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연: 〈스케치 다이얼로그〉의 첫 순서로 홍태화 미국 외교정책연구소(FPRI) 유라시아 프로그램 연구원을 모셨습니다. 홍태화 연구원은 대한민국의 약소국 시절에 형성된 세계관으로 국제 정치를 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달라진 위상의 대한민국이 국제 무대에서 역량과 잠재력을 극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실적인 진단과 처방을 찾고 있습니다. 향후 몇십 년간 대한민국 또는 그 후신이 될 나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현재 대한민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진단과 앞으로 어떤 자세가 필요할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홍태화: 한국 외교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체급과 비교할 때 활동 반경이 좁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적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외교 정책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한반도 천동설’이라는 말을 씁니다. 세계가 한국을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태도를 비판하는 단어인데요. 우리 외교를 들여다보면 지난 20~30년간 실제로 한반도 천동설에 갇혀 온 부분이 있습니다. 극명한 사례가 문재인 정부 시절입니다. 당시 대미 외교, 대중 외교, 대일 외교, 대러 외교가 모두 남북 관계 개선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대부분의 외교 이슈를 남북 관계, 특히 종전 선언 추구의 하위 변수로 잡았죠. 남북 관계를 미·중 패권 경쟁에서 분리해 발전시킬 수 있다는 허상, 한국이 미·중 경쟁을 중재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연했습니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 안에 들고 G7 정상 회의에도 초청받았지만, 인도·태평양 지역을 넘어선 국제적 활동은 비교적 적습니다. 앞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려면 지금부터라도 국제 정치가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우리 사회 전체가 강화해야 합니다.
김세연: 정치인과 행정가의 인식을 국민 전체 인식의 부분 집합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적으로 자각한 진정한 의미의 시민 상당수가 국제 정세에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판단을 한다면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부족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정책을 펴기가 어려워지겠죠.
과거로부터 누적되어 온 의사 결정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의사 결정을 내릴 때 경로 의존성 또는 그 관성에서 자유롭지 않을 겁니다. 사고 실험을 해보겠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국제 정치에서 너무나 중요한 지정학 변수를 고려하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같은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권역을 조금 더 확장해 아세안 국가, 좀 더 서쪽으로 나아가서 인도를 포함하는 인도·태평양, 또 같이 태평양을 맞대고 있으며 우리와 국력도 비슷하고 가치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는 캐나다와 호주 등도 시야에 넣고 보면 국제 정치 무대에서 우리의 위상과 좌표,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는 것이 좋을지 생각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홍태화: 인구, 경제력, 대북 관계 같은 다양한 변수가 있을 텐데요, 그 변수는 논외로 하고 우선은 지리적인 요소, 지정학적인 역학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역내에서 강한 나라가 등장할 때 주변 국가들에는 두 가지 대응 방안이 있습니다. 하나는 편승(bandwagon)입니다. 강한 나라에 편승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하는 겁니다. 명나라, 청나라 말을 잘 따른 조선처럼 말입니다. 또 하나는 균형(balance)입니다. 세력 균형을 맞추는 거죠. 하나의 강한 나라를 막기 위해 비교적 약한 작은 나라들이 힘을 합쳐서 무게추를 반대쪽으로 옮기는 겁니다. 지금 아시아가 그렇죠. 한미일 관계가 강해지는 것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럽 국가들이 나토(NATO)로 힘을 합친 것도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죠.
두 방법 중에 저는 후자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가 왜 세력 균형을 선택해야 하나,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편승이 현실적으로 살아남는 방법일 수 있거든요. 조선이 명나라, 청나라 말 잘 들었을 때는 솔직히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명나라를 형 국가로 모셔도 일반 백성의 삶에는 큰 영향이 없거든요. 명나라 말 들었다고 백성들의 생활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사실 명·청은 조공 시스템을 통해서 오히려 주변 국가들에 선물을 많이 줬습니다. 경제적으로만 보면 조선이 조공 시스템을 통해서 큰 경제적 이득을 봤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또한 주변국 중에서 조선과 힘을 합쳐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들이 없었죠. 당시에 우리가 중국에 편승했던 것이 자존심 상할 수는 있겠지만 당시 기준으로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21세기는 상황이 다릅니다. 우리는 중국과 달리 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우리 국민은 자유를 원합니다. 중국 같은 일당 독재 체제를 원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중국처럼 중앙 집중된 권위주의식 자본주의를 원하지 않아요. 중국이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면 지금의 민주주의 시스템을 그대로 두지는 않을 겁니다. 인접한 국가에서의 성공적인 자유민주주의 사례가 불편할 수 있거든요. 사실 중국은 이미 주변 국가들의 정치와 경제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우리의 가치와 생활 방식(ways of life)을 지키고 싶다면 중국에 편승하기 어렵습니다. 마침 우리 주위에는 일본, 호주, 필리핀 같은 한국과 비슷한 입장인 나라들이 많습니다. 경제력도 갖췄고 원하는 정치 방향도 있어서 중국 주도의 질서를 거부하는 국가들이죠.
그래서 역내 국가들끼리 연합해서 중국과 밸런스를 맞추려는 건데, 여기서 또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중국이 애초에 강하게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중국이 굉장히 세기 때문인데, 우리가 힘을 합친다고 막을 수 있느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가장 큰 변수가 미국입니다. 미국은 중국을 능가하는 힘이 있고, 아시아가 세계 경제의 엔진이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을 막으려 합니다.
여기서 추가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그럼 왜 중국은 견제해야 하고, 중국보다 세다는 미국은 왜 견제하지 않고 편승해야 하느냐입니다. 직관적으로 이렇게 답할 수 있겠죠. 미국은 우리 같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정치와 경제 체제가 비슷하고, 같이 전쟁도 해본 나라이고. 물론 이런 이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구조적으로 미국은 아시아 국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외 패권 국가인데, 워낙 경제적, 정치적 사이즈가 크다 보니 아시아에까지 개입하는 겁니다. 국제 리더십을 하나의 사명으로 여기고,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아시아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즉, 미국의 힘이 아주 강력해져도 지금 중국이 하려는 것만큼은 개별 국가의 정치 체제를 간섭하거나 훼방하려 하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죠. 군사적인 위협의 수위도 덜하고요. 육상이든 해상이든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고, 지역 국가들과의 직접적인 영토 분쟁도 없으니까요. 이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래서 미국이라는 역외 균형 국가의 힘을 빌리고 한국, 일본, 필리핀이 힘을 합해서 중국을 견제하는 겁니다.
