 자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오늘 대표님께서 언급하신 부분에서 착안하자면 정책 분야에도 고관여 영역과 저관여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정책의 경우, 우리가 주된 에너지원으로 전기를 계속 사용할 계획이라면 과학적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초등학생에게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고관여 정책 분야와 저관여 정책 분야를 적절히 분류하고, 교육 단계에 맞게 어떤 분야에서부터 체감하고 편익을 느껴 볼 수 있을지를 분류해서 접근하는 방식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향후 교육 분야 논의에 이런 시도를 접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서준: 예를 들어 사형 제도 같은 주제는 실제로 토론 수업에서 자주 다뤄집니다. 기후 변화 문제도 어린 시절부터 토론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기왕이면 가상의 주제가 아니라, 현재 실제 정책으로 논의되고 있는, 시스템 내에서 활발히 진행 중인 현안을 교과 과정에 잘 반영하여 학생들이 실질적인 토론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세연: 좋은 말씀입니다. 이제 대담을 정리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거버넌스 시스템에 대해 논의한다는 건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작업인데, 대표님께서 그동안의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여러 이슈를 쉽고 명확하게 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논의가 앞으로 다른 분야와 더 복합적이고 통합적인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을 때, 다시 한번 모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김서준: 좋은 자리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