〈스케치 다이얼로그〉는 초장기적 관점의 대담이니만큼 하나 더 강조하고 싶은데요, 먼 미래에는 중국이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른 나라가 될 수도 있죠. 단순히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중국을 천년만년 경계해야 한다, 이런 게 아닙니다. 역내에서 한 나라가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그 힘을 외부로 발산하려고 합니다. 단순히 그 나라가 ‘나쁜’ 국가여서가 아니라, 지역 헤게모니를 거머쥐는 것이 자국의 안보를 극대화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중장기적으로 그 강한 나라가 중국입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단순히 중국이 우리와 체제가 다르다, 이념이 다르다, 이런 걸 떠나서 하나의 강력한 패권 국가가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컨센서스에서부터 우리의 외교 정책을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아까 동남아시아 이야기도 해주셨는데요, 동남아시아는 동북아시아와 달리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천연자원도 풍부해서 경제에 새로운 엔진이 될 수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 둘 중 어느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미국 중심의 제1 세계, 소련이 이끄는 제2 세계가 아닌 제3 세계에 속했죠, 대부분이 식민지 경험이 있어서 반제국주의 정서가 강합니다. 현재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도 비슷한 양상입니다. 미·중 모두의 군사력과 경제적 영향력이 두려워서 어느 한쪽 편을 들기가 어려운 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나라들의 멘탈리티에 강대국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건 서방 국가들에는 마이너스 요소인데, 우리에겐 크게 마이너스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제국주의를 한 나라가 아니니까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우리를 보는 관점은 유럽인들을 보는 것과 다르죠. 우리가 먼저 다가서면 충분히 전략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자연스러운 의문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이 나라들과 협력해서 얻을 것이 뭐냐. 앞서 경제 인구와 천연자원을 언급했는데요, 아주 큰 부분이죠. 동남아가 경제 시장으로서 가지는 가치는 이미 많은 분이 거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안보를 가장 관심 있게 보는 사람으로서 해양 안보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반도입니다. 통일된다 해도 대륙 진출에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먼저, 북한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야 통일이 되고, 그다음에 중국과도 관계가 좋아야 하고, 러시아와도 관계가 좋아야 비로소 진정한 대륙이 펼쳐집니다. 관리하기 너무나도 힘든 변수들이 모두, 그것도 동시에 잘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한국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입니다. 무역 의존도가 2023년 기준으로 75퍼센트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습니다. 결국 바다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지리적 요인 때문에 전략적인 해상 무역로가 정말 중요합니다. 중국이 위험한 이유 중 하나가 이 전략적인 뱃길을 장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남중국해 분쟁의 핵심이 뱃길입니다. 중국은 원유와 물품이 오가는 길을 장악하고 싶어 합니다. 정확한 의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단순히 미국이 선제적으로 무역로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고, 중국의 자체적인 헤게모니 야심을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둘 다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생명선을 중국에 맡기는 꼴이 됩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남중국해에 위치합니다. 이 나라들은 자체적으로 중국에 대항하기는 꺼리지만, 우리가 이 나라들을 발판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이 이 나라들을 발판으로 중국을 견제할 때 우리가 옆에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중국에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죠. 우리가 한반도에만 집중하는 동안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포함해 세계로 지도를 넓혀 갔습니다. 일본판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은 동남아시아를 지역 안보 및 경제의 중요한 축으로 봅니다. 사실 일본은 평화 헌법이 있어서 대놓고 다른 나라들과 군사 협력을 하기 까다롭습니다. 대신 일본은 해양 경찰 협력을 강화하고 있어요. 동남아시아 국가의 해양 경찰이 중국 어선이나 해적을 감시할 때 사용하는 레이더 탐지 기술을 많이 전수해 줍니다. 군사 협력이 힘드니까 해양 경찰을 이용하는 거죠. 이런 작업도 크게 봤을 때는 결국 중국의 뱃길 장악을 막기 위해 일본은 어느 정도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상응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때 신남방 정책이라는 상당히 참신하고 좋은 취지의 정책이 있었습니다만, 경제적인 협력에 그쳤습니다. 안보 협력에 대한 방향성이 약했는데, 아쉽습니다.
다음으로 유럽을 살펴보자면, 요즘 유럽에서는 인도·태평양 안보와 대서양 안보의 불가분성이라고 해서 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개념이 대두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영국 측에서 처음 제안한 어젠다인데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많은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2022년부터 나토 정상 회의에 한국, 일본 지도자들이 초청받는 것이고요. 다만 특히 미국에서는 이 개념에 대해 의견이 좀 갈리는데요, 우리도 협력은 좋지만 어떤 부분을 협력하고 또 어떤 부분을 우리가 독자적으로 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프랑스, 독일, 영국 해군이 가끔 인도·태평양으로 들어와서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 작전을 합니다. 우리로선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까지 와서 중국을 견제해 주니까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에 투입할 수 있는 군사력은 사실 얼마 안 됩니다. 아시아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유럽 대륙에서 러시아를 막는 데 집중하는 편이 우리에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를 잘 막아 주면 미국은 그만큼 유럽에서 힘을 조금 빼고 아시아에 힘을 더 실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공화당 일각에서는 ‘굳이 아시아까지 오지 말고 앞마당부터 잘 지켜 주면 우리 일이 수월해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고요. 일각에서는 유럽 국가들이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재무장을 하는 대신 ‘우리는 아시아에서 이 정도 도와주고 있지 않냐’는 정치적 명분을 키운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저는 하드 파워 ‘배치’의 측면에서 유럽이 우리에게 크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가 유럽과 경제적, 군사적으로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있죠. 유럽은 1990년대 탈냉전 이후 서서히 무장을 해제하면서 방산업체들이 약해졌습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재무장을 시작하려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방산업이 정말 강하지 않습니까? 이미 폴란드나 체코를 통해서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우회 수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죠. 우리나라 방산 기업이 유럽의 방산업에 뛰어들어서 이들의 재무장을 돕는다면 첫째로는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고, 둘째로는 미국이 아시아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 방향으로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유럽과는 소프트한 분야, 즉 비전통 안보 분야도 충분히 협력 가능하다고 봅니다. 대표적으로 경제 안보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에 세계 최대 노광 장비 기업인 ASML이 있잖아요. 우리가 흔히 칩4(Chip 4)라고 하지만, 칩4만으로는 부족하죠. ASML까지 포함해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비로소 확보됩니다. 또 천연자원도 우리가 유럽에서 가져갈 부분이 있을 테고요.
내러티브적인 측면도 있는데요, 중국이 항상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백인 서양 국가들이 18~19세기 식민지 시대처럼 아시아를 다시 가져가려고 한다. 한국, 일본, 필리핀, 너희들은 우리와 같은 황인종인데, 우리가 힘을 합해서 백인들에게 맞서야 하지 않겠나.” 이게 중국의 내러티브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늘 말하는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 아시아 신안보관, 이런 개념이 다 외부 세력을 배척하고 우리끼리 알아서 살자는 얘기입니다. 여기에 대항하려 한다면 유럽 국가들과도 협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장 금전적인, 전술적인 이득이 있지는 않아도 국가의 내러티브상 우리가 서구식 자유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발산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인종이 아닌 가치를 매개체로 하는 협력 네트워크죠.
중국은 대놓고 전쟁을 벌이는 대신 회색 지대에서 애매한 수위의 공세를 펼칩니다. 군사적으로는 인공섬을 건설하고 뱃길을 막고 중무장한 어선을 보내서 필리핀 어선과 충돌시키고, 동시에 온라인이나 매체를 통해 한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대중(對中) 여론 형성에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 프랑스, 체코, 폴란드 같은 나라에서 중국이 자국에 우호적인 매체를 지원하고 우호적인 정치인에게 뒷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밝혀졌는데, 과연 한국에서는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관련 사례들과 대응 방법을 유럽과 공유하면서 공동 대응할 수 있겠죠.
김세연: 과거 영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유럽 대륙에서 패권국이 등장하지 않도록 균형추 역할을 했고, 또 프랑스가 독일의 통일을 저지하기 위해 유럽에서 세력 균형을 조절하면서 국익을 극대화했던 방식을 지금의 아시아에 대입해 보자면 한국, 일본, 필리핀 등이 역외 패권 국가인 미국에 밴드왜건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역내 패권 국가인 중국의 부상에 대응해 균형 추구 전략을 실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기, 중기, 장기를 넘어서 초장기에 일어날 일을 사고 실험을 한다면 인구와 기후라는 변수를 빠트릴 수 없을 겁니다.
일본 인구는 2022년에 1억 2500만 명대가 무너졌어요, 한국도 10년 대로 5000만 명 밑으로 내려갈 추세이고, 중국은 최근에 감소세로 돌아섰고, 러시아는 그보다 일찍 감소하기 시작했죠. 반면 동남아시아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고요. 또한 21세기 후반이 되면 기후 변화로 적도 인근 국가는 농업은 물론 거주도 어려워질 정도로 산업과 인구 지형이 바뀌고, 시베리아 지역의 농업 생산력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식량 안보와 인구 변동에 따른 군사력의 변화를 과학 기술로 보충하는 노력이 적기에 이뤄져야 합니다. 인구와 기후 변화의 추세를 고려할 때 2080년대 미국 국력의 변화,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의 변화, 특히 대한민국 혹은 그다음 국가에서의 변화, 이 역학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드립니다.
다음으로, 동남아 국가들과의 해상 안보 협력은 우리가 부족하다기보다 아예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드 파워 면에서 제국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중견 국가 정도, 즉 만만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하드 파워를 가지고 세계 여러 국가와 다층 복합적인 안보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국민의 안전과 국익의 신장을 담보할 수 있는 체계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이 상상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이 해양 경찰 업무의 노하우와 정보 자산을 동남아 국가들과 공유하면서 자국의 안보 인프라로 사실상 편입시키고 있는 것을 벤치마킹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네요. 특정 방식을 똑같이 따라 할 필요는 없더라도 접근 원리를 잘 응용하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술적으로 최초의 원형을 개발하는 데에는 능하지 않아도 일단 모델이 나오면 급속히 추격하는 것은 상당히 잘했습니다. 어쩌면 외교 안보 전략도 다른 국가가 잘하고 있는 점을 벤치마킹하면서 여기에 비교 우위를 얹어 국익을 더 높이는 시도를 해볼 수 있겠죠. 산업 전략에서의 성공 경험을 외교 전략에 접목해보는 거죠. 하드 파워는 중견 국가급으로 하되, 소프트 파워 면에서 동남아 국가들과의 안보 협력, 유럽 국가들과의 방산 협력 등을 통해 훨씬 더 강한 면모를 가지는 거죠.
물론 중국과 일본은 위상이 더 올라간 한국과 경쟁 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큽니다. 희망컨대 우리가 두 나라와의 국력 격차를 상당히 줄여서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됐을 때 갈등과 긴장 발생 가능성이 커지겠지만, 이런 경우에도 역내 균형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향은 뭘까요? 강대국들과 강대국이 아닌 국가들과의 연계 전략, 이런 다층 복합 외교 전략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질문드립니다.
홍태화: 첫 번째 질문은 인구와 기후 변화를 고려한 미래 역학,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대전략을 세울 때 어떤 벤치마킹을 해야 할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인류 역사를 보면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은 자원입니다. 인구 대비 자원이 적으니까 다른 사람이 가진 자원을 가져오려고 전쟁을 하는 거죠. 기후 위기가 지속하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생존하기 위해 옆 부족, 옆 나라의 자원을 빼앗아 와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고요. 사실 이런 일은 이미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수단의 다르푸르 사태도 결국 수자원을 둘러싼 전쟁이었죠. 이란과 파키스탄도 최근에 수자원 문제로 관계가 안 좋아졌어요. 인간이 자원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는 기후에 달려 있으니 기후 위기가 심화하면 국제 관계가 훨씬 복잡해질 수밖에 없죠.
특히 태평양 도서 국가들은 나라가 아예 물에 잠길 위기잖아요. 우리 입장에서도 위험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정치 불안이나 경제 불황처럼 국내 문제가 생겼을 때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국력을 밖으로 투사시켜서 일으키는 전쟁을 관심 전환용 전쟁(diversionary war)이라고 합니다. 국면을 전환하는 거죠. 서방에서 경제적 난관에 빠진 중국이 위험하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전환용 전쟁 그 자체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 중이고, 중국은 적합한 예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적어도 정책 서클에서는 그런 우려가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은 인구 구조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고, 경제도 다시 중앙 집권화, 사회주의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공기업에 힘을 실어주는 형태라 혁신이 쉽게 이뤄지지 않아서 중국 경제 전망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물론 중국 경제의 탄력성을 주장하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적어도 과거의 초고속 성장 시대는 끝난, 비교적 저속 성장의 ‘뉴노멀’ 시대에 들어선 것이 아니냐, 그렇게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걱정하는 거죠. 중국이 국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대만을 공격하는 거 아니냐, 남중국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거 아니냐. 공산당 독재를 공고히 하기 위해 모험수를 두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기후 변화가 중국의 경제 성장을 더디게 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럼 이때 방금 말씀드린 논리를 적용하자면, 경제 성장이 느려지고 인구 구조가 안 좋아질수록 중국 입장에선 기회의 창이 닫힐 수도 있으니까 대만에 행동을 취하려 할 수도 있겠죠. 한국과 일본은 미래로 갈수록 점점 약해지니까 더 취약해질 수 있고요. 우리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현역 군인이 너무 없는 게 문제인데, 해결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대내외 정책의 통합이 필요하죠. 이민 문제와 직결되고, 출산 정책에도 직결되고. 사회 전반에 걸친 대토론이 필요해 보입니다.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어야 하죠.
다음으로 대전략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대전략은 제국의 경험이 없는 국가라면 마련하기 어렵습니다. 대전략에는 여러 정의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가용한 자원과 목표의 균형’이고요. 원대한 목표와 제한된 자원 사이에서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정책 우선순위를 두는 예술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대전략의 발현은 크게 두 방향입니다. 하나는 대외 정책과 대내 정책의 융합, 또 하나는 각 지역 전략들의 융합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라면 미국의 아시아 전략, 미국의 유럽 전략, 미국의 아프리카 전략의 통합을 미국의 대전략이라고 봅니다. 국가가 대전략을 가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여러 대륙에 이해관계, 스테이크(stake)가 걸려 있을 만큼 강한 나라여야 합니다. 둘째, 대외 정책과 대내 정책이 부드럽게 융합될 만큼 국가적인 내러티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경제 성장을 급격하게 이뤄서 세계 경제 규모 10위에 든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만큼 강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요. 많은 분들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뱃길이 끊기든 말든 우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한테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우리는 이미 세계 여러 지역에 스테이크가 있는 단계인데, 여전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러티브는 더 아쉽습니다. 우리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가 지향하는 국제 질서와 아시아 질서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중국을 견제하고 왜 일본과 화해해야 하는가. 흑백 논리에 치중한 좌우 대결만 있을 뿐, 내러티브 통일이 없습니다. 정치권이 유독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전략을 갖기가 힘들어요.
점차 변화해야 할 텐데, 다른 나라의 발전 전략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국제적 현상을 볼 때 저 나라가 A를 했으니 우리도 A를 하자, 이게 꼭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전인수식 교훈 찾기를 정말 경계해요. 요컨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으니 주한 미군 철수도 시간문제라는 식의 분석은 정확하지도 치밀하지도 않죠. 하지만 국제 정치 역학상의 근본 명제들은 존재합니다. 예컨대 경제 대국은 무역로가 중요하고 이 길을 지키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 않습니까? 미국, 중국, 일본 모두 신경 쓰는 대목이죠. 그런데 우리는 경제 대국이면서 무역로를 지키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요. 굳이 우리가 직접 군사력을 파견하는 방법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동맹국들을 돕는 것이라 하더라도요. 이런 국제 정치의 명제를 각인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명제는 말씀드린 대전략의 발현 그 자체와도 연관이 있어요. 무역으로 경제 성장한 나라는 세계 각지에 스테이크가 있어요. A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B 지역에 영향을 주고, B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C 지역에 영향을 준다. 세 곳은 연결돼 있다. 이것도 하나의 명제인데, 이와 관련한 정책적인 자극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중동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는 관심이 없어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도 이게 다 나토 때문이다, 미국 때문이다, 이런 프로파간다식으로만 소비가 돼요. 남중국해 문제도 우리 문제가 아니라 베트남, 필리핀과 중국의 문제로 여겨요. 우리 경제의 사활이 달린 대만 문제에도 관심이 없죠.
교육 체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해요. 어쩌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안보 위기가 생겨서 우리가 반강제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어요. 대표적인 게 대만일 텐데, 대만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사고방식도 급격히 변화하고 당면한 상황을 자각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생각을 다져 놔야 실제로 일이 터졌을 때 대비할 수 있겠죠.
김세연: 국가 이성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봅시다. 이때 한국의 국가 이성은 적어도 대외 인식 측면에서는 과연 구체적이고 안정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지, 다르게 표현하면 분열된 상태가 아닌가 하는데요, 사람으로 치면 이중인격의 상태에 있는 거죠.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미 인식, 대중 인식, 대일 인식이 극과 극으로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다른 국가에서 대한민국을 볼 때는 불안정한 거죠. 어디로 갈지를 모르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근본이라면 역시 교육으로 가야 할 텐데, 역사 인식부터 분열해 있습니다. 정치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역사관의 분열이 극심합니다. 대외 인식의 분열과 역사 인식의 분열이 현재와 과거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 맞닿아 있는 세계관의 분열에서 비롯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 형성 단계에서 이 부분이 정리가 안 된 겁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동부에 친러 성향의 주(州)들에서 우크라이나의 유럽 연합(EU) 가입과 서방화 노력에 반대하고 러시아에 찬동했던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실존적 위기가 닥치니까 자기 정체성을 비로소 찾았습니다. 40대, 50대 나이에도 징집돼서 러시아의 총알받이로 쓰이는 걸 보니까 이제 아니라는 걸 인식한 거죠. 국가 이성의 분열이 실존적 위기에 직면하고 난 다음에야 통합되는 건 상당히 비극적인 일인데, 우리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불투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통합과 회생의 길을 갈 수 있을지, 아니면 두 개를 억지로 붙여 놓은 것이라면 차라리 분할하는 편이 맞을지 생각해 봐야겠죠. 우리의 사고 실험에서 분열된 국가 이성을 가지고 소프트 파워적인 제국, 하드 파워적인 중견 국가의 위상을 획득하기란 어렵다고 봅니다. 단일한 정상 국가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도 사실 의문이고요. 어느 쪽이라고 단정적으로 섣부른 판단을 할 수는 없습니다. 미래는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열어 놓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외 인식의 분열을 국내 정치에 투영해 보자면 지금 좌우의 극단주의를 대표하는 정치 세력들이 국가 위기 앞에서 대동단결할 수 있을까. 저는 거의 힘들다고 봅니다. 그럼, 인식의 통합, 사회 통합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통합을 이룰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통합을 최선의 안으로 놓고 최대 노력을 기울이되, 정 이뤄지지 않으면 그때는 어떤 방식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가령 링컨은 내전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 통합을 이루어 낸 거고요. 노예 제도를 놓고 발생한 갈등이 내부 전쟁으로 번진 거죠. 하지만 그 결과 자유, 평등, 인권에 대해서 미합중국은 어떤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라는 것이 명확히 정리되는 결과로 이어졌죠.
국사 교과서에 ‘민주주의’라고 넣을지, ‘자유민주주의’라고 넣을지 표현을 두고 논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데, 사실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가 표면으로 올라온 현상으로서의 논쟁인 거죠. 국제 정치, 외교 전략의 안정적 집행을 위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사회 통합의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고 풀어야 할지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홍태화: 제가 교육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세계사 교육과 국사 교육을 통합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책을 보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어요. “조선 반도는 대륙으로 통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항상 시달려 왔다.”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그런 지정학적 맥락에서 우리 역사를 봐야 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 국사는 항상 우리만의 역사를 보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국제 학교에 다녀서 서양식 커리큘럼을 배웠는데, 한국 학교를 나온 친구가 들려준 얘기가 있어요. 국사 시간에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배우는데,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이를 막으려는 영국, 두 나라의 그레이트 게임에 관한 얘기는 없다는 거예요. 일반 학생이 봤을 때는 영국 백인이 힘자랑하려고 한양도 아니고 뜬금없이 하필 거문도를 점령해서 우리가 피해를 봤다, 이렇게 끝나요.
지정학적 맥락에서 러시아는 남하해서 영향력을 넓히려 했고, 영국은 이걸 저지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이 지리적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적합한 거문도를 점령합니다. 그 이후에는 일본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워 러시아에 대응하게 합니다. 결국 영국과 미국이 동맹인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것을 용인하면서 우리가 제국주의 열강들 계산의 희생양이 된 거죠. 이런 맥락 없이 단순히 희생자 내러티브로만 가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상한 곳에서 힘센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런 단순하고 단편적인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현대사를 봐도 그래요. 흔히들 우리 현대사의 두 축을 산업화와 민주화라고 합니다. 정치적으로 진보 세력은 민주화, 보수 세력은 산업화, 두 세력 모두의 공헌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 두 가지 모두 국제적 흐름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산업화에 전념할 수 있었던 배경을 봐야죠. 냉전 시대였고, 미국은 한미 동맹으로 한국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실재하는 위협에 대비해 국방에 신경을 많이 썼지만, 그래도 한미 동맹 덕분에 경제에 에너지를 투입할 여력이 있었습니다. 일본식 표현으로 미국의 방패가 있었기에 우리가 열심히 공장을 돌릴 수 있었죠. 미국의 방패는 냉전이라는 맥락이 있었기에 펼쳐진 것이죠. 저도 물론 우리 선조들이 열심히 희생하신 부분에 너무나 감사하죠. 그런데 그런 희생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감대가 없어요.
민주화도 마찬가지입니다. 1987년 6.29 선언과 그 이후 민주화의 과정을 봅시다. 탈냉전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민주화와 자유화 열풍이 불었고, 여기에 더해 미국이 그동안 한국 정부를 압박해서 점진적으로 자유화를 유도해 온 것이 맞아떨어지면서 이뤄진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지극히 국내적인, 한국적인 현상만으로 바라보는 것은 현실에도 맞지 않고 우리가 글로벌한 시각을 갖는 데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정치권이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던지는 어젠다의 내용도 문제지만, 어젠다를 던지는 방식과 이유를 한번 보세요. 2023년 1월에 윤석열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시 여당 의원들이 핵무장을 거론하기 시작합니다. 예전부터 관련된 주장을 하시던 분들도 있지만, 단순히 대통령과 보조를 맞추기 위한 움직임도 분명 있었습니다.
핵무장에 관한 토론은 얼마든 할 수 있죠. 필요성에 공감할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큰 도박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토론 자체는 유익합니다. 국회에서 의미 없는 정쟁보다 그런 정책적인 토론이 오가는 것 자체는 오히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핵무장을 왜 해야 하나,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나, 이런 얘기는 일절 없이 대통령이 한마디 하니까 거드는 형식으로 나오는데, 이건 일종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개인의 정치적 득실, 특히 상대 당, 혹은 자당 내 입지를 기준으로 삼으니까 제대로 된 토론이 안 되는 거죠. 그 태도부터 바뀌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정치권에서 바람직한 외교 안보 토론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세연: 저질화된 정치의 수준을 어떻게 높일 수 있을지는 정말 중요하지만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주 중요한 화두를 던져 주셨는데요, 만약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진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 항목을 추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 대화가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겠죠. 그런 점에서 국사와 세계사의 통합은 아마도 우리 학생들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행성에서의 세계를 인식하는 데 중요한 변화의 출발점일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는 학부로 통합이 많이 이뤄지고 있지만, 한때 서울대에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가 따로 있었습니다. 단순한 예이지만 통합된 역사 인식을 저해하는 구조가 오랫동안 있었던 거죠.
국가 이성이라는 개념의 실체는 국가 공동체 구성원의 통합된 이성의 존재를 전제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성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블록 중에 역사관이 있겠죠. 독립된 개체로서 자아, 주체성, 자의식이 확고하게 있어야 그다음에 세상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유아에서 성인이 되려면 통과해야 하는 주요 관문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상화, 객관화하느냐입니다. 홍 연구원님 말씀처럼 한반도 천동설에 갇혀 거문도 사건의 지정학적 맥락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벗어나야겠습니다. 상호 연결된 세계는 역동적인 시스템 안에서 여러 국가의 부침에 따라 판도가 바뀌어 가는데, 우리는 변화하는 판도 속에서 우리의 좌표와 위상을 시점별로 어떻게 설정하고 변화시켜 갈 것인가. 이 인식이 있으려면 국사와 세계사의 통합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주 중요한 화두를 던져 주신 것 같아요.
몇 가지 항목을 더 짚어 보겠습니다. 다층 복합 외교 전략을 어떻게 짜볼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외교 정책 중에서 인상적인 것을 꼽자면 북방 정책을 들 수 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기에 냉전 체제가 해체될 때 북한의 친구들을 우리 친구로 빠르게 편입시키면서 북한에 대한 외교적인 고립 전략을 폈습니다. 그때 북한 내부에서 위기감이 대단히 높았다고 합니다. 나름 우리가 취했던 최초의 대전략 개념에 부합하는 정책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튀르키예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민족 동질성을 연결 고리로 긴밀한 외교 관계를 계속 가져가는 거죠. 아까 말씀하신 베트남, 필리핀, 몽골, 이런 국가들은 중국으로부터 겪고 있는 곤란의 정도가 비슷한 면이 있어서 우리와 동병상련 입장에서 뭔가 이야깃거리가 나올 수도 있고요. 앞서 언급하신 일본이 동남아에 해양 경찰 역량을 지원하는 것을 참고해서 우리도 이런 연결 고리를 계속 만들어야죠. 이 국가들과 방산 기술을 공유하면서 방산 수출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고, 군사 협력의 파트너가 될 수도 있고. 이런 하드 파워적인 연계 위에서 공동 시장 창설이나 인적 교류 같은 경제적인 협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문화를 비롯한 소프트 파워적인 교류도 좋은 방법이 되겠네요.
이처럼 다양하게 엮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의 안보 동맹)에 우리도 가입하겠다고 한다거나, G7에 우리가 자주 초청을 받기는 하지만 안정성이 보장된 것은 아니니까 상시 옵저버의 지위를 확보한다거나. 또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미국·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5개국의 정보 동맹)도 있고요. 다층 복합 전략으로 기존 체계를 강화하고 안정화하는 방안과 새롭게 만들어 내는 방안이 있을 텐데,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 질문드립니다.
홍태화: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것도 창의성이지만, 말씀하셨듯 기존 플랫폼에 가입하는 것도 창의성입니다. 오커스, 쿼드, 파이브 아이즈에서도 우리가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요, 크게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기존 회원국이 우리를 환영할 것인가. 둘째, 우리가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가. 셋째,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제가 첫 번째를 말씀드린 까닭은 다소 현실적입니다. 사실 한국의 G7 진입은 어렵다고 보는 분들도 계십니다. 왜냐하면 G7은 하나의 기득권이거든요. 국제 정치의 지위를 상징하는데, 한국이 싫거나 자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회원국이 여덟 개로 늘어나면 그 희소성이 줄잖아요. 재밌게 들리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나라들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G7 진입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는데, 다만 G7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할 필요는 있죠. 혹여나 G7에서 나가는 나라가 생기면 거기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을 테고요. 예를 들어 최근 미국 공화당 일부 인사들은 G7에서 캐나다를 빼고 한국을 추가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해요. 그들은 G7을 대중, 대러 군사 정치 공동체로 운영하고 싶은데, 캐나다는 재무장도 느리고 유약한 모습을 보여 왔으니까 재무장 잘돼 있고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한국을 넣자, 이렇게 주장하는 거죠.
오커스는 미국, 영국, 호주라는 앵글로색슨 국가로 이뤄져서 우리가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최근에 일본이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잖아요. 오커스와 파이브 아이즈 모두 앵글로색슨 중심의 연합체이지만, 외부 협력 파트너들은 이해관계와 가치를 따져서 정하는 것 같습니다. 오커스를 두고 자주 거론되는 핵잠수함 말고도 방산업 통합도 정말 중요하거든요. 사실 미국에서는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동맹국들의 합계 산업 능력에 대한 평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도·태평양 안보 위기가 생기면 동맹국들 간에 군사력뿐 아니라 산업력까지 일체화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죠. 군함 보수 및 수리가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미국 국내법상 미국 군함은 국내에서 건조해야 하는데, 수리는 외국에 맡길 수 있습니다. 일본에 맡기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많아요. 일본에서 수리한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도 우리가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준비를 마쳤다는 전제가 필요하죠. 일례로 2023년 초 미 해군이 우리 측과 군함 보수 수리 협력을 검토했지만, 한국 조선소에는 방공망이 없어 주저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어떤 기구에 가입할지 말지, 가입한다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생각함과 동시에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예시들을 소자주의 협력이라고 합니다. 다자주의 중에서도 숫자가 의도적으로 적고, 뜻과 의지와 능력이 비슷한 나라들끼리 하는 소자주의 협력의 중요성은 촘촘한 그물망에 있습니다. 그물망은 항상 구멍이 날 수밖에 없는데, 그물을 여러 개 칠수록 구멍이 작아지죠. 그물이 겹쳐지니까요. 소자주의 협력을 왜 굳이 불필요하게 중첩되게 하느냐가 아니라, 구멍을 줄이는 것에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지역 전략을 짜고 현존하는 지역 기구들에 가입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일본이 정확히 그렇게 하고 있어요. 각 기구의 멤버들로 다이어그램을 그려 보면 쿼드, 오커스, G7 소속 국가들은 중첩됩니다.
기구 하나가 고장이 나거나 정치적 의지가 부족해서 동력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보험들이 뒤에 남아 있어 바람직한 전략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가야죠. 다만 모든 기회에는 위험이 따른다는 걸 유념해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 국내에서도 강한 비판이 나왔어요. 일본을 포함한 G7 정상들은 이미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상황이었습니다. G7이든 쿼드든 우리에게 일정한 책임을 수반합니다. 물론 여기에 반발하는 나라들이 있고 반발하는 국내 정치 세력도 있을 텐데, 어떻게 설득할지가 관건이겠죠.
김세연: 사실 그 대목은 분열된 자아, 분열된 세계관, 분열된 역사관, 분열된 국제 정치관에서 비롯하는 문제이고 근본적인 부분까지 이어지는 문제라 우선은 우리가 인지한 상태로 지금 논의를 이어 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일본의 TV, 자동차, 반도체를 급속히 추격해서 넘어섰거나 거의 대등한 단계까지 왔는데, 제국을 운영한 경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일본의 외교 정책을 벤치마킹해서 그걸 넘어서거나 적어도 대등한 전략을 구상하는 것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외교부 예산이 4조 원이고 1000명의 외교관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일정 기간을 두고 이를 적어도 두 배, 세 배로 늘려서 외교 역량을 비대칭적으로 강화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아까 일본이 그리는 다이어그램에서 CPTPP는 사실 미국 오바마 정부가 만들고 나서 미국이 안 쓰기로 한 걸(TPP) 일본이 거저 가져간 거죠. 되게 영리하게 움직인 거죠. 누가 만들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한테 어떻게 도움이 되게 쓸 건지가 중요합니다. 바퀴를 남이 만들었다고 안 쓸 이유가 없죠.
우리가 더 확장된 외교 자산을 국가적으로 보유한다면 중동에서, 남미에서, 아프리카에서 여러 나라와 소자주의 협력 틀을 만들 수 있겠죠. 그런 틀을 한두 개가 아니라 열 개, 스무 개를 만들 수도 있어요. 10년, 20년에 한 번 몇십 개 나라 정상들을 한 번에 다 초청하고 그다음 관리는 소홀한 것보다는, 아프리카 안에서도 일대일 양자 관계를 훨씬 강화하는 바탕 위에서 아프리카 역내에 여러 개의 소자 협력 틀을 만들고, 그 그물들이 계속 쌓이면 우리는 빈틈이 거의 없는 촘촘한 그물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 점에서 어떤 과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지 의견 부탁드립니다.
홍태화: 외교부의 인력 부족도 문제입니다만, 외교부가 유능한 인재들이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생태계라는 얘기를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습니다. 똑똑하고 젊은 외교관들을 해외로 연수 보냈더니 더 큰 세계에 눈을 떠 사직서 쓰고 나와서 사기업으로 이직한다는 거예요. 유능한 인재가 창의성을 펼칠 수 있고, 이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문화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단순히 어린 나이나 직급이 큰 걸림돌이 된다면 조직 전체의 손해겠죠.
롱 텔레그램(Long Telegram)이라고 미국의 대소련 냉전 전략의 밑바탕이 된 장문의 외교 전문(電文)이 있습니다. 1946년에 모스크바 미국 대사관에 있는 미국 대사 대리가 러시아 역사상 과거 차르가 지금의 스탈린과 무엇이 비슷하고 다른지 서술하고, 미국이 소련을 봉쇄해서 내부적으로 무너지길 기다려야 한다고 썼어요. 너무 명문이고 좋은 전략이라 미국 최고위층까지 전파되고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도 실리고, 미국의 향후 50년 냉전 전략의 밑바탕이 됐어요. 우리나라에서 대사 대리, 그러니까 부대사급 혹은 그 이하인 분이 전문을 썼는데, 이게 대전략의 방향을 정한다? 상상하기 어렵죠.
단순히 인재가 없다는 걸 떠나서 경직된 위계질서 속에서는 어려운 일이죠. 외교부 특유의 문제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외교부는 그중 나은 편인지도 모르죠. 저는 이게 사회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흔히들 이런 말 많이 하지 않습니까. 똑똑한 이과 학생은 다 의대로 빠지고 똑똑한 문과 학생은 다 로스쿨로 빠진다고. 저는 단순히 돈 때문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 세대에겐 솔직히 돈만큼이나 ‘가오’가 더 중요해요. 내 의견이 반영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남들이 나를 능력 있다고 인정해 주는 게 ‘가오’예요. 여기에 물론 돈도 포함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이런 것들이 주어지지 않는 환경이라면 동기 부여가 떨어지겠죠. 인력 충원도 물론 중요하지만,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국을 안 해본 나라가 제국적인 마인드를 가지기가 정말 힘들어요. 우리가 못나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인데, 그나마 비슷하게 모방이라도 하려면 제국적인 관점을 가지는 훈련을 해야겠죠.
조금 전에 아프리카를 예시로 들어 주셨는데, 2011년에 리비아에서 내전이 났을 때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미국보다도 훨씬 선제적으로, 그리고 강경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두 나라에서 왜 굳이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문제에 우리가 개입해야 하느냐라고 하는 지도자, 국민은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큰 상관 없어 보여도 우리는 강대국으로 역할을 해야 하고 역사적 유대 관계도 있으니 인도주의적 위기를 막아야 한다는 의식이 퍼져 있던 거죠. 개개인들이 모두 지정학이 어떻고 중동 석유가 어떻고 리비아가 대테러 작전에 중요하고 이런 걸 알고 있지는 않거든요. 방향성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과 국가적인 컨센서스가 있는 겁니다. 그걸 지금부터 우리도 설계해 나가야 해요. 우리가 군사적 제국은 아니지만 문화적 제국이고 경제적으로도 전 세계에 발자국이 있고 정치적으로도 점점 그렇게 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국가적인 컨센서스를 만들어 가야죠. 우리가 왜 해외에 신경 써야 하는지, 왜 다른 대륙의 일을 알아야 하는지, 이런 것들 말입니다.
김세연: 외교부라는 한 부처의 경직된 문화는 역시 전체 시스템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의 표면에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직적인 문화를 바꾸고, 존재하지 않는 인식을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 내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데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풀지 않고는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기가 어려워지고 우리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약하는 결과를 낳게 되겠죠. 실은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태일 수도 있고요.
가령 강화된 외교 자원과 고도화된 눈높이의 전략을 우리가 잘 설계하고 반영해서 실행에 옮기려면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외교부 조직을 설계해야 할 텐데요, 어떤 분은 이런 말씀도 하시더라고요. 차관보를 열 명을 만들자. 장관은 물론이고 차관을 열 명으로 만들기는 어려울 테니 차관보를 적어도 열 명 만들어야 권역별로 지역 전문가들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피라미드 형태의 조직에서는 승진에 한계가 있다 보니, 가급지와 라급지를 왔다 갔다 하다 해서, 소위 ‘온탕-냉탕’이죠, 전문성이 떨어지고 네트워크가 약해지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벗어나기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아이디어를 주셨는데, 그러면 아프리카, 중동, 남미는 열악한 근무지로 인식돼 있지만 개별 지역의 외교 정책상 함의는 더 중요할 수 있는데, 차관보까지만 가면 해결이 되느냐, 이런 문제도 나올 수 있고. 또 기존 조직 문화를 바꾸기가 정말 어렵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했어요.
국민적 인식의 통합은 아까 교육 과정에서 국사와 세계사의 통합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이런 교육 과정을 거친 시민이 성인이 됐을 때 국제 무대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 우리나라의 일로 감각적으로 바로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사실 몇십 년이 걸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튼 이런 장기적인 과제를 우리가 계속 추출하고 그런 과제가 잘 실행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게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거니까요.
두 가지를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인구 5000만 대한민국과 3000만 대한민국에서 가질 수 있는 상비군의 규모,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AI 또는 로봇 기술을 감안할 때 우리의 군사 전략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1980년대에 징병 자원 중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는 비율이 50퍼센트 수준일 때 우리 군을 ‘60만 대군’이라고 했죠. 지금은 현역 판정률이 90퍼센트가 되어도 50만 병력을 유지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40만, 30만도 유지하기 어려워지겠죠. 연간 출생아 수가 30만 명이 깨졌기 때문에 언젠가는 여성 징병제가 되지 않으면 상비군 규모가 20만 명을 달성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령 지금 40만 명대 후반의 병력 자원이 절반 정도로 줄었을 때 우리의 작전 개념, 군사 전략이 송두리째 바뀌어야 할 텐데, 지금 그걸 충분히 준비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외교와 한 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안보 정책 중에서 군사 전략과 작전 개념이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할지에 대해 의견을 여쭙겠습니다.
홍태화: 저출산 문제에 따른 군 편성, 이 세부 이슈 하나만 깊게 연구하는 분들이 계셔서 아마추어 같은 식견을 드리기가 죄송합니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미국의 국제정치 학자께서 한번은 저한테 물어보시더라고요. 태화 씨는 현대전에서 육군, 해군, 공군 중에서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저는 현대전에서는 공군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늘 지상전이 제일 중요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땅에 붙어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함의하는 바가 큽니다. 그리고 징병제와도 직결해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적국과의 전쟁이란 결국 북한과의 전쟁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징병제를 통해 병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확실합니다. 전쟁이 벌어져서 북한 지역을 점령하면 치안 유지를 해야 하는데, 이때 사람과 사람 간의 접촉이 필요합니다. 지상에 실질적으로 있는 병력이 필요한 거죠. 영어로는 ‘boots on the ground’라고 합니다. 전투에만 이기는 게 아니라 영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통치하는 과정에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즉, 땅을 밟고 있는 군화들이 상당수 있어야 북한 전역을 수복하고 통치할 수 있습니다. 징병제를 모병제로 전환했을 때 아무리 뛰어나고 훈련이 잘돼 있는 병력이어도 숫자 자체가 부족하면 이런 통제가 어렵습니다.
미군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전한 이유도 탈레반을 쉽게 못 이겨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점령하고 치안 유지하고 거버넌스를 창출하는 데 실패해서 고난을 겪은 거죠. 그런데 이런 일은 다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해야 합니다.
아무리 AI가 발전하고 로봇이 등장하고 잘 훈련된 장교들이 있다 해도 징병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AI가 발전할수록 그것을 사용하는 군인의 능력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연구도 있죠. 인공지능이 일종의 증폭기인데, ‘인풋(input)’인 인간의 역량의 차이가 AI를 거친 ‘아웃풋(output)’에서 증폭된다는 겁니다. 1과 2의 차이는 1이지만 1×3과 2×3의 차이는 3이 되는 것처럼요.
하지만 우리는 인구가 심각하게 줄고 있어서 징병제가 있어도 병력이 많이 줄어들겠죠. 아까 언급하신 여성 징병제도 사회적으로 이야기가 나오겠죠.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고 정치적 합의도 필요한 내용이지만, 여성 징병제가 정말로 시행된다고 가정하고 말씀드리자면, 정말 큰 가정입니다만, 저는 여성이 충분히 효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전투 병과에는 생각보다 여성이 많이 없습니다. 하지만 드론 운영, 철책 정비, 데이터 분석, 이런 임무는 여군에게 많이 맡기고, 그분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남성 군인만큼 혹은 그 이상의 효율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 여성이 그걸 못할 이유는 전혀 없죠.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사회적 합의가 많이 필요해 보입니다.
핵무기 얘기도 안 나올 수가 없을 텐데, 핵은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끼리는 ‘안정과 불안정의 역설(stability–instability paradox)’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측이 핵을 가져서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서로 알기 때문에 소규모 충돌은 오히려 더 많이 한다는 역설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인도와 파키스탄, 인도와 중국입니다. 국경에서 자주 충돌하죠. 그런 면에서 핵이 우리의 만병통치약은 분명 아닙니다.
다만 핵무기가 제공하는 억제력이 상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건 여러 차례 역사적으로 입증됐고요. 핵무장에 대한 제 의견은 다른 기회에 더 소개해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종합하자면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해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세연: 6.25 전쟁 때 만들어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의해 북한 남침 시에는 한강 이북에 있는 미군이 인계철선 역할을 하고, 유엔군이 한반도에 올 때까지 국군이 전선을 방어하고, 지원군이 도착하면 그 편재가 유엔군 차원에서 방어 반격을 합니다. 이게 기본적인 작전 개념인데, 즉 병력으로 막는 거죠.
그런데 병력 감소로 이미 많은 사단이 해편되고 있습니다.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하면 주한 미군의 역할과 주둔 여부가 재논의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육군, 특히 보병 전력을 일정 부분 확보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전쟁 수행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방금 말씀하신 방식으로 표현해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30년 뒤, 50년 뒤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21세기 후반에 대한민국 인구가 3000만 명 아래로 떨어진다면 여성 징병까지 해도 30만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럼 이렇게 볼 필요가 있겠죠. 그때는 20만 병력으로 대한민국의 국토방위를 책임지고 국제 무대에서 어디서든 기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는 6.25 전쟁, 베트남전 이후에 전투 경험이 없습니다. 이라크나 아프간에 인도적 지원을 위한 공병 부대나 의무 부대를 파병하긴 했지만, 전투 병력을 파병한 적이 없어요. 현대전의 양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한국군에 한 명도 없다는 거죠.
아까 ‘boots on the ground’라고 하셨는데, 소방의 개념으로 보면 잔불까지 다 꺼야 하는 거죠. 이스라엘 방위군(IDF)의 편재와 운영을 보면 육해공군 개념이 없고 총참모장이 중장이고, 실질적인 의사 결정은 소장 12명으로 이뤄진 협의체에서 내린다고 합니다. 더 실질적인 의사 결정은 현장 지휘관들이 하고요. 아까 외교부의 경직된 문화에서 롱 텔레그램 같은 대전략을 담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현장 전투 상황에서 현장 지휘관들에게 사실상 최종 의사 결정이 위임된 군 조직을 구현해 놓은 거죠.
아이언 돔도 처음에는 이게 말이 되냐고 했지만 미사일 방어 체계를 5년 만에 완성했습니다. 과학 기술을 현실 무기로 이식하는 급속 개발 방법론을 자기들 고유의 방식으로 구현한 겁니다. 과연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나라 혹은 새로 만들어지는 군 체계에서는 과학 기술과 국방이 사실상 한 몸으로 움직여야 할 겁니다. 물론 과학 기술은 의료에도 가야 하고, 교육에도, 복지에도, 농업에도, 해양에도, 건설에도, 교통에도 가야겠죠. 이명박 정부 때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를 묶어서 교육과학기술부를 만들었습니다. 돌아보면 몇 안 되는 잘된 정부 조직 개편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 또한 근본적인 한계는 있습니다.
사일로로 구성된 기능별 조직을 단순히 묶는 것만으로는 두 개의 기능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다시 말해 과학 기술 인재 양성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겠지만, 교육부와 섞인 DNA를 가진 과학 기술 부처에서 국방과 의료와 교통과 건설의 문제를 더 잘 풀 수 있느냐, 이건 아닐 수 있거든요. 다르파(DARPA,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처럼 공무원 조직이 아니면서 가장 혁신적인 과학 기술과 안보의 R&D를 수행하는 체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정부 조직의 관점에서는 말씀드린 바와 같고 군사 작전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 군이 잔불까지 끄고 안정화하는 민사 작전 능력까지 갖추려면 고도화된 과학 기술과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에 능통한 최고 전문가들도 있어야 할 겁니다.
21세기 후반에 필요한 국방 전략을 짜려면 예를 들어 10만 명의 보병 전력이 필요했던 과거의 작전을 5000명의 보병 전력을 가지고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의 고민이 여기에 집중돼야 합니다. 외교 정책과 안보 정책의 실행 수단으로서의 군사 정책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과학 기술이 들어와야 합니다. 10만 명이 하던 것을 5만 명이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1단계로 하고, 5만 명이 하던 것을 2만 5000명이 할 수 있게 하고, 이걸 다시 1만 명, 5000명이 할 수 있게 하고. 병력의 규모는 스케일다운, 기술의 발전은 스케일업이 되겠죠. 참고로 이스라엘은 IDF를 처음 만들 때부터 워낙 인구가 적다 보니 전력의 주된 부분을 예비군이 수행하게 설계했다고 합니다.
실현 경로도 함께 생각해 봐야겠죠. 예를 들어 20만, 10만, 5만으로 줄여 가는 게 나을지, 20만에서 5만으로 가는 것을 일단 돌리면서, 이와 동시에 5000명이 할 수 있는 더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체계를 별도 트랙으로 만들지. 그러니까 강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할지, 혁명적으로 체계를 바꿀지를 정해야죠. 이건 논란의 여지가 많을 거예요. 무기 개발에서 항상 나오는 문제이고, 마찬가지로 산업계에서도 모든 분야에 다 맞는 답은 없는 딜레마적 상황이죠.
어떤 경로를 택할지는 지금 우리가 논의할 사항은 아니겠죠. 궁극적으로 50년 뒤에는 지금 10만 명이 하던 것을 5000명이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 관문을 통과하면 인구 3000만 명의 국가가 제국의 운영 능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게 안 되고 옛날 방식만 들고 있다가는 별 영향력 없는 고만고만한 나라로 전락할 수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 할 중요한 산이 될 것 같습니다. 만약 군사 전술 차원에서 우리가 이런 변화에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이게 안보 정책, 외교 정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홍태화: 사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슈인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네요. 아까 이스라엘 예비군을 잠깐 언급하셨는데, 제가 마침 얼마 전에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교육 영상에도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인구 감소에 따라서 우리 정예 예비군이 정말 중요하다. 이론적으로 맞는 말이고, 예비군 병력이 많으니까 가용 전력으로서 능력과 의지가 있다면 정말 훌륭한 자원이긴 하죠.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훨씬 더 많은 준비가 확실히 필요해 보입니다.
김세연: 본격적인 답변에 앞서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더 결합하겠습니다. 지금 상태의 예비역 병장이 대령 같은 지혜로운 전략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러려면 인적 자원에 대한 충분한 투자가 필요하겠죠. 예를 들어 고용 시스템과 예비군 자원의 고도화 방안, 군사 전략이 물고 들어가게 되겠죠. 〈스케치 다이얼로그〉에서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사실 이 디자인입니다. 기존의 정부 시스템은 1차원이에요. 평면 사일로가 쫙 있어서 두 개를 묶으려면 전부 다 총리실로 묶어서 넘겨야 하는데, 총리실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한계를 안고 있어요. 각 부분의 기능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비군 교육에도 전혀 다른 개념의 체계가 작동돼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을 덧붙였습니다.
홍태화: 그 문제의 핵심은 결국 돈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국방부 연구 용역 보고서에서 예비군 훈련 기간을 30일로 연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취지는 맞죠. 감을 되살리려면 장기간 훈련해야 하니까요. 근데 학생이나 월급 받는 직장인이 유급 휴가처럼 다녀오기도 쉽지 않지만, 특히 자영업 하는 분들은 한 달 동안 국가에 봉사해야 하는 공백이 너무 크죠. 그걸 모두 국가에서 배상해 줄 것이 아니라면요.
또 하나 유념해야 할 부분은 일반 사병이 전략을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어떤 군사 전문가께서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분대장을 뽑을 때도 속된 말로 계급이 높다고 바로 주는 게 아니라 똘똘한 병사를 뽑고, 대신 분대장 휴가 같은 복지 혜택을 확 늘려야 한다는 거예요. 그럼 분대장을 하려고 경쟁이 일어나고 엘리트 군사가 탄생할 수 있다는 논리죠. 가성비가 좋은, 현실적으로 괜찮은 방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분대장 권한도 늘려서 능력 있는 병사들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간다면 이스라엘 모델 비슷하게라도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세연: 일반 병에 대한 교육 훈련 투자가 부사관급으로 올라가야 그런 체계가 유효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지금 상태에서 바로 넘어가는 건 현실적으로 구현이 쉽지 않아 보이네요.
홍태화: 결국 이것 역시 돈이라고 봅니다.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혁신은 저희가 대화 나누는 그런 혁신이 아니라 그냥 사병들 월급 올려 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병장 월급이 거의 하사 수준이 되니까 하사는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도미노 효과가 너무 심해서 부사관 지원율이 처참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그보다도 심각한 군대 내부의 문제들과 맞물리고 있다고 합니다. 병사와 간부 대우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이라고 합니다. 간부 숙소, 당직비, 훈련 수당 관련하여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해요. 처우 개선 얘기가 몇 년 전부터 나왔는데 실질적인 개선은 적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일부 장성급 인사들 사이에서는 군사 교리와 전략 공부에 치중하기보다 내부 정치 게임이 심각해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말 우려스러운 상황이죠.
김세연: 사병 급여 인상도 당연히 필요했지만 장교 및 부사관들의 보상 체계와의 균형을 깨면서 단기에 급속도로 인상한 것도 포퓰리즘의 일환인 점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로 인한 박탈감, 사기 저하 등으로 부사관 퇴역이 엄청 많다고 들었습니다. (편집자 주: 2024년 하사 1호봉은 월 181만 5100만 원을 받는다. 병장은 125만 원이다. 2025년에는 병장 월급은 150만 원으로, 여기에 내일준비지원금 55만 원을 포함하면 월 최대 205만 원을 받게 된다.)
이렇게 외교와 종이의 앞뒷면 관계인 안보에 있어서 인구 변화가 불러올 우리 군의 역량 변화를 예측하고 논의해 봤습니다. 오늘 대화에서 마지막으로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2030년대에는 북극 빙하가 모두 소멸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기후 변화 추세가 지속되면 북극해에 얼음이 없는 날이 점점 늘 것이고, 이와는 별개지만 언젠가 결국 빙하가 다 녹으면 해수면이 상승해 지금의 해안 도시들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 됩니다. 현재 해안 도시의 인구 이주 이슈가 있겠죠. 지금의 동토가 곡창 지대로 바뀔 수도 있고요.
현재로서는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21세기 후반에 만약 그런 판도가 된다면 국제 정치에서의 국력이나 지정학적 조건들이 지금과는 극적으로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상상의 영역이어서 지금 바로 현실적 논의로 넘어가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큰 변화가 있을 때 우리가 준비까지는 아니어도 어떤 생각을 해봐야 할지 가볍게 던져 보는 질문으로 오늘 대화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홍태화: 북극 빙하가 녹는 이슈와 관련해서 가장 큰 스테이크 홀더는 러시아입니다. 북극 빙하가 녹으면 바닷길이 새로 뚫리는 셈이고, 시베리아가 녹으면 천연자원을 개발할 수 있게 되니까, 러시아는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지만 굳이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북극 자원을 두고 캐나다, 노르웨이, 러시아, 미국이 쟁탈전을 벌인다고 하는데, 러시아 외교 정책의 특징은 이슈 연결을 상당히 잘한다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연계해서 레버리지를 창출하는 게 러시아의 유구한 외교 전통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2016년 10월에 미 국무부가 시리아 회담 중단을 발표한 후 러시아는 미국과의 플루토늄 폐기 협정을 중단합니다. 2008년에는 그루지야 침공에 대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서방과의 반테러 공동 전선 전망을 지렛대로 활용했고요. 러시아는 이런 식으로 거리가 좀 있어 보이는 이슈들을 저글링하면서 파워 게임을 하거든요.
북극해 이슈도 파워 게임의 변수 중 하나로 활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직접적으로 북극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보고, 러시아나 미국이 이 이슈를 다른 곳에서 어떻게 활용할지도 생각해 봐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른 얘기이기는 합니다만, 중거리 핵전력 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의 사례를 보면 ‘아, 정말 우리와 관련 없어 보이는 이슈들도 신경 써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INF 조약은 1987년에 미국과 소련이 사인한 조약인데요, 사거리가 500~5500킬로미터인 중거리 미사일을 폐기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부상한 중국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생겼고, 또 러시아가 그동안 조약을 잘 안 지켰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가 2019년에 이 조약을 파기해 버렸습니다. 1987년에는 중국이라는 변수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가 중국이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니까 미국이 조약을 깹니다. INF 조약이 배치를 금하는 중장거리 미사일을 괌에 배치한다는 소문이 많습니다. 일본에 배치될 수 있다는 얘기도 있고요. 아시아 안보에 매우 중요한 함의가 있겠죠. 즉, 1987년에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조약이 2024년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싶겠지만, 유심히 지켜봐야 할 이슈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북극도 우리와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러시아와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새로운 장기말을 가지고 어떻게 게임을 하는지는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세연: 북극의 영유권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어도 저는 이게 사실 외교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남극이든 북극이든 달이든 화성이든 우리가 논의에 참여할 수 있게 선을 걸쳐 놓는 논리적 근거를 찾아서 그 논의의 장에 명함을 깔아 놔야 한다는 생각이 필요한데, 그런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아서 현저하게 변화한 기후 조건 아래에서 외교 안보 정책은 어떤 접근을 해야 할 것인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가령 북극에 직접 국경이 닿아 있지 않은 국가들은 ‘북극 근접 국가(Near-Arctic state)’라는 개념을 만들어서라도 이해 당사국으로 스스로 자리매김을 하는데요.
홍태화: 그거야말로 초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해서 성과를 내야 하고, 게다가 5년마다 성과를 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쉽지 않죠.
김세연: 오늘 대화를 하면서 의문 하나가 들었습니다. 우리가 아까 후발 주자로서 일본의 외교 정책을 벤치마킹해서 급속히 추격하는 접근을 취해 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만, 외교부 산하 기관, 정부 출연연이나 대학, 싱크탱크들에서 제국의 운영 경험을 가진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유럽 주요국의 외교 정책을 분석하고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데, 혹시 현황을 알고 있으신지요?
홍태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싱크탱크 내에 지역 센터가 각각 있기는 합니다만, 사실 지역 전문가분들은 학계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분들과 정부 간의 유기적 연계성이 지금보다 강해져야겠죠.
아까 잠시 말씀드렸습니다만 옆 국가가 뭘 한다고 해서 반드시 따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제 정치에는 분명한 명제와 현상이 있고, 이걸 가장 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강대국들의 대전략입니다. 우리 외교 안보 담론에서도 제가 기고한 글의 댓글을 보면 미국이 그런다고 일본이 그런다고 우리가 왜 따라가야 하느냐, 이런 게 많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다고 우리가 따르는 게 아니죠. 국제 생태계가 이렇게 돌아가니까 미국과 일본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고, 우리는 미국과 일본의 행동을 보면서 국제 생태계의 근본을 이해하고 우리의 맞춤형 전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A 국가의 전략을 보고 이거 좋네, 하면서 우리의 전략으로 삼기보다는 A 국가의 전략을 보면서 이게 국제 정치 생태계에 대해 보여 주는 게 뭘까, 국제 시스템은 어떻게 돌아갈까, 이런 근본을 파악해서 더 큰 명제에서 우리 전략을 설계하면 좋겠습니다. 별 차이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야말로 아전인수식 따라 하기와 진정한 벤치마킹, 둘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장기적인 과제이고 겉보기에 너무 학술적이고 이론적인 이야기라 현실과 거리가 있게 느껴질 수 있어서, 싱크탱크나 정부 연구소에서는 섣불리 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학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과 관계를 보기 힘들고, 인과 관계를 보지 못하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전략이 뭔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몇 차례 언급했던 일본 사례로 보자면, 일본이 동남아 국가들에 해양 경찰 능력 강화를 지원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대로 따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일본은 이걸 왜 할까. 그럼 더 큰 명제가 보입니다. 경제 강국은 수송로가 중요하고, 수송로를 지키기 위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지정학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명제를 찾고, 명제를 이해하고, 명제에 따라 우리의 전략을 마련해야 합니다.
김세연: 마지막에 중요한 부분을 집약해 주신 것 같습니다. 국가의 운명이 우리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변수들에 의해서 사실상 결정돼 버리고 그 운명이 그대로 부과되는, 즉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인식이나 역량, 판단력의 부족으로 인해서 구성원 전체가 불필요하게 힘든 시간과 고통을 부담해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세계 전체를 바라보면서 국가적 안위를 보장할 수 있는 발상과 실천을 할 것인지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스케치 다이얼로그〉 첫 번째 시간으로 홍태화 연구원과 말씀 나눴습니다. 앞으로도 의미 있는 대화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 방면에 걸쳐서 깊이 있는 통찰을 들려주신 홍태화 연구원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홍태화: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